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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다가닥 다각.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길을 따라 8마리의 말이 이동 중이었다.
기병 두 명이 앞장서고, 아리안느와 한스, 준, 쉐인, 베누아와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하녀 한 명이 그 뒤를 이었다.
주위는 온통 녹색 풀밭이었다. 약간 경사진 언덕만 있을 뿐 평야와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대낮이라 평화롭고 조용하였다.
반나절가량을 말 위에서 이동하였기에 남자들은 아직 괜찮았지만 연약한 아리안느와 하녀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한스 님,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준의 말에 한스는 아리안느와 하녀들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합니다. 미쳐 소공녀님이 힘드신 걸 몰랐습니다.”
“마침 저기 언덕 위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사방이 탁 트였기에 주변을 살피기에도 좋고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덕위에 도착한 그들은 말에서 내렸다.
각자 말 옆구리에 묶어두었던 물주머니를 꺼내 물을 마셨다.
아리안느도 하녀들이 건넨 물주머니를 받아 물을 마셨다.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과일을 꺼내 하녀들에게 건네었다. 그들은 달콤한 과즙과 과육을 나누어 먹었다.
한스는 준과 함께 아리안느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지도가 그려진 양피지를 꺼내어 펼쳤다.
“소공녀님, 약 반나절 정도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그대로 직진한다면 공작 각하의 정적인 헤리슨 백작령이 나올 테고, 우측 길로 이동한다고 해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바로 드로이안 산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쩌죠, 한스 경?”
“일단은 드로이안 산맥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몬스터들이 많아서 위험이 예상됩니다.”
“두 곳 다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헤리슨 백작령보다는 그래도 드로이안 산맥을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드로이안 산맥은 몬스터도 많고 여간 험한 곳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죠?”
“그렇습니다. 여기 준 님께서 계시기에 이런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왕국의 10대 상단이 가끔 통행하기도 합니다.”
“왕국의 10대 상단이 말입니까?”
“예, 소공녀님. 몬스터가 많이 살고 있기에 300명 정도 규모의 용병대를 이끌고 드로이안 산맥을 넘는다는군요.”
“하긴, 그 정도 규모면 어지간한 몬스터도 접근하기 힘들겠어요.”
“그렇습니다만, 우리에게는 무척 힘든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겨우 여덟 명이 전부이니 말입니다.”
“한스 경, 내가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꼭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죽더라도 준 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한스 경이 죽긴 왜 죽어요?!”
“소공녀님, 그래서 제가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한스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리안느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옆에 서 있던 준이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 님, 드로이안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이 그렇게 위협적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실을 추격해오는 적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군요.”
“아마 이번에는 기회만 보고 있지 않고 바로 막강한 무력으로 소공녀님을 공격할 것입니다. 운 좋게 그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드로이안 산맥에 살고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그럼 신속하게 드로이안 산맥을 지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이미 적들은 우리가 어디로 갈지 예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놈들이 먼저 드로이안 산맥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기다린다고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놈들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공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큰일이군요.”
“그러니 고민입니다. 드로이안 산맥만 잘 넘는다면 공작 각하께서 보내신 병력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니 더 이상 적들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한스 님, 다른 방도가 없다면 드로이안 산맥을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그럼 걱정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면서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체력을 회복한 후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소공녀님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준 님의 말이 맞아요. 지금의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겠어요.”
“으음… 소공녀님, 그럼 더 이상의 의견이 없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회의는 끝이 났으며, 베누아와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하녀 베스는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일행이 전부 여덟뿐이라 금방 식사가 준비되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언덕 위 길가의 풀밭에 자리를 잡았기에 천막은 치지 않고 그냥 모포만 깔고 휴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야 언제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우웅, 붕붕.
날이 어두워지자 풀밭의 언덕으로 나방 한 마리가 날아와 주위를 날아다녔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나방 같았지만 두 눈이 붉은 게 조금 이상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 있던 준은 나방이 날아다니는 소음이 거슬렸다.
츄웅.
준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간 지공에 나방이 박살나버렸다.
“음…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준이 있는 곳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글 용병대가 대기해 있었다.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 합류한 마법사의 조언을 수렴했다.
백색 로브를 입은 프린스는 화염계 마법을 익힌 5서클 마스터급의 마법사였다.
부대장인 쇼칸과 함께 의뢰받았던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용병대장인 스칸디의 긴급 통신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리안느의 뒤를 추격하면서 스칸디 대장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마법사들이란 원래 분석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게 일이라 머리가 뛰어난 편이었다.
프린스가 스칸디의 말을 듣고 판단한 결과, 공격할 때 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5km나 떨어져서 대기하면서 나방에 마법을 걸어 아리안느가 있는 언덕을 정찰해본 것이다.
“끄으으… 젠장!”
울컥.
프린스는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더니 입에서 피를 한사발이나 내뿜고서야 괜찮아졌다.
옆에 있던 스칸디 대장과 쉬츠 부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린스, 괜찮나?”
“크으음, 괜찮습니다.”
“프린스, 갑자기 왜 그러나?”
“으음… 대장님께서 말해주셨던 그자가 눈치를 채고는 나방을 박살내버렸습니다.”
“으… 또 그놈이야?”
“이것으로 놈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겠습니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군.”
