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 / 0284 ----------------------------------------------
제1권 켈리온 성
믿을 수 없었는지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마차 속에서 발이 튀어 나와 추격자의 가슴을 발로 밀어버리더니 롱소드의 날을 뽑았다.
추격자는 피를 흘리면서 뒤로 벌렁 넘어갔다.
마차 속에서 30대 후반의 남자가 모습을 보였는데, 체인아머를 착용하고 있는 기사였다.
“감히 공녀님을 노리다니!”
“흐흐… 공녀가 별건가? 지금은 우리의 포로일 뿐이다.”
“닥쳐라! 이놈들… 나, 한스가 살아 있는 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흐흐… 그렇다면 죽여줘야겠군. 저자를 죽여라!”
마차를 포위한 추격자들이 공녀의 기사 한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채채챙.
검술실력이 뛰어난 한스는 추격자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연신 공격하였다.
현란한 한스의 검술실력에 추격자들이 작은 상처를 입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악!”
그때, 거리가 조금 떨어져서 싸우던 마지막 호위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살아남은 추격자들까지 모두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한스가 생각하기에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마차 속에는 공녀와 하녀 한 명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마저 추격자들 손에 쓰러진다면 사실상 이들을 막을 자는 전무한 상태가 된다.
추격자들은 몇 명이 쓰러졌지만 60명이 넘었다.
“크으읏… 으음.”
순간적으로 집중하지 못한 한스는 추격자의 검에 어깨와 옆구리를 살짝 베이면서 뒷걸음질 쳤다. 추격자들이 합공으로 공격하자 점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추격자의 검날이 그의 목에 겨누어지자 상황은 추격자들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추격자들은 대장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마차 가까이 접근했다. 그자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아래의 뺨에 사선으로 칼자국이 나 있어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빛에도 살기가 담겨 있는 것으로 봐서 사람을 많이 죽여 본 자 같았다.
그는 추격자의 대장인 크리노스라는 자였다.
“공녀님, 한스 경까지 우리에게 잡혔는데 이제 마차에서 나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았어요. 한스 경을 죽이지는 마세요.”
마차 속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0대 후반의 통통한 하녀가 먼저 마차 속에서 나오고, 그 뒤를 이어 흰 드레스를 입은 엄청난 미녀가 나왔다.
170cm 정도의 키에 가슴은 크고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기에 흰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렸다. 그것만 해도 매력적인데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셨다.
“공녀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흥, 왜 날 공격한 건가요?”
“공녀님을 모시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누군가요?”
“그건 공녀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준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엄청나게 눈부신 미녀가 곤경에 처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서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타악.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튀어 오른 준은 공중제비를 선보이면서 누렇게 익어가는 밀 위를 밟고 달렸다. 처음으로 초상비의 경공을 시전한 것이다.
촤촤촤촤.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와 함께 준이 빠르게 마차 쪽으로 접근하자, 추격자들은 그제야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파악.
준은 밀 위를 도약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공중제비를 선보이면서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신기에 가까운 동작에 추격자들의 눈이 커졌다. 이런 것은 듣도 보도 못한 동작이었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대장인 크리노스는 얼굴이 굳어지면서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이에 말을 타고 있던 두 명의 추격자들이 말을 몰아 앞으로 튀어 나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양쪽에서 휘두르는 검이라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준은 상체를 약간 흔드는 것으로 두 명의 공격을 간단하게 피하였다.
“어엇, 피했어?”
추격자 두 명이 다시 선회할 때 준은 휘돌아차기를 시전하였다. 6~7m나 떨어져 있었기에 전혀 발이 닫지 않는 거리였다.
“크억!”
“아아악!”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두 명의 추격자가 뒤로 튕기듯 날아가면서 비명을 지르다가 떨어져버린 것이다.
크리노스의 손짓에 이번에는 5명이 달려들었다.
준은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이면서 양손바닥을 펼쳐 내뻗었다.
퍼퍼퍼퍼퍽.
“우왁!”
“커억!”
“아아악!”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면서 추격자 5명이 말 등에서 뒤로 튕기듯 날아가 떨어졌다.
마치 장난치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무서웠다.
준은 공격해오는 적 7명을 가볍게 쓰러뜨린 후 이번에는 먼저 추격자들을 공격하였다.
