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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준을 바라보던 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오랜 세월을 이어온 천왕문에서 겨우 세 권의 책이 전부이니 실망한 게로구나?”
“예, 스승님. 약간 실망했습니다. 겨우 책 세 권뿐입니까?”
“이 세 권의 무경이 내려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말해주마. 천왕 조사님때에는 제대로 된 무경도 없었고, 오직 천왕 조사님의 가르침뿐이었단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분께서도 연로해지시자 일단 그분의 무예를 동물의 가죽에다가 기록해놓았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가죽이 매우 낡아서 자칫하면 새겨 놓은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기에 질 좋은 한지에 다시 옮겨 기록해놓았지.”
“아아, 2천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었으니 당연히 그런 조치가 있었겠어요?”
“보통 2백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질이 좋은 한지로 만든 책에다가 옮겨 보관해왔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천왕문에는 제법 많은 무경들이 있었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61대 문주이셨던 조휘라는 분께서는 이 세 권의 책들만 가지고 피난을 하시게 되었단다.”
“그럼 스승님, 임진왜란 이후에 내려온 것이 이 세 권이 전부이겠군요?”
“그렇단다. 그러나 이 세 권을 우습게보지 말거라. 이 세 권이 이천 년을 이어온 천왕문의 모든 것이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천왕문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 권의 무경이 전부라 생각하니까 좀 허탈했다.
“그럼 이 세 권의 무경에 대하여 알려줄 테니 잘 듣거라. 가장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이 천왕대심공이라는 심법이다.”
“천왕대심공?”
“천왕대심공은 호흡으로 기를 축적하는 심법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검술이 적힌 천왕검경과 잡술을 총망라한 백팔천왕경이다.”
‘천왕검경과 백팔천왕경이라…….’
천왕삼보라 명명한 세 권의 무경은 전반부는 쉽게 익힐 수 있지만 중반부에 들어가면 점점 그 속도가 떨어진다. 그런 후 마지막 후반부에 들어가면 진정한 상승무경의 깨달음이 없고서는 그 경지를 알 수가 없다.
오십 년을 수련한 한월도 이제 겨우 하단전의 중급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무경인지 알 수 있었다.
한월은 준에게 세 권의 낡은 무경을 내밀었다.
책에 관심이 많았던 준은 즉시 무경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천왕대심공과 천왕검경, 백팔천왕경이라 쓰여 있었다.
준은 세 권의 무경 중에서 먼저 천왕대심공이라 쓰여 있는 무경을 손에 들고 펼쳐보았다.
천왕대심공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를 축적하는 심법이 적힌 책이었지만 한 번 읽은 것만으로는 쉽게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천왕대심공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천왕검경을 집어 들었다.
천왕검경은 전사식, 중사식, 후사식으로 모두 12식으로 되어 있었다.
전사식은 간단한 초식들이고, 중사식부터는 제법 많은 설명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후사식에는 깨달음을 담아 펼치는 초식이기에 간단하게 쓰여 있었다.
‘음… 검술이라서 그런지 천왕대심공보다는 두껍지 않네?’
천왕검경도 내려놓고 이번에는 마지막 무경인 백팔천왕경을 집어 들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두꺼웠다.
백팔천왕경은 무림에서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병기와 암기들을 총망라한 책으로, 그저 특성을 서술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성이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인지 두꺼운 무경이었다.
백팔천왕경 상의 후반부에는 천왕문의 유일한 암기무공이 적혀 있었는데, ‘천왕십이류’ 라고 쓰여 있었다.
‘천왕십이류’ 라는 무공은 한월과 일현도 예전에 읽어 보았지만 하도 허황히 쓰여 있어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천왕십이류는 모두 12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비상식적인 문구들로 가득했다.
어쨌든 천왕십이류는 천왕대심공을 팔성으로 익힌 후 펼치게 되면 하늘도 놀랄 정도의 위력이 나타난다고 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세 권을 살펴본 준은 조금은 황당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문구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허풍이 심한 무경이라 치부했다.
“준아, 우선 이 세 권의 무경 중 심법이 적힌 천왕대심공을 알아야 수련에 들어갈 수 있으니 우선 이것을 외우도록해라.”
“예, 스승님.”
준은 천왕대심공을 다시 한 편 펼쳐 외우기 시작했다. 워낙 머리가 좋았기에 제대로 읽기 시작하자 바로 암기할 수 있었다.
천왕삼보를 다 외운 준은 스승인 한월의 명령으로 바로 천왕대심공의 수련에 들어갔다.
“준아,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집중하면서 설명을 듣거라.”
“예, 스승님.”
“우선 모든 심법의 기본은 숨쉬기에 있단다. 보통 사람들은 입으로 숨을 마시고 목에서 다시 내뿜지. 하지만 무예를 익힌 사람들은 배로 숨을 쉰단다. 짧게 숨을 들이 마시고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내뿜는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힘들 것이나 자꾸 반복하면 익숙해질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이렇게 들이마신 숨을 단전으로 보낸다. 무형의 기운을 의지만으로 단전에 보내기는 어렵지. 이런 노력들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단전에 따뜻한 기운이 생긴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기본이 된 것이지. 그럼 정식으로 천왕대심공의 수련에 들어갈 수 있단다.”
“예, 스승님.”
“그래. 그럼 우선 기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니 오늘부터 기를 느낄 때까지 반복적으로 호흡을 하도록 해라.”
“예.”
준은 두 눈을 감고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바르게 하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호흡을 하였다.
이것을 바라보던 한월과 일현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준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자 하는 배려였다.
