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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휘이이이.
크리노스가 사라진 곳에 흙먼지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와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죽은 수하들만 쓰러져 있었기에 이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았다.
다가닥 다가닥.
준과 아리안느 일행은 천천히 말을 타고 켈리온 성으로 이동 중었다.
아리안느는 준의 허리에 찬 두 자루의 대거와 롱소드 두 자루, 등에 메어둔 바스타드소드를 쳐다보고 말했다.
“김준 님, 그렇게 검을 많이 차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가질 수 있을 때 많이 가져야죠. 몇 개 가져갔다고 그자들이 화내지는 않겠죠?”
“호호… 아마도 그럴 거예요.”
“나만 이렇게 많은 이득을 본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하군요. 하하.”
“당연히 그 정도는 수고비로 챙기셔야죠, 김준 님.”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준이와 아리안느 일행은 여유롭게 켈리온 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3km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지만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외곽을 돌아서 나아갔다.
그렇게 준이와 아리안느는 세 곳의 마을을 더 지나서야 켈리온 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달하였다.
“우와아, 멋지다!”
“김준 님은 켈리온 성을 처음 보시는 거지요?”
“예, 처음입니다. 아, 그리고… 불편하실 테니 성은 빼고 이름만 부르셔도 됩니다.”
“예, 준 님.”
아리안느와 기사 한스는 켈리온 성을 여러 번 방문하였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도시를 보게 된 준의 마음은 설레었다.
15m나 되는 우뚝 솟은 성벽이 평지위에 축성되어 있었는데 수 km나 이어져 있었다. 성벽 안에는 통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집들이 2백여 가구씩 구역을 이루고 있다. 헤아려보니 모두 10곳이었다. 길 양쪽에는 벽돌로 된 2층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리와 개울도 보이고 우리를 쳐 소나 돼지, 닭 등 가축을 키우는 곳도 보였다.
그런 곳을 지나면 200m 정도 되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을 빙 둘러 성을 쌓아놓았다.
그 성벽 안에는 좀 더 고급스러운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있었으며, 정상에는 중세 유럽의 성과 비슷하게 생긴 성이 하나 있었다.
이 성이 바로 켈리온 자작의 성이었다.
켈리온 자작령은 오이란트 왕국의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켈리온 성을 벗어나서도 사방으로 20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다. 영지민은 약 3만 명이며, 성 밖의 곳곳에 유민들이 천막을 치고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약 만 명 정도 되었다.
기병 6백에 보병 3천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각 마을에도 50명의 자경대를 갖추고 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도시를 발견한 준은 이곳을 알아보기 위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심안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이전의 마을에서는 농부들만 보았기에 정보를 취득하기에는 미흡했었다.
그러나 영주가 살고 있는 성을 보니 기대가 많이 되었다.
대로의 가장자리에는 노점상들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제대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도 보였다. 농부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마차도 간간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성문 앞에서는 경비병들이 외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말을 타고 접근해오고 있는 아리안느를 보고는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랐다.
인간이 아닌 듯 극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아리안느였기에 멍한 표정들이었다.
“크흐흠…….”
한스의 헛기침에 경비병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체인아머를 입은 기사 한스를 보고는 찔끔거렸다. 눈빛에 살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행증을 보이시오.”
한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이놈 감히… 나를 모르느냐?”
“모르겠소이다. 나는 켈리온 자작님의 외성 경비 7조장인 페론이라 하는데 누구요?”
“이거 원… 나는 아케비안 공작 각하의 기사 한스라 한다.”
“뭣? 아케비안 공작 각하의 기사?”
“그렇다.”
그때 페론의 곁으로 40대 초반의 고참 보병이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페론은 고개를 간간이 끄덕이더니 한스를 곁눈질하였다.
“크흐흠…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뒤에 계시는 분들은?”
“여기계신 분은 공작 각하의 영애이신 아리안느 소공녀이시다. 이제 자작님을 뵈었으면 하는데?”
“좋습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호위병들은 왜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세 번이나 습격을 받아서 일부의 호위병들은 지원병력을 요청하러 떠났다. 나머지 호위병들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모두 죽고, 남은 사람은 나와 저 검은 머리카락의 김준 호위병이 전부다.”
“으음… 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호위병은 혹시?”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김준 호위병은 뮤란 대륙인이다.”
“그…그렇군요. 어쩐지 이방인 같다고 생각했는데…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켈리온 성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20명의 영지병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페론.”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스가 앞장서자 아리안느와 베누아가 뒤따랐고, 마지막으로 준이 외성 안으로 들어갔다.
외성을 통과하자 한스가 준에게 다가왔다.
“준 님, 저기 언덕위에 보이는 성이 켈리온 성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름다운 성이군요.”
“소공녀님과 저희들을 구해주시고 이렇게 안전하게 켈리온 자작의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준 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하, 너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기에 도와준 것뿐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으니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한스는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준에게 내밀었다.
“음… 이런 것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켈리온 성에서 필요한 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리안느 님의 통역반지도 받았는데 이렇게 돈까지 받아도 되겠습니까?”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준 님, 언제든 기회가 되시면 아케비안 공작령에 방문해주십시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그러겠습니다.”
아케비안 공작의 기사인 한스는 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말을 몰아 켈리온 자작의 성을 향해 나아갔다.
준은 아름다운 아리안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윽고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뒤돌아 거리로 사라졌다.
켈리온 자작령은 50년 전 국왕으로 부터 영지를 하사받기 전에는 오이란트 왕국의 낙후된 영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진력이 강한 켈리온 자작의 명으로 철광산을 하나 개발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였다.
