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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말을 타고 이동하던 아리안느와 준은 말을 멈춰 세웠다.
앞에는 거의 50도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지가 있었다. 흙보다는 자갈 같은 작은 돌멩이가 더 많이 깔려 있는 곳이었다.
“소공녀님,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는 너무 경사가 심해 보이니 말에서 내려 이동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준이 말의 고삐를 잡고 앞장서자 아리안느도 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들이 경사지를 약 100m 정도 올라가고 있을 때 추격대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다! 화살을 쏴라!”
“소공녀를 꼭 잡아야 해!”
시간차 공격을 하려는지 40명의 추격대원들 중 10명이나 화살을 쏘았다.
슈슈슈슈슝!
경사지의 끝에 있는 나무까지는 앞으로 50m 정도는 더 가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은 몸을 은폐할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휘리리릭!
준은 급한 대로 대거를 꺼내 들고는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하지만 화살은 아리안느도 노리고 있었다.
퍼퍼퍽!
이히히힝!
그 사이 말의 옆구리와 배에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말은 구슬프게 울부짖으면서 비틀거리다가 경사지에서 굴렀다.
“아아악!”
동시에 아리안느가 오른발 허벅지에 한 발의 화살을 맞아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거렸다. 그녀가 먼저 굴러 떨어진 말과 같은 상황이 되려는 순간, 준이 보법을 밟으면서 다가와 아리안느의 허리를 껴안고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어엇, 저저……!”
“제기랄!”
“뭐해? 화살을 쏴라, 쏴!”
슈슈슈슝!
허공으로 도약한 준은 아리안느를 가슴에 안은 상태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며 공중제비를 선보였다. 물론 화살은 모두 빗나가 버렸다.
“놓치면 안 된다! 쏴라!”
조장 헤스의 외침에 조원들은 연속으로 화살을 쏘았다.
허공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화살로 인해 더 이상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준은 차분한 표정으로 땅으로 내려서더니 엄청난 파도를 넘는 금잉어의 몸놀림을 본 따 만든 경신법인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를 시전하였다. 그리고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틀어 순식간에 이동해 경사지 끝에 도착했다.
그것을 본 추격자들의 조장인 헤스와 대원들은 넋이 나갔다. 준이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 같았던 집중화살 공격을 믿을 수 없는 몸놀림으로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이럴 수가… 블링크 마법은 아니었어.”
“놈이 도망쳤으니 어서 추격해야 합니다.”
옆에 있던 대원에 말에 정신을 차린 헤스는 외쳤다.
“소공녀가 화살에 맞았으니 멀리가지는 못한다! 추격하라!”
“놈을 잡자!”
이들이 경사지에 접어들자 경사지 끝에서 은신하고 있던 준은 크로스 보우를 꺼내 겨누었다.
“이젠 내 차례야.”
츄츄츄츄츙!
연속으로 발사된 퀘럴이 허공을 가로질러 그들에게 날아갔다.
퍼퍼퍽!
“커억, 아아악!”
가슴이나 배, 머리, 다리에 퀘럴을 맞은 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거리다가 경사지를 굴러 떨어졌다.
“이…이런!”
당황한 헤스는 앞에 있던 대원이 퀘럴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의 몸을 잡아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그러나 강력한 파워가 실린 퀘럴은 시체의 등을 뚫고 튀어나와 헤스의 가슴에 박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을 뚫고 틀어 박혔다.
“끄으음…….”
신음을 흘리면서 인상을 찡그린 헤스는 쓰러지지는 않았다. 준비성이 뛰어난 그였기에 가슴 부분에 철판을 끼워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퀘럴에 맞고도 죽지 않은 이유였다.
그는 가슴에 박힌 두발의 퀘럴을 뽑았다. 다행이 철판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움푹 들어가 있었다.
“이 철판이 아니었다면 죽었겠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뒤를 돌아보니 바로 자신의 등 뒤에 두 명의 대원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 덕에 둘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퀘럴 공격에 당해 굴러 떨어져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크으… 40명 중에서 겨우 3명이 살았단 말인가?”
퀘럴은 두 발이나 더 날아왔지만 별다른 효력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후로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헤스와 두 명의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언제 또다시 퀘럴이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이런. 이걸 어쩐다?”
나무 뒤에 아리안느를 내려놓은 준은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으나 곤혹스러웠다. 민망하게도 그녀의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으으… 아악…….”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마에서도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소공녀님,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으으… 날 이곳에 두고 가지 말아요. 제발…….”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공녀님을 두고 혼자 가지 않습니다.”
“그…그 말… 저…정말이죠?”
“예, 믿으세요. 경사지에 세 놈이 남아 있으니 그들을 먼저 처리한 후 상처를 치료해야겠습니다.”
“아…알았어요.”
경사지 끝에 다시 준이 나타났다.
헤스와 두 대원들은 막 이동을 하려다가 그를 보고 멈칫하면서 긴장했다. 기마자세를 취한 준이 양팔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면서 내뻗었다.
“격공장(隔空掌).”