“어차피 소공녀는 드로이안 산맥으로 갈 것입니다. 길을 앞질러서 가기보다는 뒤를 따라가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생겼을 때 공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소공녀 일행은 겨우 8명이야. 우린 229명이나 되는데 뒤만 따라가야 하는가?”
“비록 106명에서 123명이 증원되어 229명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놈의 실력이 소드익스퍼트 상급이나 어쩌면 소드마스터급에 근접한 놈인지도 모릅니다.”
“그…그럴 리가?”
“아닙니다. 대장님, 만약 놈이 소드익스퍼트 중급만 되어도 이글 용병대원 50명과 맞먹습니다. 상급이면 150명이고… 만약 소드마스터급이라면 이글 용병대원 전원이 달라붙어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럼 수적인 우세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프린스가 있기에 적절하게 화염계 마법으로 지원공격을 한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역시 프린스야. 이제야 그놈을 처리할 방법이 생겼군. 프린스의 작전대로 할 것이니 모두들 오늘밤은 마음껏 쉬어라!”
언덕 위의 풀밭에서 가부좌를 틀고 천왕대심공을 운용 중이던 준은 그동안 꾸준하게 기를 끌어 모아서인지 넘치는 파워를 느꼈다. 현재는 7성의 경지였지만 곧 8성에 들어갈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구나. 이래서는 절대 원하는 걸 잡을 수 없어.’
그는 흐트러진 마음을 잡기 위해서 먼저 숨결부터 안정시켰다. 긴 호흡을 통해서 점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파앙.
갑자기 머릿속에서 그동안 꽉 막혔던 것이 터지면서 환희가 찾아왔다. 그리고 마약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진 것처럼 기분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츠츠츠츠.
그동안 깨닫지 못해서 답답했던 구결이 일시에 다 풀렸다.
‘후후후, 깨달았다! 드디어 천왕대심공의 8성에 올랐어!’
준은 느낌만으로도 7성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자 푸르스름한 안광이 뻗어 나왔으나 한 번 더 눈을 깜박거리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준이 일행과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활활활.
약해진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집어넣자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지만 피곤함을 모르는 준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심안을 일으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법 멀리까지 살펴보았지만 위험이 될 만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후, 컨디션이 최상이군. 아침에 드로이안 산맥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적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리안느는 내가 지켜줘야겠어. 틈틈이 게릴라 전법으로 적들을 괴롭히면서 산맥을 나아가면 될 것 같아.’
준은 마법주머니 속에서 크로스 보우를 꺼내었다.
기병들을 많이 죽인 놈의 무기였다. 준이 생각하기에 보우는 연속발사가 불가능한 무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연사가 가능했던 것일까?
준은 크로스 보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쌔신이나 병사들이 보유한 크로스 보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장식이 섬세하였고, 강철로 주조된 것인데 아주 가벼웠다. 또한 발사 장치는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가 되도록 되어 있었으며, 퀘럴이 장착되어 있는 공간에는 온통 룬문자와 도형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 이것이 핵심적인 부분이었어.”
어느 장인이 만든 것인지 크로스 보우는 대단한 무구였다.
줄을 잡아당겨 장착한 후 한쪽을 향해 조준하고는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투웅.
경쾌한 소리가 터지면서 퀘럴이 빠르게 날아갔다.
퍼억!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돌멩이를 겨누었는데 조준한 대로 정확하게 격중되었다. 돌멩이는 퀘럴과 부딪치면서 튕겨져 버렸고, 퀘럴은 땅바닥에 박혔다.
스윽.
준의 손짓에 땅속에 박혔던 퀘럴이 스르르 밖으로 빠져나오더니 되날아왔다.
천왕대심공이 높아지면서 염력도 많이 강해졌다.
은빛이 번뜩이는 퀘럴의 촉은 날카롭고,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져 광택이 났다. 또한 나뭇잎 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어서 한층 멋을 더하였다. 퀘럴 하나에도 정성을 많이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음… 이것을 만든 장인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정말 잘 만들었어.”
퀘럴이 장착되는 공간은 약 여섯 발 정도 넣으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할 좁은 공간인데, 이 공간에 마법을 새겨 넣었기에 퀘럴을 많이 집어넣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착해둔 줄을 풀자 퀘럴이 들어 있는 공간의 덮개 면에 있던 글자가 사라져버렸다.
“으응, 뭐였지?”
준은 호기심에 다시 줄을 당겨 걸었다. 그러자 퀘럴이 들어 있던 공간의 덮개 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준은 쉐인에게서 마케리안 대륙어를 틈틈이 배우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준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하하, 이 글자는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었어.’
해석해보니 그 글자는 ‘812’였다.
걸었던 줄을 다시 풀자 글자가 사라졌다.
다시 손에 쥐고 있던 퀘럴을 공간에 집어넣자 글자가 또 나타났는데 ‘813’이었다.
“이건 퀘럴이 몇 개 남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였어.”
마음에 드는 무구였기에 이것을 획득한 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후, 놈들에게 써먹기엔 안성맞춤인 무기야.”
준은 크로스 보우를 다시 마법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어느덧 날이 밝았기에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따끈한 스프와 빵, 과일로 아침을 먹은 일행은 서둘러 드로이안 산맥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