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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퍼억.
퀘럴이 나무에 박혀 부르르 떨렸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래요?”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소공녀님, 식사를 계속하십시오.”
준은 퀘럴이 박힌 나무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식사했다.
한편, 느닷없이 날아오는 퀘럴에 놀란 엘프는 몸을 날려 피하면서 은신술을 펼쳐 주변과 동화되었다.
‘어떻게 저자가 나의 위치를 알았지?’
준은 빵을 뜯어 먹으면서도 신경은 뒤쪽에 가 있었다.
은신술을 펼쳤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흐릿하게 느껴졌다.
‘음… 숲에서 수련을 제법 많이 한 모양이군. 위험해 보이지 않으니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지?’
식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리안느는 피곤했는지 잠자리에 눕더니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준은 모포로 아리안느를 덮어주었다.
“밤 날씨가 제법 쌀쌀하겠어.”
모닥불에 땔감을 몇 개 집어넣자 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준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근처에 있는 바위를 은폐물로 삼고자 제법 큰 바위를 들어올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들 수 없는 무거운 바위였지만 내공을 사용하는 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위를 몇 개 옮겨 아리안느가 화살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은 그녀를 등지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드로이안 산맥의 월계수 엘프부족의 여전사 글리아나는 평소보다 멀리까지 정찰을 나왔다가 우연히 강력한 인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그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왔었다.
한 발의 퀘럴이 자신이 은신해 있는 곳으로 날아왔기에 이번에는 배나 멀리 떨어져서 감시하고 있었다.
‘으응? 왜 저렇게 앉아서 눈을 감고 있지? 저렇게 잠을 자면 불편할 텐데?’
강력한 인간이었지만 조금은 괴팍하다고 해야 하나…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특이한 인간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벌써 두 시간 정도를 저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아… 따분해. 어쩌지?’
하품까지 나오기 시작하더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고,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뽀로롱.
날이 밝았는지 이름 모를 산새 두 마리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더니 부리를 서로 부딪치면서 한 차례 지저귀고는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글리아나는 눈이 커졌다.
‘이…이런?’
있어야 할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휘휘휘휙.
준은 아리안느를 등에 업고는 경공술을 시전해 숲속을 빠른 속도로 나는 듯 나아갔다.
바람 소리가 큰 것으로 보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준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서 추격하고 있는 글리아나는 점점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보다 숲에서 더 빠르게 달리는 것만 해도 믿을 수 없는데, 월계수 엘프부족이 살고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큰일이었다.
“이…이거 어쩌지? 큰일인데?”
한참을 달려 나가던 준은 갑자기 멈추었다.
아리안느는 준의 등에 업혀 너무 빨리 달렸기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준의 등에 바짝 붙였었다. 그런데 준이 갑자기 멈추기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절벽이었다.
“절벽이네요? 다른 곳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아닙니다, 소공녀님. 눈앞에 보이는 절벽은 절벽이 아닙니다.”
“예? 눈앞의 절벽은 절벽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죠?”
“누군가 결계를 펼쳐놓아서 절벽이라고 착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누…누가 그랬을까요?”
“아마도 드로이안 산맥에서 살고 있는 종족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죠?”
“결계가 얼마나 강한지 실험해봐야겠습니다.”
“그…그냥 가면 안 될까요?”
“드로이안 산맥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결계라 얼마나 많이 돌아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음… 그럼 준 님이 알아서 하세요.”
준은 등에 업고 있던 아리안느를 내려놓았다.
아리안느는 뒤로 물러나 지켜보았다.
잠시 눈앞에 펼쳐진 결계를 바라보던 그는 돌멩이를 하나 집어 던져보았다.
팅.
역시나 준의 예측대로였다. 날아간 돌멩이는 튕겨져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거울에 비춰진 것 같은 영상이 순간이었지만 출렁거렸다.
그것 때문에 결계가 설치되었다는 것이 들켰지만 다시 복구가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했다.
글리아나는 준의 등 뒤 150m 정도 떨어진 곳의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서 이를 지켜보았다.
준은 양발을 어깨 넓이만큼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리더니 양손을 가슴 위로 천천히 치켜들었다.
“흐압…….”
파팡!
내력을 담은 장력이 날아가 결계에 격중되었다.
콰아앙!
결계의 막에 격중된 장력의 영향으로 수면이 출렁거리듯 큰 파동이 일어났지만 결계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초였지만 결계 안의 세상은 볼 수 있었다.
‘저 인간… 엄청난 능력을 가졌어.’
글리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준을 계속 살펴보았다.
스윽.
준이 한 손을 앞으로 내뻗자 이번에는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강기가 튀어나오더니 점점 커졌다.
치이이이.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결계의 막 일부가 얼음이 녹듯이 순식간에 녹으면서 주위로 점점 넓어졌다.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 뻥 뚫리자 결계 안의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투웅.
글리아나는 더 지켜보다가는 자신의 부족이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에 기습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스윽.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오른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것으로 화살공격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티팅.
화살은 결계의 막에 가로막혀 땅에 떨어졌다.
“아리안느 님, 일단 결계 안으로 피해야겠습니다.”
“알았어요.”
화살이 날아온 것을 보았기에 위험하다는 걸 알아챈 아리안느는 준의 말에 따라 일부가 뚫린 결계 안으로 몸을 날렸고, 준도 재빨리 결계의 막 안으로 몸을 피하였다.
스스스스.