쉬이잇, 퍼퍼퍽.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람 같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주먹과 발로 공격을 하였다. 이에 추격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1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흐르자, 말에 그대로 타고 있는 자는 대장인 크리노스를 비롯해 6명이 전부였다. 나머지 60여 명은 모두 땅에 쓰러져 기절한 상태였다.
“으으… 네놈은 누구냐?”
두려운 나머지 크리노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준은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눈치로 자신의 정체를 묻는 다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소공녀와 하녀, 한스도 놀라 눈이 커졌다.
크리노스의 눈짓을 받은 추격자 5명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면서 준을 공격하였지만, 준은 가볍게 모두 피하였다.
기회를 보고 있던 크리노스는 석궁을 준에게 겨누더니 발사하였다. 약 10m의 짧은 거리였기에 석궁에서 발사된 퀘럴을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게 사람들의 공통된 상식이었다.
준은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퀘럴을 가볍게 피하였고, 오히려 지나치던 퀘럴을 손으로 붙잡는 신기까지 보여주었다.
“허억, 마…말도 안 돼!”
크리노스는 너무 놀라 입이 쩌억 벌어진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나가버렸다.
준이 퀘럴을 손가락으로 휘돌리면서 튕기자 공격해오던 추격자의 명치에 격중되었다.
“끄으으!”
그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고꾸라졌다.
퍼퍽, 빠악.
준의 주먹과 발차기에 얻어맞은 나머지 추격자들도 기절하면서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추격자들의 대장인 크리노스와 기사 한스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자가 전부였다.
“음… 가까이 오지 마라. 오면 한스를 죽이겠다.”
크리노스가 소리쳤지만 준이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듯 준의 손바닥이 가볍게 흔들렸다.
퍼억!
한스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던 추격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준의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크으으으!”
이미 내부가 박살나버린 그는 칼을 떨어뜨리면서 고꾸라졌다.
덜덜덜.
공포에 젖은 크리노스는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준이 가볍게 손바닥을 흔들자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쉐에에엑.
도망치던 크리노스는 제법 거리를 벌려놓았기에 약간 안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라면서 뒤돌아보았다.
퍼억!
“크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놀란 말은 계속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크리노스는 부르르 떨다가 이내 멈추었다. 그의 등에는 손바닥이 찍혀 있었다.
소공녀와 하녀, 한스는 준이 검술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손과 발을 이용해 60명이 넘는 추격자들을 혼자서 처리한 것을 직접 보고서도 믿지 못하였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소공녀인 아리안느가 준이에게 물어보았지만 준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고맙다고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말이지.’
“이봐요, 대답해 봐요.”
그녀의 재촉에도 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기사 한스가 말하였다.
“소공녀님, 이자는 우리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당신의 정체가 뭐예요?”
하지만 준은 전혀 못 알아듣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리안느는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면서 부끄러워졌다.
‘어머… 내가 왜 이러지? 처음 보는 남자인데…….’
소공녀 아리안느는 자신이 끼고 있던 두개의 반지 중 한 개를 빼더니 준에게 내밀었다.
준은 아리안느를 쳐다보더니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조금 도와준 것 가지고 이런 대가를 받을 순 없지.’
아리안느도 준이 자신이 건네는 반지를 사양하는 것 같아 보이자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행동을 번갈아 보여주고는 다시 준에게 내밀었다.
‘으응? 이 반지를 받아 손에 끼우라는 건가?’
자꾸만 권하는 아리안느 때문에 준은 어쩔 수 없이 반지를 받아들고 손가락에 끼웠다.
“이것 봐요, 내말 알아들어요?”
“어엇… 말을 알아들을 수 있네?”
“이봐요?”
“아… 네, 아름다운 아가씨.”
“이제야 내말을 알아듣는군요.”
“이 반지 때문입니까?”
“그래요. 그 반지는 통역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의 반지예요.”
“정말 신기한 물건이군요.”
“당신 같은 외모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는데, 어디에서 왔어요?”
“그게… 저 멀리에서 왔습니다.”
준은 그들 뒤에 있는 거대한 숲을 가리켰다.
