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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스스스스.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검강이 대거의 날에서 사라졌다.
대거를 다시 허리에 꽂은 준은 마법자루 속에서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특별주문 했던 것이 들어 있었다.
어깨에 착용할 수 있는 띠였는데, 검은색 물결무늬가 약간 들어간 가죽이었다. 단검 같은 것을 꽂아 넣을 수 있는 홈이 있었다. 띠를 어깨에 착용한 준은 이번도 역시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을 꺼내 들었다.
검은 가죽 밖으로 뭔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뽑자 에이형 부메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통적인 형태의 부메랑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며, 멀리 날아가는 것이 특징이었다. 날개가 두 개로 이루어져 있고, 공기의 저항이 적기 때문에 날개가 많은 부메랑보다는 던지는 기술이 필요했다. 은색의 강철로 만들어져 있으며, 날을 세웠기에 칼날이나 마찬가지였다.
약간 특이한 것은 보통의 부메랑에는 없는 작은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준은 부메랑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그는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생각했던 것대로 잘 만들어졌어.”
에이형 부메랑은 모두 다섯 개였다.
띠에 에이형 부메랑을 차례대로 꽂아 넣고는 이번에는 삼각형 부메랑을 손에 들었다.
일명 트라이얼 부메랑이라고도 하는데 날개가 세 개이며, 정삼각형 모양이었다. 에이형 부메랑보다는 비행 거리가 짧고, 던지면 쉽게 되돌아오는데 초보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부메랑이었다. 두 개였다. 이것도 띠에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꺼내든 것은 십자형 부메랑으로 일명 크로스 부메랑이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날개가 네 개이며 십자형 모양의 부메랑이라 비행거리가 짧지만 아주 쉽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작은 공간에서도 던질 수 있어서 유리한 부메랑이었다. 이것도 삼각형 부메랑처럼 두 개였다.
준은 잠시 십자형 부메랑을 만지작거리다가 띠에 꽂았다.
검은 가죽 띠에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부메랑의 날 일부가 드러난 모습은 멋졌다.
그는 회색 로브를 꺼내 차려 입고는 방을 나와 정원으로 향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한적한 정원의 가장자리를 택한 것이었다.
역시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조용했다.
“음… 여기에서 부메랑을 시험해보는 게 좋겠군.”
제일 먼저 꺼내 든 것은 십자형 부메랑이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라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휘리리릭.
회전하면서 날아간 십자형 부메랑은 허공을 선회하면서 되돌아왔다. 준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집었다.
“이번에는 두 개다.”
양 손가락에서 날아간 두 개의 십자형 부메랑은 허공을 날아가 선회하면서 되돌아왔다. 그는 그것을 그냥 받지 않고 보법을 밟으면서 낚아채더니 다시 날렸다.
이번에는 작은 나뭇잎을 하나 겨냥하고 던졌다.
십자형 부메랑은 준이 의도한 대로 잘 날아가 나뭇잎을 박살내버렸다.
그렇게 몇 번이나 연습해보더니 띠에 꽂아 넣었다.
“하하, 잘 만들어졌구나. 이번에는 삼각형 부메랑을 시험해봐야겠어.”
휘리리릭.
삼각형 부메랑을 하나 꺼내 날려보았다.
십자형 부메랑보다는 훨씬 멀리까지 날아가 허공에서 선회하면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하나 더 꺼내어 두 개를 동시에 날려보았다.
허공을 회전하면서 날아간 부메랑은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박살내고는 되돌아왔다.
삼각형 부메랑과 십자형 부메랑은 준이 의도한 대로 잘 날았기에, 그 성능에 만족했다.
“후후, 삼각형과 십자형 부메랑은 에이형 부메랑에 비하면 무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
휘리리릭.
에이형 부메랑이 준의 손가락을 떠나자 귀청을 찢어발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준은 에이형 부메랑을 집어 띠에 꽂으면서 경공술을 이용해 순식간에 그 자리를 피하였다.
조용하던 정원에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급하게 방으로 되돌아온 준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긴장했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하…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리가 커서 마음대로 시험도 못하겠어.”
