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 / 0284 ----------------------------------------------
제1권 켈리온 성
쉬쉬쉬쉭.
바람 소리를 일으키면서 휘두르는 검술은 멋있었지만 약간 민망했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검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폭포에서 시전하는 것이라 주변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츄웅.
롱소드의 검날 끝에서 푸르스름한 강기의 덩어리가 생기더니 그것이 탄환처럼 쏘아졌다.
파앙!
강기가 폭포 바로 아래에 있는 큰 웅덩이에 날아가 폭발하였다. 폭탄이라도 터진 듯 거센 물보라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수면위로 기절한 물고기가 몇 마리 둥둥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부수입을 올리게 된 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 구워 먹으면 맛있겠어.”
기절한 물고기를 수거한 준은 일단 한쪽에다가 잘 놓아두고는 다시 수련을 계속하였다.
지글지글.
물고기의 비늘과 내장을 제거한 뒤 칼집을 넣고는 나뭇가지에 잘 끼워서 구웠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물고기는 담백하면서도 고소해 먹을 만했다.
“쩝쩝… 고소해서 먹을 만하지만 소금으로 간을 하지 못한 게 아쉽군.”
물고기 구이로 배를 채운 준은 폭포가에 앉아 다시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어두운 밤에 특별히 할 일이라곤 수련밖에 없었다.
대기 중에 풍부한 기를 흡수하는 게 즐거웠고,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천왕대심공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날이 밝자 준은 폭포에 들어가 목욕을 한 후 과일과 물고기를 구워 배를 채우고는 다시 출발하였다.
경공술을 발휘해 나아가면서 잠깐 휴식도 취하고 주변에서 과일을 따서 갈증도 해소했다.
그렇게 준은 3일을 더 숲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숲의 가장자리에 도달하였다.
동굴 속을 벗어난 지 꼭 9일만의 일이었다.
숲이 끝나는 곳의 나무 위에서 준은 전방을 바라보았다.
온통 평지로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밀밭에서 일하는 농부들 10여 명이 보였는데 모두 서양인들이었다. 그들은 낡은 옷을 입었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녀들로 머리카락의 색깔이 다양했다. 금발이 있는가하면 갈색 머리카락도 있었고, 녹색과 보라색, 파란색과 빨간색의 머리카락도 있었다.
인간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기에 처음에는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잠시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준은 영어를 비롯해 불어와 독일어까지 조금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전혀 생소한 언어였으며, 도무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으음… 모습은 분명 서양인들인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언어를 쓰는군.”
한참을 나무 위에 숨어서 그들의 말을 들어 보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행동도 함께 하였기에 그것으로 약간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가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길가에 세워놓았던 수레로 모여들었다.
다가닥 다가닥.
엉덩이에 채찍질을 하자 소는 깜짝 놀라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준은 수레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심안의 능력이 있으니 수백 미터의 거리를 두면서 뒤따라갔다.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하던 수레는 이윽고 마을에 도착하였다.
준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엎드려 마을을 관찰하였다.
마을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는데 집이 50여 채 정도 되었다.
대부분 통나무집이었으며, 몇 개의 집은 돌을 쌓아 지은 것도 있었다.
“음… 중세의 시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좀 더 살펴봐야겠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통나무집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츠츠츠츠.
준은 심안을 일으켜 통나무집의 내부를 은밀하게 살펴보았다.
나무 식탁과 의자, 스프를 끓일 수 있는 쇠 냄비 큰 것과 중간 것 각각 하나, 나무로 만든 그릇이 부엌살림의 전부였다. 그리고 방 안에는 나무로 된 침대와 이불이 전부였다.
너무나 살림이 없고 단조로워서 다른 집도 확인해보았는데 거의 유사했다.
농부들의 집은 대부분 이런 모양이었다.
“음… 이 마을은 고려시대보다 더 낙후된 사회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농부들이 식사하는 집을 살펴보았다.
40대 초반의 남자와 30대 후반의 여자, 10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와 6세 정도의 여자 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나무식탁 위에는 스프를 끓인 냄비 하나와 갓 구운 길쭉한 빵 두 개, 양상추와 당근이 전부였다.
남자가 나무 그릇에 스프를 덜고 빵을 여러 개로 잘라 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빵을 들고 스프를 찍어 먹다가 양상추와 당근도 같이 먹었다.
어른들도 그렇게 식사를 했는데 특이한 것은 숟가락이나 젓가락, 그것도 아니면 포크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작은칼 하나가 유일했다. 대부분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으음… 이상한데? 이 집만 그런가? 다른 집은 어떤지 알아봐야겠군.”
다시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손도 대충 씻고 식사를 하였기에 매우 불결해 보였다.
“손으로 식사를 하려면 깨끗하게 씻고 먹어야 하는데 여긴 위생관념이 전혀 없는 사회인 것 같아.”