영지가 발전하게 되자 다른 광산도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에메랄드 보석광산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되어 영지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영지 내에 광산이 무려 10개나 되었다.
켈리온 자작이 광산개발로 거부가 된 것의 이면에는 드워프 장인이 있었다.
왕국에서 10대 부자에 속하는 켈리온 자작은 후작급에 맞먹는 부유한 영지를 갖게 되었다.
켈리온 자작령은 10년 전부터 켈리온 2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준이 말을 타고 이동한 곳은 숙박업소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은 벽에 걸려 있는 간판들 중에서 녹색의 늑대 얼굴모양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숙박업소 앞에서 멈추었다.
녹색 늑대의 그림 밑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서로 교차하며 그려져 있었기에 글을 몰라도 숙박업소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준을 지켜보던 소년이 재빨리 뛰어와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린 울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식사와 빈방이 필요한데, 있느냐?”
“예. 깨끗한 방과 맛있는 식사를 저렴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알았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가도록 하지. 말에게도 먹이를 부탁한다.”
“예. 손님.”
소년에게 고삐를 건네준 준은 그린 울프의 정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웅성웅성.
30여 명의 손님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테이블에 술통을 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동시에 준을 쳐다보았다.
준의 외모가 이들과는 다르게 이국적이었기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190cm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 일평생이 지나도 한 번 볼까 말까한 검은 머리카락, 등에는 바스타드소드를 메고, 허리에는 롱소드 두 자루와 대거 두 자루를 꽂은 모습이었다.
이국적이지만 잘생긴 얼굴에 강한 기운을 몸에서 뿜어내는 자였으니 이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당연했다.
준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자 모두 찔끔거리면서 시선을 피하였다. 그만큼 준이 내뿜는 기운이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바에 서 있는 배불뚝이 주인에게 걸어간 준은 저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식사와 1인실 방이 필요한데, 있소?”
“얼마나 묵으실 겁니까?”
“음… 일단 이틀만 머물 것이오.”
“식사는 아침과 저녁, 이렇게 2번 제공되며, 따뜻한 물로 하루에 1번 씻을 수 있습니다. 말의 먹이까지 1실버를 추가하면 21실버인데, 선불입니다.”
“식사는 어떻게 나오는 거요?”
“특제소스로 버무린 5가지의 채소와 치즈, 빵, 스테이크. 후식으로는 과일이 나옵니다.”
“음… 그 정도면 괜찮군. 정오에도 한 끼 더 주문하면 얼마요?”
“이틀이면 2번의 식사가 더 제공되는 것이니 2실버만 더 주십시오.”
“그럼 모두 23실버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여기 있소.”
준은 돈주머니 속에서 23실버를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마구간에 준의 말을 매어두고 안으로 들어온 소년에게 주인이 말하였다.
“로이, 손님을 203호실로 모시거라.”
“알았어요. 손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이의 뒤를 따라갔다.
그제야 사람들도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준은 로이를 따라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긴 통로를 걸어 203호실 앞에서 멈추었다.
“손님께서 묵으실 203호실입니다.”
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방 안이 금방 환해졌다.
안에는 여행자들이 옷을 넣어둘 수 있는 옷장이 하나 있고, 테이블 하나와 깨끗한 흰색 시트가 깔려 있는 싱글침대, 나무 창문이 하나 있는 단순한 구조의 방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고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몸을 씻을 곳은?”
소년은 방 한쪽의 커튼이 쳐져 있는 곳을 열어젖힌 후 말하였다.
“몸을 씻을 수 있도록 이렇게 목간통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몸을 씻을 동안에 식사를 가져왔으면 하는데?”
“예. 즉시 가져오겠습니다.”
로이가 방을 나가더니 곧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근육질의 노예 5명이 들어왔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통이 들려 있었다.
촤아아악.
목간통에 물이 가득 채워졌고, 하녀가 식사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문을 닫고 모두 나가자 준은 먼저 식사부터 했다.
식사는 제법 훌륭했다.
옷을 벗고 목간통에 들어간 준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는 비누도 없나? 참, 이 세계는 중세나 그 이하의 낙후된 시대라 생활필수품이 없었지?”
준은 어쩔 수 없이 물속에서 몸을 불려 문지르는 것으로 목욕을 끝마쳤다.
“으음, 생각보다 상쾌한 목욕은 되지 못했어.”
준은 커튼을 젖히고 나와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남겨두었던 노란색, 붉은색, 황금색의 세 가지 과일 중 노란색 과일을 집어 들었다.
“꼭 참외처럼 생겼네? 맛은 어떨까?”
후루룩, 쩝쩝.
“으음…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야. 꼭 귤에다가 바나나를 섞은 것 같은 맛이군. 이번에는 붉은색 과일을 먹어볼까?”
사과와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껍질이 두꺼워 깎아먹어야 하는 과일이었다.
스윽, 슥슥.
껍질을 깎자 속은 황금색이었는데, 맛은 뭐랄까… 망고와 비슷했다.
“흠… 이것도 생각보다 달콤하고 맛있군. 나머지 과일도 기대되는데?”
황금색 과일은 길쭉한 것이 바나나 같이 생겼는데 껍질을 벗기자 속은 녹색과 붉은색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었고 그 맛은 레몬과 수박이 섞인 듯한 묘한 과일이었다.
“이 과일들, 생각보다 맛도 있고 모양도 특이하군. 그런데 이름이 뭘까? 궁금하네.”
준은 목욕 후 맛있는 요리도 먹고 후식으로 이름 모를 과일까지 먹어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나 준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문을 잠갔다. 또한 롱소드를 침대 주위에 놓아두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으음… 이제 좀 안심이 되는군. 언제나 조심하는 게 제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