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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켈리온 성
졸졸졸.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
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동굴은 천장과 바닥이 온통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러 곳에 형성된 광장을 비롯해 동굴 바닥 곳곳에는 지하수로 인해 연못이 생성되어 있었으며, 피압지하수가 마치 분수대 모양으로 여기저기에서 솟아올라 아름다운 광경까지 자아내었다. 게다가 내부는 대규모의 종유석상이 발달되어 장관을 연출했다.
딱정벌레가 날아다녔다. 연못 속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경사면이나 천장에도 다리가 긴 거미 등 희귀한 벌레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쉐에에엑.
무엇인가가 허공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갔다.
바람 소리만 들어보아도 묵직한 것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푸드득.
동굴 천장에 붙어 있던 것이 갑자기 떨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박쥐였는데 특이하게도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슈가가각.
황금박쥐는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다가 갑자기 두 동강 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휘리리릭, 처척!
황금박쥐를 두 동강낸 물체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것을 붙잡았다.
뒤돌아선 자의 품속으로 들어간 물체.
자세히 보니 부메랑과 아주 흡사해 보였다.
“크크크큿… 이곳에 제법 오랫동안 있었군. 이제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스으, 스스슷.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의문스러운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1980년 6월 7일 오후 4시, 서울 강남의 최 산부인과의원.
“아아악…악.”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으읍… 아악…….”
어느 산부인과에서든 다 그렇겠지만 분만실에서 나오는 비명이었다.
특실 304호에 입원해 있는 이영숙은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몹시 불안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 지난날을 회상했다.
이영숙은 키가 173cm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흰 피부에 큰 가슴, 몸매까지 S라인이었다. 외모만 본다면 완벽할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또한 미녀가 많다는 대구에서 출생해서인지 대학 때는 5월의 여왕이었으며,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늘 10명은 되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의 남편인 김재엽을 만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날따라 영숙은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고 학교 인근의 하숙집으로 향하던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납치하려고 강제로 입을 막고 차에 태우려고 했다.
그때였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재엽이 이를 발견하고는 의협심을 발휘해서 겨우 그녀를 구출했다.
멋진 정의의 기사가 나타나 깡패들을 혼내주고 미녀를 구한다는 내용은 영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에서 그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둘은 보통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사실, 까까머리 군인 아저씨인 재엽은 영숙을 납치하려던 2 명의 남자들에게서 그녀를 구한 것이 아니라 원 없이 두들겨 맞았다. 영숙을 납치하려던 일이 틀어지자 그 분풀이로 신나게 재엽을 두들긴 것이다.
운이 따랐던 것인지 마침 그곳을 순찰 중이던 경찰들이 나타나 재엽과 영숙을 구해주었다.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던 영숙은 재엽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얼굴이 터진 만두처럼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싸울 줄도 모르면서 연약한 여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재엽의 의협심에 무척 감동하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더니 친구들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받는 닭살커플이 되었다.
그렇게 휴가 기간이 끝난 재엽은 6개월 남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귀대하게 되었고, 영숙은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잡지 모델이 되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큰 키에 완벽한 몸매까지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품 모델까지 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었다.
제대한 재엽은 영숙과 다시 만나 깊은 관계를 가졌다.
3달이 지나고 점점 배가 불러왔다.
영숙은 어쩔 수 없이 재엽을 데려가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착실하고 집안도 좋은 재엽을 본 장인과 장모는 그 자리에서 결혼 날짜를 잡아버렸다.
더 배가 불러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들은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어느덧 해가 바뀌더니 출산 예정일이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재엽은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백두그룹의 기획이사였다.
백두그룹은 한국의 30대 기업으로 재엽의 아버지가 사장이고, 할아버지가 회장이었다.
재엽은 어려서부터 유독 물건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새로운 장난감을 사들고 오면 하루 만에 모두 분해해서 고장 내기 일쑤였다. 집안이 풍족해서 물건 귀한 줄 모르고 자랐기에 이렇게 고장 낸 전자제품들이 한 트럭은 족히 되었다.
엄한 아버지였지만 할아버지가 계시니 재엽을 큰소리로 야단칠 수도 없었다.
그의 집안은 유독 손이 귀해 독자로 핏줄이 이어졌다.
오대독자인 재엽은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지원과 물질적인 지원들을 많이 받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떼만 쓰면 모든 것이 이루어 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달리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중학생이 되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기에 학교생활이 평탄치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런 재엽을 조기 유학의 길에 오르게 했다. 결국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입대했고, 휴가 중에 영숙을 만나 사귀더니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던 영숙의 아랫배가 서서히 아파왔다. 그리고 갑자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고통까지 찾아왔다.
“아아악.”
“여보, 많이 아파?”
“배…배가 너무 아파요.”
재엽은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가더니 바로 의사와 간호사를 데려 왔다. 특실에 입원했으니 인터폰으로 호출해도 될 것을 아내 때문에 정신이 나가서 뛰어갔다 온 것이다.
“서…선생님, 아내가 배가 무척 아프다고 합니다.”