식사를 끝마친 집들은 얼마 후 유등을 끄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마을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원시사회를 보는 것 같아 허탈했다.
엎드려서 마을을 관찰하던 준은 언덕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약간 굽은 바위였는데 밑으로 들어가 앉아 있기 적당한 곳이었다.
바위 밑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준은 천왕대심공을 운용하였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자 어둠이 물러갔다.
마을의 집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났다.
준은 천왕대심공을 중지하고 심안으로 집안을 살펴보았다.
어젯밤처럼 단조로운 식사를 마친 후 부부는 수레를 타고 밀밭으로 일하러 나갔으며, 집에 남은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 이웃의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여자 아이들은 한쪽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으며, 남자 아이들은 목검으로 전쟁놀이를 하였다.
낙후된 마을이었지만 평화롭고 순박하게만 느껴졌다.
마을에서 출발한 수레를 쳐다보던 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수레를 미행하였다.
농부들은 밀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점심은 먹지 않았다.
해가 질 때가 가까워지자 농부들은 수레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왔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에는 농부들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마을에 남은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부모가 없는 시간동안 아이들은 뛰어 노는 게 전부였다.
일부 아이들은 집 밖에 우리를 만들어 키우는 닭에게 모이를 주기도 했지만 공부를 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으음… 부모와 아이들 모두 아침과 저녁, 이렇게 두 끼를 먹는군. 또한 낙후된 사회라서 그런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어. 집에 책 한 권 없으니 어쩌면 당연하겠지.”
준은 아직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일상을 살펴보고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는 알아낼 것이 없어. 다른 곳을 가봐야겠어.”
다음날 아침.
준은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서 먹고는 경공술을 발휘해 길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였다.
약 2시간 정도 이동하자 다른 마을이 보였다.
통나무집이 83채였고, 돌로 쌓은 집도 10채나 되었다.
“이 마을은 이전의 마을보단 좀 더 크군.”
준은 마을이 잘 보이는 곳에 숨어서 마을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도 규모만 좀 더 컸을 뿐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으음, 모든 마을이 이렇단 말인가… 어쩌지?”
그는 실망감을 안고 다른 곳을 살펴보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쿠르르르.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마차 1대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6명의 기병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그 마차를 추격해오는 일단의 무리들.
가죽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는데 모두 70명이나 되었다.
수백 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말을 탄 무리들의 추격하는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더니 이윽고 30m 정도까지 접근하자 보우를 겨누었다.
슈슈슈슝.
몇 발의 화살이 날아오자, 마차를 호위하던 기병들은 팔에 부착되어 있던 원형 방패로 화살을 막았다.
티티팅, 퍽!
대부분 화살은 방패에 가로막혀 튕겼지만 한 발이 호위병의 등에 맞았다.
“크으윽!”
비명을 지르면서 호위병 한 명이 비틀거리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허엇, 패터슨!”
“패터슨이 당했다! 모두 조심해!”
“크아아악!”
말에서 떨어진 패터슨이라는 자는 추격자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즉사했다.
화살 공격에 재미를 본 추격자들은 또다시 화살 공격을 감행하였고, 호위병들은 당황했다. 등을 보이면서 도주하는 중이라 화살 공격에는 아주 취약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떨어지자 두 추격자들이 따라잡아 서로 충돌하였다.
채채챙, 파팍!
호위병들과 추격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싸웠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추격자들의 일부는 싸우지 않고 마차를 추격하였다.
마부 옆에 앉아 있던 호위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보우를 겨누어 추격자들에게 쏘았다.
“어엇, 조심해!”
“크아악!”
경고에도 불구하고 추격자 중 한 명이 가슴에 화살을 맞으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추격자들도 보우를 꺼내들고 쏘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았기에 잘 맞지 않았다. 오히려 호위병이 쏜 화살이 더 정확했다.
추격자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보우를 말에게 쏘았다.
이히히힝!
말의 등과 엉덩이 부분에 화살이 명중하자 말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네 마리의 말이 서로 뒤엉켰다. 이에 마차가 크게 휘청거렸고, 그것 때문에 호위병은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
다행이 마부는 떨어지지 않았기에 고삐를 잡아당겨 마차의 속도를 늦추었고, 결국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멈추었다.
추격자들은 넓게 원을 그리면서 마차를 포위했다.
퍼억!
추격자가 쏜 화살에 가슴을 맞은 마부는 상체가 기울어지면서 고꾸라졌다.
추격자들 중에서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마차 앞으로 다가오면서 말하였다.
“소공녀님, 이제 그만 마차에서 나오시죠?”
조장의 말에도 마차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음… 소공녀님을 마차에서 끌어내려라.”
말 등에서 내린 추격자 한 명이 마차로 접근하여 문을 잡아당겼다.
마차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바로 열렸다.
그때였다. 롱소드의 날이 같이 튀어나와 추격자의 가슴을 뚫고 등 뒤까지 튀어나왔다.
“끄으으…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