아리안느 소공녀와 켈리온 자작이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 준도 참석하게 되었다.
아리안느 소공녀의 얼굴이 약간 굳어 있는 것으로 봐서 무언가 근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준은 물어보려고 하다가 옆에 앉아 있는 켈리온 자작을 보고는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준 님, 이곳 켈리온 성에는 얼마나 머무실 거예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케리안 대륙어도 익혀야 하니까요.”
“특별한 일이 없으시다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어요?”
“부탁이요? 무슨…….”
“아케비안 공작령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경호를 좀 맡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요?”
“예, 준 님의 실력이 뛰어나시니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으음… 이를 어쩐다?’
준은 아리안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곳 켈리온 성에서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려 했는데, 느닷없이 소공녀가 부탁을 해오자 고민에 빠진 것이다.
“준 님께서 호위만 해주신다면 충분한 사례와 마케리안 대륙 공용어를 가르칠 글 선생까지 붙여드릴게요.”
“음… 저에게 글 선생을요?”
“대륙공용어는 마법의 통역반지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지만 아직 잘 쓰지는 못할 테니까요. 어때요?”
“음…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알겠습니다. 제가 목적지까지 호위를 해드리겠습니다.”
“호호, 고마워요. 켈리온 자작님, 그것 좀 주시겠어요?”
“예, 소공녀님.”
켈리온 자작의 눈짓에 한쪽에 서 있던 하인들이 두 개의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켈리온 자작은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면서 설명했다.
“이것은 자네의 신분을 나타내는 기사의 신분증이고, 이것은 오이란트 왕국 어디든 갈 수 있는 통행증이네.”
“아,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소공녀님의 부탁을 받아 만든 것이네. 거기에 켈리온 성의 기사신분을 새겨놓았네. 그냥 평민으로 하려다가 아무래도 기사가 좋을 것 같아서 그리 하였네.”
“고맙습니다, 켈리온 자작님.”
“허허허, 소공녀님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네.”
켈리온 자작이 두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골드화가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이건?”
“이건 자네가 소공녀님의 의뢰를 받아준 데 대한 의뢰비라 생각하게. 일만 골드라네.”
“이…이건 너무 많습니다.”
“물론 의뢰비라고 한다면 많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소공녀님의 생명을 구해준 데 대한 사례금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주게.”
“음… 알겠습니다.”
준이 순순히 켈리온 자작의 말에 수긍하자 아리안느의 얼굴도 밝아졌다.
“소공녀님, 언제 이곳을 떠날 것입니까?”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다가 내일 떠날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숙소에 놓아둔 물건도 가져와야 하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성을 나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예,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아…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의뢰비도 받았지 않습니까?”
마차를 타고 켈리온 성을 나온 준은 그린 울프에 먼저 들러 방에 놓아두었던 짐을 찾았다. 그런 후 매직 스테프점에 들러 마법주머니를 구입하였다. 크기가 작은 데 비해 짐수레 두 대 분량을 집어넣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물건이었다.
곡물상점에 들러 밀가루를 충분하게 구입하였고, 또한 과일가게에 들러 각종 과일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 게다가 고기 가게에 들러 각종 고기류와 육포도 구입했다.
이렇듯 혼자서 세 달 정도를 먹을 분량을 구입했더니 어느새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어 있었다.
준은 즉시 마차를 타고 켈리온 성으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켈리온 성의 광장에는 소공녀 아리안느가 타고 갈 마차와 짐을 실은 수레 세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으로 남자 노예 10명과 하녀 3명, 기병 50명이 대기해 있었다.
아리안느와 베누아가 모습을 보였다.
아리안느 소공녀는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여행자들의 편안한 복장인 은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겉은 풍성한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는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아리안느 소공녀의 미모는 뛰어났다.
그녀들의 뒤를 기사 한스와 준이 따랐다.
그들과 10m 정도 거리를 두고 켈리온 자작과 켈리온 2세, 30대 후반의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준에게 다가온 그들은 서로 눈인사를 나누었다.
“인사 나누게. 이 사람이 자네의 글 선생이네.”
“그렇습니까? 준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준 님의 글 선생을 맡게 된 네디스 폰 쉐인이라 합니다.”