“……?”
헤스와 대원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상한 자세를 한 준이 갑자기 양팔을 내뻗었기에 마법이라도 펼쳤나 싶어 긴장했었지만 자신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준이 펼친 격공장은 수많은 장법의 하나로, 임의의 한 점에서 힘을 터뜨리는 발경법이었다. 목표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위력도, 영향도 없어 알아채기가 힘들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면 방어할 방법도 없이 기가 폭발해 공격을 당하는 것이기에 살아남으려면 먼저 알고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들이 아는 것은 무리였다. 한 번도 본적도 없는 공격의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퍼퍽!
타격음이 터지면서 헤스의 가슴에 격공장 두 방이 모두 명중되었다. 철판을 덧대어 몸을 보호하였지만 격공장은 내력으로 펼치는 발경법이었기에 이번에는 무사할 수 없었다.
울컥.
“크아아악!”
가슴에 대놓았던 철판이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갔다. 헤스는 내장 조각이 뒤섞인 검붉은 피를 분수같이 내뿜으며 뒤로 튕기듯 날아갔다. 폐부를 찢길 때 나오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이 그가 낸 마지막 소리였다.
헤스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두 대원은 그와 부딪히면서 경사지를 굴러 떨어졌으며, 8m 정도 날아가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갔다.
츄츄츄츄츙.
연이어 크로스 보우에서 발사된 퀘럴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격중되어 머리가 터지면서 즉사해 버렸다. 헤스의 머리에도 두 발의 퀘럴이 박혔다.
그들이 죽은 것을 확인한 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라졌다.
아리안느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준은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먼저 대거의 날을 불에 달구어 소독한 후 화살을 뽑고, 그 상처에다 술을 부어 소독함과 동시에 대거의 날로 살을 지져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매끈한 허벅지에 상처가 남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소공녀님, 이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필요한 걸 꺼내 준비해야 하는데 혹시 포션을 가지고 있습니까?”
별다른 기대 없이 한 말이었으나 그녀에게선 희망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한스 경이 나에게 준 포션 한 병이 있어요.”
“저…정말 입니까?”
“주머니 속에 있으니 좀 꺼내 주시겠어요?”
“그럼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금화가 몇 개, 작은 보석함이 한 개, 그리고 향수병 같은 자그마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유리병 속에서 녹색의 액체가 출렁거렸다.
“소공녀님, 이게 혹시 포션입니까?”
“그…그래요. 그게 포션이에요.”
“그렇군요.”
준은 포션을 처음 보았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들었던 포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살짝 기대가 됐다.
“소공녀님, 조금 아프시더라도 참으세요.”
“네, 알겠어요.”
아리안느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자, 준은 화살의 깃대를 부러뜨렸다. 그런 다음 그곳에 술을 부어 소독하고는 재빨리 화살촉이 튀어나온 곳을 잡아당겼다.
주우욱.
이내 붉은 피와 함께 화살이 뽑혀 나왔다.
“으으으…아악…아아…….”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아리안느는 그 고통을 잘 참았다. 준은 화살이 뽑힌 상처에 재빨리 포션을 살짝 부었다.
치이이이.
소독이 되는 것인지 상처 부위에서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순식간에 상처 부위가 아물기 시작했다.
‘으음… 포션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한 약이구나.’
허벅지 윗부분은 이렇게 포션으로 상처가 아물었지만 아직 허벅지 밑부분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은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곳에 포션을 부었다.
치이이이.
조금 전과 같이 상처 부위에서 기포가 피어오르면서 즉시 아물었다.
“소공녀님, 이제 상처가 아물었으니 나머지 포션을 복용해야 합니다.”
“아…알았어요.”
눈을 뜨면서 고개를 돌린 아리안느는 준이 내민 포션을 받아 들고 마셨다. 그 사이 준은 아리안느의 허벅지를 살펴보았는데 그곳에는 이미 새살이 돋아나 있었으며,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준은 새살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서 말하였다.
“소공녀님, 아프지는 않습니까?”
“네, 약간 아픈 느낌은 있지만 심한 편은 아니에요.”
“치료가 잘된 것 같습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한번 걸어볼게요.”
아리안나는 일어나 걷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완벽하게 치료가 된 것은 아니었고, 일주일 정도는 무리하지 말아야 할 듯했다.
“아직은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적들이 추격해오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그…그런…….”
“지금은 걸을 수도 없고 말도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경사지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제가 여기에서 적들을 막는다면 얼마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은 버티지 못하지만 일단 해가 질 때까지는 가능할 겁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소공녀님을 업고 최대한 멀리 거리를 벌려볼 생각입니다.”
“나를 업고 이동하려면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소공녀님은 가벼우니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준의 말에 아리안느는 부끄러운지 흰 뺨을 붉게 물들였다.
준은 추격해오는 적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과일을 깎아서 아리안느에게 내밀었다.
“먹어봐요. 맛있습니다.”
“고마워요.”
준과 아리안느는 분위기 좋게 과일을 깎아서 나누어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