그렇게 준은 첫날은 오전에 한 시간을 호흡하고, 다시 오후에 한 시간을 호흡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다시 두 시간을 호흡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날 새벽 4시부터 일어난 준은 호흡에 열중했다.
하루, 이틀…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준은 생명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생명줄인 천왕대심공에 정신을 집중하며 심법에 익숙해지고자 정진했던 것이다.
열흘 째 되는 아침, 마침내 천왕대심공의 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낀 것이다.
“어? 무엇인가 느껴진다. 이것이 기라는 것인가?”
준은 처음으로 느낀 기에 정신을 집중하며 호흡에 열중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호흡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형인 일현이 문밖에 서 있다가 문을 열려고 하자 스승인 한월이 일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를 막았다.
일현이 한월의 얼굴을 쳐다보자, 한월이 나직이 말했다.
“준이가 드디어 기를 느낀 듯하다. 그러니 우린 자리를 피해주자꾸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문밖의 사정을 모르는 준은 호흡을 열중하며 기를 느끼는 것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다.
준의 단전에 깨알만 한 크기의 기가 모이더니 계속된 호흡의 영향으로 점차 커졌다.
“으응? 생각보단 빠르게 커지는데?”
준의 단전엔 깨알만 한 크기의 기 덩어리가 얼마 후 포도 알만 하게 커지자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으윽… 갑자기 통제가 안 되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갑자기 준의 배에 큰 고통이 찾아왔다.
“크…큰일이다. 어쩌지?”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온몸은 고통에 부르르 떨렸다.
“으윽, 이러다 죽겠어.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이번 기회에 한번 운용해봐야겠어.”
츠츠츠츠.
처음에는 잘 통제되지 않던 기가 점차적으로 천왕대심공의 심법에 순응하며 준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의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은 거의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막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죽는 천형의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준은 거대해진 기의 덩어리를 천왕대심공으로 운용했다. 이것이 막혀 있는 충맥에 다다르자 좁아진 충맥을 뚫고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몇 번의 진퇴를 거듭했는데도 뚫리지 않자, 거센 기의 덩어리는 정체되더니 저수지에 물이 고이듯 불어났다.
준의 세맥 곳곳에 잠복되어 있던 영약의 기운들이 몸 밖의 기를 빨아들였고, 기의 덩어리는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으윽! 큰일이야. 어쩌지?”
고통이 점점 커지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여…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충맥을 뚫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더 이상 방법이 없자 준은 모험을 하기로 했다.
호흡을 통해 기를 모으는 것에 소극적이던 준은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떠올리며 더욱 기를 끌어 모았다. 그러자 충맥 앞에 정체되어 있던 기의 덩어리가 거대해졌다.
기의 덩어리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충맥을 강타했다.
콰쾅!
기의 덩어리는 거대한 힘으로 충맥을 순식간에 뚫고 나가더니, 배꼽 옆으로 올라가 가슴까지 가서는 다시 신체의 옆으로 한 바퀴 돌았다.
콰콰콰콰!
거센 기의 덩어리는 마침내 대맥과 양교맥도 뚫어버리더니, 발꿈치에서 시작해 안쪽 복사뼈 위로 올라가 충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도 기의 덩어리는 멈추지 않고 독맥으로 향했다. 인중과 콧마루에서 이마와 정수리로 올라가 뇌 속에 들어갔다가 뒤통수와 척추를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꼬리뼈 밑인 장강을 지나 항문을 돌아 회음에서 임맥으로 달려갔다.
쾅!
기의 덩어리는 앞을 가로막는 것은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여 단번에 뚫어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뱃속으로 관원을 지나 인후에 갔으며, 턱으로 올라가 아랫잇몸과 얼굴을 돌아 눈으로 들어갔다. 이는 양교맥과 위경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뚫어버렸다.
준은 이렇게 해서 기경팔맥 중에서 육맥을 뚫어버렸다. 이에 자신을 얻은 준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고 이번에는 나머지 임맥과 독맥을 뚫어버리려고 도전했다.
그것을 무림인들은 생사현관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어렵고 위험한 곳이었다.
“크윽!”
아무리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운행해도 마지막 남은 임맥과 독맥은 뚫리지 않았다.
생사현관이라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 없으면 쉽게 뚫을 수 없는 곳이다. 그만큼 무예를 익히는 자들에게는 생사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울컥.
준은 검붉은 피를 내뿜었다. 무리하게 천왕대심공의 심법을 운행하여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크으음… 더 이상 운행하는 것은 무리야.”
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기를 단전으로 유도했다.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점차 기들은 단전으로 모였다. 그리고 점차 안정을 되찾더니 잠잠해졌다.
너무 극심하게 심력을 소모한 준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내 육체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자 그대로 엎어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준은 한나절이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기경팔맥 중에서 육맥과 십이경락이 모두 뚫리자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스승인 한월과 사형인 일현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다.
“그래. 장하다, 준아.”
“드…드디어 십이경락과 기경팔맥 중 육맥이 모두 뚫렸구나. 축하한다, 사제.”
“감사합니다.”
“임맥과 독맥도 뚫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스승님, 전 지금의 성취한 것들만으로도 기쁩니다. 조금 더 노력하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 장하다.”
“사제, 조금만 더 노력하자.”
“예, 사형.”
다음날부터 준은 이제까지 익혔던 것을 반복 수련했고, 열심히 천왕대심공상의 심법도 수련해나갔다.
그러나 임맥과 독맥을 뚫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훌쩍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