잠시 청진기로 영숙의 상태를 점검하던 의사는 간호사에게 말하였다.
“간호사, 산모를 분만실로 옮겨요.”
“예, 선생님.”
“아내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양수가 터져서 분만실로 옮겨야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부모가 되시겠습니다. 허허허.”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재엽은 흥분하며 말하였다.
“아내는 괜찮겠지요?”
“그럼요. 저희를 믿으세요. 모든 산모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아기가 태어나죠. 그럼.”
“예? 아, 예…….”
재엽은 분만실 앞 의자에 앉아 태어날 아기와 산모가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으으으아악!”
영숙의 비명이 분만실 밖까지 흘러나오자 재엽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벌써 2시간째였다. 곧 나올 것만 같은 아이가 저렇게 엄마를 고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으아앙!”
힘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재엽의 귓가에 맴돌더니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분만실의 문이 열리자 푸른 가운을 입고 입에 마스크를 한 의사가 걸어 나왔다.
“선생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엽은 어느새 의사 앞에 다가와서는 의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재엽의 얼굴을 바라보던 의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아들? 아들… 정말입니까?”
“그럼요.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그거야 그렇죠. 하하.”
재엽은 너무나 행복해서 연신 히죽거렸다.
“가…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재엽은 팔불출처럼 십여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귀한 집안의 육대독자가 드디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느새 재엽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백두그룹의 본사인 백두빌딩 54층 사장실.
사장 김천명은 오늘따라 안절부절못하겠는 데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띠리리링.
깜짝 놀란 천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터폰이 울린 것이다.
“휴우… 진정해야지.”
천명은 마음을 가다듬고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뭔가?”
“사장님, 기획이사님으로부터 전화입니다.”
“그래? 돌려봐.”
“여보세요?”
“아…아버지, 손자입니다! 손자!”
“뭐?! 저…정말이냐?!”
“예, 그럼요.”
“으하하하! 학수고대하던 손자가 태어났어! 손자가…….”
“아버지 놀라지 마십시오. 김씨 집안의 6대독자가 태어난 것만 해도 대단한데 쌍둥이입니다, 쌍둥이!”
“으하하하! 쌍둥이? 손자가 한꺼번에 둘이란 말이지?”
“언제 오실 겁니까?”
“언제라니?! 당장 달려가야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천명은 맛이 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더니 눈빛까지 몽롱해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어깨위로 올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혼자 기분에 취해 춤을 추다가 멈추었다.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천명이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자 꾀꼬리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사장님.”
“미스 김, 차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장실에서 걸어 나온 천명은 재킷을 여미고 엘리베이터에 승차했다.
백두그룹의 본사인 백두빌딩 55층 회장실.
푹신하고 호화로운 의자에 왜소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흰 저고리를 입은 그의 얼굴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어서인지 인상이 날카로웠다. 그래도 흰 수염이 길게 나 있어서 그나마 중후하게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눈이었는데 눈빛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 누구도 이 노인과 눈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가는 그대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신비한 분위기에 카리스마까지 넘쳐났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대답했다.
“들어와.”
정장을 차려입은 30대의 비서가 노인에게 인사를 한 후 말했다.
“회장님, 사장님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그래.”
“예, 회장님.”
“사장님, 들어가십시오.”
비서가 회장실의 문을 열어주자 천명이 후다닥 들어왔다.
부하직원들이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경망스럽게 허겁지겁 들어온 것이다.
“아…아버님.”
백두그룹의 회장 김수리는 흰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쯔쯔… 넌 어째 사장이라는 놈이 경망스럽게… 확 아들만 아니라면 그냥… 회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
주눅이 든 천명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중대한 일인데요?”
“그게 뭔데 그래?”
“기뻐하십시오, 육대독자가 태어났는데 쌍둥이라고 합니다.”
“뭐?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이걸 그냥… 콱!”
“뭐, 제대로 말할 기회나 주셨나요?”
“흠… 그건 그렇군.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두루마기, 내 두루마기…….”
그렇게 중후한 노인이 갑자기 경망스럽게 움직이자 천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렸다.
“뒤쪽 옷걸이에 걸려 있잖습니까?”
“아… 그렇지?”
후다닥.
노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속도로 움직인 수리는 두루마기를 제대로 입지도 않고 회장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천명도 그런 회장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가를 떠올리더니 후다닥 튀어나갔다.
“가…같이 가요, 아버지!”
백두그룹의 회장님과 사장님이 평소와는 다르게 정신없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튀어나가자 비서실 미스 김이 황당하다는 듯이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수리는 큰소리로 외쳤다.
“미스 김, 뭐해? 당장 차 대기시켜!”
“예? 아… 예, 회장님.”
평소와는 너무나 다르게 경망스레 움직이는 회장님과 사장님 때문에 잠시 넋을 잃었던 미스 김은 인터폰을 들어 운전자 대기실에 호출하였다.
============================ 작품 후기 ============================
*** 이 작품은 환상미디어 출판사에서 "부메랑" 필명 "추장"으로
출판되었던 작품입니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님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