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허리케인-17화 (1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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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이곳은 아직 위생관념이 적었다.

소공녀인 아리안느도 매일 세수를 하고 실로 이를 닦는 정도였다. 오늘이 켈리온 성을 떠나온 지 3일째인데 아직 머리를 감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리안느에게 향기가 나는 것은 방향 주머니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향수라는 것도 개발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모든 것에서 낙후된 세상이었다.

“준 님, 향기로운 냄새가 나네요?”

“몸을 씻어서 그럴 겁니다.”

“무엇으로 씻으셨는데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죠?”

“제가 개발한 비누라는 물건인데 하나 드릴 테니 써보십시오. 아주 좋을 겁니다.”

“비누라고요?”

“예, 여기 있습니다.”

준은 천연비누 하나를 아리안느에게 내밀었다.

비누를 받아든 그녀는 냄새를 맡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절대 먹으면 안 됩니다. 또한 눈에 들어가도 아주 따갑습니다. 그것만 조심하시면 아주 유용한 물건이 될 것입니다.”

“아…알겠어요.”

“사용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손을 씻는다고 가정하면, 손에 물을 묻혀서 이 비누를 약간 문지르면 거품이 일어납니다. 그때 물에 씻으면 때가 벗겨지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래요? 아주 간단하네요?”

“예, 그럴 겁니다. 일단 손을 씻어 본 후 나중에 목욕할 때도 사용해보면 아주 유용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럼 당장 사용해볼게요. 베누아, 가자.”

“예, 소공녀님.”

아리안느가 천막 속으로 들어가자 하녀 베누아가 뒤따라갔다.

아리안느가 하녀 베누아의 도움으로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자 천막 밖에서 기사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공녀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어요, 한스 경.”

천막 속에서 걸어 나온 아리안느는 더욱 아름다웠다. 원래부터 아름다웠던 그녀였지만 방금 목욕을 끝마치고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모습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준을 비롯해 한스까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가 한마디 하였다.

“왜 그러고들 있어요?”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우십니다.”

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아리안느는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비누로 목욕했더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어요.”

“그러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들은 천막 앞에 놓인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각자 자리에 앉았다.

차려진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켈리온 자작이 보내준 시녀들의 음식 솜씨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공터의 중앙에는 모닥불을 크게 피워 놓았기에 주위가 제법 따뜻하면서도 밝았다.

아리안느와 한스, 준, 쉐인, 맥칸은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노예들은 한쪽에 앉아서 식사를 했으며, 베누아는 켈리온 성에서 따라온 시녀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50명의 기병들도 10명씩 조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쩝쩝, 후루룩.

야외에서 먹는 저녁이라 더 맛있었기에 준은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준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깨작거리던 아리안느도 준이 식사하는 것을 보더니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웃었다.

‘어머, 어쩜 저렇게 예절 없이 먹을 수 있지?’

‘허어, 며칠은 굶은 사람 같군.’

‘이게 그렇게 맛있었나?’

한참 신나게 먹던 준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크흠.”

“어어험.”

“흠흠.”

준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해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빵을 뜯어 입에 넣으면서 스프를 떠먹었다.

잠시 후 후식까지 모두 비운 준은 만족한 듯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이 먹어치운 음식의 양이 자신들의 배가 넘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자 베누아가 향기로운 차를 가져왔다.

“소공녀님, 에델차입니다.”

쪼르르.

아리안느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준도 베누아가 부어주는 차를 마셨다.

‘음… 에델차라… 향이 좋구나.’

준은 배도 부르고 향기로운 차도 한잔 마셨으니 소화라도 시킬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였다. 물가에 있는 제법 크고 평평한 바위였다.

준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먹었나? 소화도 시킬 겸 천왕대심공이나 운용해보자.’

눈을 감고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서 기가 하단전에까지 이르도록 했다.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앉은 준을 쳐다본 한스와 맥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두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면서 천왕대심공을 운용한 준은 석상이 된 것처럼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대로 앉아 있었다.

주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병들은 준이 앉아 있는 모습에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 그 자세로 있자 서로 모여 잡담을 시작하였다.

“야… 저것 봐. 얼마나 더 저러고 있을까?”

“심심하던 참에 잘되었군. ‘30분은 더 있는다’에 20실링 걸었다. 너는?”

“좋아. 나는 30분 안에 일어난다. 30실링.”

“어허… 무슨 소리, 한 시간은 더 앉아 있을 거야.”

우루루.

기병들은 세 편으로 나뉘어 내기를 걸었다.

귀가 밝은 준은 기병들의 내기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하고 계속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어느덧 30분이 넘어 한 시간이 지나자 울고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내기에서 이긴 자들은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돈을 잃은 자들은 울상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준은 무려 3시간을 더 그대로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기병들은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흩어져버렸다.

준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응? 이곳으로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어.’

츠츠츠츠.