결계 막은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결계 밖에서는 절벽 끝으로 보이지만 결계 안에서는 밖을 유리창처럼 전부 볼 수 있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글리아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튕기듯 몸을 날렸다.
처척.
가볍게 땅에 내려선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결계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우면서 한 손을 결계의 막에 대었다.
그러자 거부당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듯 스윽 팔이 결계의 막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다리와 몸까지도 전부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앗!”
글리아나는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준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준의 팔이 그녀를 잡으려고 내뻗어졌고, 그녀는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공격을 피하였다.
쉬익.
엘프 여전사라서 그런지 몸이 먼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피하였다. 그러면서도 보우를 무기로 사용하면서 휘둘렀다.
파파팟.
그러나 현란하기까지 한 준의 수공에 가로막혀 공격은 무위로 끝나버렸다.
오히려 준의 수공을 완전하게 피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퍼억!
내력이 실린 준의 수공에 가슴을 격중당하려는 찰나 글리아나는 재빨리 양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면서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쩌쩍.
“아아악!”
바위도 박살내버리는 준의 내력이 담긴 공격이었기에 양팔의 뼈에 금이 가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양팔이 스르르 밑으로 내려오고 몸은 비틀거렸다.
연속으로 이어진 준의 수공이 그녀의 가슴 앞까지 날아오자 글리아나는 두 눈을 감았다.
아무런 충격과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떠 보았더니 준이 피식거리면서 웃고 서 있었다.
그가 공격을 멈추었던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준도 충격을 받았다.
글리아나의 모습은 미의 여신이라도 되는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리안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미모만 놓고 본다면 글리아나가 한수 위라 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제각각 매력이 달랐다.
아리안느는 화사한 장미라면, 글리아나는 청순하면서 너무나 맑고 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남자라면 보호해주고픈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네 정체는 뭐냐?”
준이 정신을 차리고 말하자 글리아나가 그런 그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더니 대답하였다.
“그러는 네 정체는?”
“나? 나는 김준이라고 한다.”
“김준? 정말 인간인가?”
“그렇다.”
“으음… 믿을 수 없군. 어찌 인간이 이렇게 강하고, 몸속에 마나가 가득하지?”
‘마나? 아… 내공을 말하는 모양이군.’
“수련을 해서 그렇다.”
“233년을 살아온 나도 그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대로 말해라.”
“233년? 그…그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군?”
그제야 준은 글리아나의 모습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으음… 18살 정도의 아가씨와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유독 귀가 뾰족하고 크구나.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종족이 엘프라고 했었지?’
“그렇다. 나는 드로이안 산맥의 월계수 엘프부족의 여전사 글리아나다.”
“으음… 왜 우리의 뒤를 추격한 거지?”
“숲에 정찰을 나왔다가 너무나 강하게 보이는 인간이라 추격해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결계 안으로 들어왔나?”
“그럼 우리가 쫓기고 있었다는 것도 다 알 것이니 말 안 해도 알겠군.”
“…….”
그때, 양팔의 통증이 심해지자 글리아나는 기이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양팔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화악 일어나다가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글리아나의 금이 갔던 양팔의 뼈가 다시 복구되어버렸다.
‘으음… 엘프의 치료마법인 모양이군.’
“지금이라도 결계 밖으로 나간다면 지금까지의 일을 잊어주겠다. 그러니 어서 결계 밖으로 나가라.”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우린 이 드로이안 산맥을 가로질러 가야 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우리 월계수 엘프부족과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못할 것도 없어.”
츠으, 츠츠츠.
준은 하단전의 내공을 몸 밖으로 내뿜었다.
그 막대한 기운에 놀란 글리아나는 멈칫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준은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면서 양 무릎을 조금 굽혔다.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자세였다.
와사삭.
약 700m 안쪽의 숲에서는 녹색 물결이 밀려오듯 엘프 전사 무리가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워낙 신속하면서도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글리아나의 귀에는 전부 똑똑히 들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결계 밖으로 나가라.”
글리아나는 이상하게도 준이 위험해지는 것이 걱정되었다. 그렇기에 약간 말을 돌려서 결계 밖으로 나가길 바라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하하하, 동료들이 접근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인가?”
“허억, 그…그것까지 알고 있었느냐?”
“물론이지. 너의 귀는 커서 밝겠지만, 나도 그에 못지않다.”
스스스슷.
보우를 손에 든 엘프 전사들이 20명이나 나타나 준의 주위를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그들은 모두 허리에 롱소드를 차고 있었다.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준은 너무 태연했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글리아나였다.
“넌 포위되었는데 걱정되지도 않느냐?”
“하하하, 내가 포위되었다고 해서 겁에 질려야 한단 말인가?”
“내 동료들이 널 공격하면 넌 살아서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거야 싸워봐야 아는 거고. 한 가지만 말해 주지.”
“그게 뭐냐?”
“날 건드리지 마라.”
“호호호, 네가 위대하신 분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양쪽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엘프들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였다. 준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츠츠츠츠.
갑자기 준의 전방 10m 앞에서 2m나 되는 노인의 형상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60대로 아래턱에 수염 난 노인이었다.
“글리아나, 그 인간을 마을로 데려오거라.”
“케르킨 부족장님, 이 인간을 말입니까?”
“그렇다. 그 인간에게 함부로 무례하게 굴지 말아라.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그제야 포위하고 있던 엘프들도 보우를 아래로 내리고는 재빨리 10m 정도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