김준과 글 선생 네디스 폰 쉐인이 인사를 나눌 동안 켈리온 자작도 아리안느에게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는데, 귀족이라서 그런지 소공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소공녀님, 공작 각하의 생일에 뵙겠습니다.”
“예. 켈리온 자작님, 고마웠습니다. 그럼.”
아리안느와 베누아가 들어가자 한스를 비롯해 준, 글 선생 쉐인까지 마차에 올랐다.
“출발!”
기병들의 대장인 맥칸이 외치자 마차와 기병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짐수레에는 노예들과 하녀들이 타고 뒤따라왔다.
켈리온 자작의 영주성을 벗어난 일행은 곧 외성에 도착하였고, 성문을 바로 통과해 아케비안 공작령이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40일 정도 걸리는 제법 먼 곳이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자는 언덕의 나무 위에 서 있었는데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크크크,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군. 곧 그 물건은 내 차지가 될 것이다.”
스스스슷.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던 그자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덜컹덜컹.
땅이 고르지 못해서 마차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지난 이틀 동안은 길이 제법 잘 닦여져 있는 평지였기에 아무런 사고 없이 순조롭게 이동을 하였지만, 3일째로 접어들자 길이 심하게 나빠졌다. 켈리온 자작령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갔으며, 전방에는 산이 나타났다.
선두에서 말을 타고 나아가던 기병들의 대장인 맥칸이 말을 돌려 마차로 다가와 말하였다.
“소공녀님, 곧 날이 저물 시간이니 산을 통과하지 말고 야영을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야영할 것이니 서둘러라!”
맥칸의 말에 기병들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계곡의 적당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리 험한 산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산의 입구에서 야영을 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무리해서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밤에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는다는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천막을 치고, 하녀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50명이나 되는 기병들과 소공녀 일행, 10명이나 되는 노예들과 자신들까지 먹으려면 제법 많은 양을 준비하여야 했다. 그렇기에 음식을 만드는 일에 손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은 10명씩 조를 이루어 산의 초입에서 흩어져 땔감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가져온 장작을 쌓아 모닥불을 피웠다. 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얼마 후 연기가 줄어들었다.
준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 물을 끓였다. 그리고 야영 첫날에 만들어두었던 천연비누를 꺼내보았다. 앞으로 쓰려면 더 만들어두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을 끓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불을 지피고 남은 재를 끌어 모아서 물에 우려내었다. 이것은 양잿물이라고도 하고, 가성소다라고도 한다.
두 번째 준비한 것은 고기를 굽자 나온 폐기름이었다. 이것은 찌꺼기를 잘 걸러 모아둔 것이다. 이 둘을 한곳에 부은 후 잘 저었다.
30분 정도 젓자 걸쭉한 액체가 되었다.
여기에다가 주위에서 구해온 향기로운 허브 즙을 넣고 잘 저었다. 그리고 천연비누의 사각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하나 잘라 그 속을 잘 파내 직사각형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걸쭉한 액체를 그 속에다가 부어 그늘진 곳에서 놓아두었다.
날씨가 건조해서인지 비누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말랐다.
준이 만든 천연비누는 회색도 검정색도 아닌 두 가지 색이 섞인 칙칙한 색이었다.
‘음…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대로 해보았는데, 실패인가?’
허브 식물의 즙을 듬뿍 넣어서인지 향기는 그런대로 좋았다.
“그나마 향기는 좋군. 이젠 직접 사용해보는 일만 남았어.”
준은 길쭉한 직사각형의 틀에서 천연비누를 떼어내어 대거를 이용해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렇게 해서 천연비누가 10개나 만들어졌다.
마법주머니 속에서 천연비누를 꺼내어 손을 씻어보았다.
역시나 생각했던 쓸 만했다. 더럽던 손이 아주 잘 씻겼기 때문이다.
“됐어, 성공이야.”
얼굴도 씻어 보았는데 뽀송한 게 좋았다.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았기에 준은 아예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비누로 온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왔다.
천연비누에 만족해하며 마차로 돌아왔더니 아리안느는 놀란 눈으로 준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