모닥불 근처를 제외한 모든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의 심안에는 모든 것이 대낮같이 환하게 보였다.

야간 사냥을 나온 오크 무리였다.

오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도 코를 벌름거리며 곧장 야영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각보다는 후각이 더 발달된 모양이었다.

‘으음… 가만 보니 62마리나 되는군. 느낌에 저것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좀 더 주위를 살펴봐야겠어.’

츠츠츠츠.

심안을 이용해 주위를 더 살펴보았지만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걸까? 어? 저게 뭐지?’

산속의 서쪽 편에서 은신해 있던 자가 조금 움직임으로써 준의 심안에 걸리게 되었다.

나뭇가지와 잎으로 위장을 해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 밤이라 더욱 구별이 힘들었지만, 본질을 보는 심안에는 들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의 무장을 갖춘 무리들이 주위에 은신해 있었다. 잠시 그들을 파악해 보았더니 250명이나 되었다.

‘으음… 느낌이 좋지 않아. 저놈들이 기습공격을 하려는 모양인데? 대비를 하고 있어야겠어.’

아리안느가 있는 천막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스에게 다가간 준은 나직하게 말하였다.

“한스 님,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 시간에 말입니까?”

“예, 조금 급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에 앉으시지요.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지금 오크들이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오크들이요? 얼마나 됩니까?”

“현재 저의 이목에 걸린 오크 무리는 62마리입니다.”

“으음… 그렇게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는 오크가 아니라 주변에 은신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 무장한 무리들입니다.”

“예? 그게 무슨…….”

“쉬잇, 조용히 말씀하십시오. 놈들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 산의 서쪽 80m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데, 대략 250명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큰일인데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병 50명이 전부인데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오크 무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찰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 한곳으로 모여서 적들을 막으라고 기마병들에게 은밀히 말해야 할 겁니다. 저는 그동안 오크 무리와 놈들을 막아 보겠습니다.”

“혼자서 가능하겠습니까?”

“이 방법밖에 없으니 해볼 수밖에요. 한스 님은 서둘러 아리안느 소공녀님을 마차로 모시십시오. 아무래도 마차가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다.”

“아…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천막보다는 철판을 덧댄 마차가 훨씬 안전할 겁니다.”

“당장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은 게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당장 소공녀님을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한스는 즉시 소공녀의 천막으로 가서 베누아를 불렀다.

아직 잠을 잠자리에 들지 않았기에 한스의 부름에 머리를 천막 밖으로 내밀었다.

“한스 님, 무슨 일이십니까?”

“너는 즉시 소공녀님을 모시고 마차에 들어가 있어라. 우리를 습격하려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아…알겠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습격을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베누아는 한스의 말을 알아듣고 천막 속으로 사라졌다.

준은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런 후 마법자루 속에서 컴포짓 보우와 화살통을 꺼내었다.

뿔과 나무, 쇠, 가죽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작은 크기이면서도 매우 긴 사정거리와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컴포짓 보우였다.

스윽.

컴포짓 보우의 줄을 잡아당겨 어두운 산의 한 곳을 겨누고는 손가락을 놓았다.

투웅.

화살이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아무리 컴포짓 보우의 사정거리가 길다고 해도 적들이나 오크 무리는 250m가 넘는 거리에 있었다.

퍼억!

나뭇잎으로 위장해 엎드려 있던 자의 등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크으윽!”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그자는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투웅.

또 한 발의 화살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고는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자의 가슴에 명중되었다.

“커억!”

믿을 수 없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뒤로 넘어갔다.

두 명을 가볍게 처리한 준은 이번에는 점점 접근해오는 오크 무리에게 화살을 쏘았다.

퍼억!

취에에엑.

화살은 오크의 머리통을 뚫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오크가 쓰러지자 나머지 오크들이 흠칫 하면서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크의 뛰어난 후각에 인간의 피 냄새가 들어왔다.

오크 무리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피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당황한 은신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오크 무리와 충돌한 뒤였다.

몬스터들 중에서도 전투종족이라 불리는 오크들이었기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스의 말에 따라 기병들을 한곳에 모은 후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기병대장 맥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타난다는 적들은 나타나지 않는데다,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화살을 쏘는 준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맥칸은 옆에 있는 한스에게 말하였다.

“한스 님, 정말 적들이 있는 겁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저자는 왜 쓸데없이 허공에다 화살을 쏘는 겁니까?”

“이유가 있을 거요.”

“아니, 어두운 산을 향해 화살을 쏘는 데 이유가 있다고요?”

“그렇소. 산속에는 오크와 우리를 기습하려는 무리가 은신해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말입니다.”

맥칸과 한스가 대화를 나눌 때였다.

갑자기 준이 화살을 쏘다 말고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산의 입구까지 접근하더니 속사로 화살을 쏘았다. 능숙한 궁병이라고 해도 이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다.

준은 화살통 속에서 화살을 꺼내 줄에 걸고 쏘는 손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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