그제야 아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강했던 거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흔하지 않은 검은 머리에, 몬스터들의 천국이라는 고요의 숲을 건너왔으니 강하지 않겠어요?”
“저 숲이 고요의 숲입니까?”
“그…그럼 그것도 몰랐어요?”
“예. 이곳은 처음이라…….”
“그렇군요.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돼요?”
“김준이라고 합니다.”
“김쭌?”
“쭌이 아니고 준입니다, 아가씨.”
“주…준!”
“그래요, 준.”
“성은 없어요?”
“성은 김이고 이름은 준이에요.”
“아… 그렇군요. 혹시 뮤란 대륙인이에요?”
“뮤란 대륙?”
“예. 그렇지 않고서는 이곳 마케리안 대륙에서 당신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구경하기 힘들거든요.”
“아… 그럼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가 그만큼 구경하기 힘들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뮤란 대륙에서는 제법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곳 마케리안 대륙에서는 거의 구경하기 힘들죠. 특히 대륙의 남부 왕국인 이곳 오이란트 왕국에서는 몇 십 년 만에 처음인 걸요. 특히 왕국의 남부 켈리온 자작령이니 더 말해 뭐하겠어요?”
“으음… 그렇군요.”
“켈리온 자작령에는 어떻게?”
“아… 이곳이 켈리온 자작령이었군요. 저는 숲에서 길을 잃어 마을을 찾던 중 이 길을 발견하고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잘되었네요. 우리들과 마을까지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뭐… 안 될 게 있나요? 오히려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과 같이 동행하게 되어서 저로서는 무척 영광입니다. 참,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이름도 알려드리지 않았네요. 저는 로리 아케비안 드 아리안느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아리안느라고 부르세요.”
“예. 그러죠, 아리안느.”
“참, 제 일행을 소개해줄게요. 이쪽은 저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드리노 폰 한스이구요. 이쪽은 저와 항상 같이 다니는 베누아.”
“반갑습니다. 저는 준이라고 합니다.”
“소공녀님과 저희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닙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는 서로 도와야죠.”
“소공녀님, 마부가 죽었으니 말을 타고 가셔야겠습니다.”
“알았어요, 한스 경.”
아리안느는 마차 속에 있는 물건들을 마법의 자루에 집어넣었다. 옆에서 기사 한스와 하녀인 베누아가 도와주었다.
그동안 준은 쓰러져 있는 추격자들의 품속을 뒤져보았지만 정체가 들어날 정도의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몇 명에게서 골드와 실버, 실링화가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발견하였다.
눈치로 이것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라는 걸 알게 된 준은 일단 그것을 챙겨 품속에 넣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쓰러져 있는 자들에게서 30cm 정도 되는 대거를 두 개나 수거해 허리에 찼다.
오크에게서 입수한 검집도 없는 롱소드와 바스타드소드는 그냥 버리고 추격자들에게서 두 자루의 롱소드를 입수해서 허리에 찬 것이다.
또한 한 자루의 바스타드소드는 등에 짊어졌다.
“후후, 이놈들 때문에 나만 횡재했군.”
출발 준비가 끝나고 아리안느와 한스, 베누아가 말 등에 올랐다. 하지만 말을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준은 어쩔 수 없이 걸어가기로 했다.
“김준 님은 말을 한 번도 타보지 않았어요?”
“예, 그렇습니다. 아리안느 님.”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스가 준이에게 다가와 말 타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그제야 준은 말 등에 올라타 천천히 말고삐를 잡고 타보았다. 무술을 익힌 준이라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다.
다가닥 다가닥.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이동을 시작하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말 타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기에 준은 두 시간 만에 제법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준이와 아리안느 일행이 떠나고 난 후 기절했던 추격자들의 대장인 크리노스가 깨어났다.
“크으으… 가죽갑옷 속에 이것을 넣지 않았으면 죽었을 테지.”
크리노스가 가죽갑옷을 살짝 벌리자 속에는 가슴과 등에 고리로 이어진 철판이 보였다.
비틀거리면서도 힘겹게 일어난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던 말에게 손짓을 했다. 영리한 말은 크리노스에게로 다가왔고, 그는 말 등에 올라타고 중얼거렸다.
“으음… 어디에서 나타난 놈이기에 60명이나 되는 수하들을… 정말 무서운 놈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