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어? 서재윤 에스퍼 팔이…….”
“저, 저건 피 아냐?”
“뭐야, 왜 서재윤만 다쳤어?”
앞다투어 달려들던 기자들의 질문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윤의 모습은 앞서 등장한 권해일이나 견지호의 적당히 흐트러진 모습과 전혀 달랐다. 핏줄이 다 터져 붉어진 눈과 젖어 있는 머리카락에 흐트러진 의복, 거기에 쩍쩍 갈라져 핏물을 흘리는 팔은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생방송 중 모자이크 처리가 늦어 삽시간에 퍼져 나간 정보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레기 새끼들 미친 거 아님?
-재윤이 팔 찢어진 거 맞아?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 애 눈이고 팔이고 다 터져서 나왔는데 그걸 카메라에 담고 있냐고!!!
-이 와중에 섹시한 거 나만 그럼?
⤷ 이런 분위기 아닙니다...
⤷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자제 조뮤ㅠㅜㅜ
실시간 여론은 기자들의 무례함에 분노했다. 다친 사람을 두고 인터뷰만 따려고 한다며 에스퍼 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여러분, 잠시만요. 곧 돌아올게요.”
화면을 향해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건넨 지호는 재윤을 데리고 사라졌다.
익숙한 감각과 함께 눈 깜박할 사이에 병원에 도착한 재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여길 바로 와? 전용 병동인데 마나 제어 장치가 작동 안 하는 거야?”
“아니. 하도 이동 능력을 써 댔더니 내 등급이 올랐어.”
가볍게 대답한 지호가 병실 문을 열어 주려 하자 재윤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남자한테 손목이 잡힌 지호는 썩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깨나 팔은 몰라도 손목은 좀…….”
“마나가 안정적인데, 가이딩 받았어?”
“당연히 받았지.”
평범하게 대답하던 지호는 재윤의 붉은 눈이 노려보자 어이없어하며 빠르게 답했다.
“야, 내가 짐승도 아니고. 너한테 가이딩 쪽쪽 빨린 선배한테 받았겠냐?”
“하지만 지금까지 가이딩 받을 틈이 없었잖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재윤의 태도에 지호는 짜증 내며 잡힌 손을 털어 냈다.
“가이드 구출하는 동안 다들 달라붙어서 자연스럽게 가이딩이 됐어. 안전한 곳에 데려다준 후에도 잠깐이지만 가이드들이 먼저 가이딩을 해 줬고.”
이능을 사용하느라 버거웠던 지호였지만, 여러 명의 가이드를 탈출시키는 동안 짧게나마 가이딩을 받을 수 있었다. 개중 상당히 기분 좋은 가이딩도 있어서 통성명해 둔 가이드도 있었다.
“역시 넌 가이딩 효율이 높구나. 다행이네.”
“그래, 뭐. 네가 선배를 차지했으니 이런 노력이라도 해야지.”
재윤과 재하의 긴밀한 가이딩을 목격해 버린 후, 지호는 빠르게 미련을 버렸다. 임자 있는 사람에게 계속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정곡을 찌르는 지호의 투덜거림에 재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재윤이 얄미우면서도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마음 정리에 들어간 지호는 태연할 수 있었다. 의연하게 문을 열고 안에 있는 해일을 불러냈다.
“선배, 동생분 왔어요. 권해일 에스퍼는 저랑 기자들한테 뜯기러 가시죠.”
안쪽에는 형으로 추정되는 동그란 이불 더미가 보였다. 밖으로 나온 해일은 재윤을 걱정했다.
“서재윤 씨, 여긴 병동이라 힐러는 다른 건물에 있습니다.”
“괜찮아요. 형을 혼자 둘 수 없어요.”
“제가 곁에 있을 테니 서재윤 씨는 치료부터…….”
“에이, 기자들이 무슨 억측 할지 모르니 빨리 가야 해요.”
세 사람의 짧은 대치는 수액을 체크하러 온 간호사의 등장으로 일단락되었다.
복작복작한 바깥 상황에 침대 위에서 도롱이가 돼 있던 재하가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밖에서 뭘 하는 거야.’
해일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재하였기에 얼굴만 내민 채 바깥을 주시했다. 한참 동안 문 앞에서 실랑이하더니 이내 조용해졌고, 잔잔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흐르던 TV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권해일 에스퍼다!』
『서재윤 에스퍼의 부상이 심각합니까?』
『협회의 공식 입장은 아직입니까?』
“오, 진짜 생방송이구나.”
조금 전까지 곁에 있던 사람이 TV에 나오는 건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해일은 평소처럼 신뢰감 넘치는 미소로 카메라 앞에 섰다. 공익 광고가 잘 어울리는 미남 배우 같은 외모는 언제나 사람들을 집중하게 했다. 무섭게 몰아치는 질문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해일은 능숙하게 필요한 답을 이어 갔다.
“형, 일어나 있었네?”
“어, 왔냐?”
TV에 집중하느라 문 열리는 줄도 몰랐던 재하는 재윤의 물음에 평소처럼 대답했다. 재윤을 볼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했던 게 허무해질 만큼 자연스러웠다.
침대 옆에 걸터앉는 재윤을 위해 몸을 뒤로 물리려던 재하는 허리부터 아래까지 이어지는 극심한 통증에 소리도 못 내고 몸을 웅크렸다. 바들바들 떠는 재하를 본 재윤이 놀라 그를 붙잡았다.
“형, 괜찮아?”
고개만 도리도리 내젓는 반응에 재윤이 너스 콜을 누르려 하자 재하가 필사적으로 팔을 붙잡아 왔다.
“윽, 부르지 마.”
“수액만 맞아서 되겠어? 이거, 진통제 들어간 거 맞아?”
“됐다고…… 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재하가 재윤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놀라 손을 내렸다.
저번 폭주 때는 재윤의 몸에 생겼던 검은 그을음이 가이딩 후 사라지고 멀쩡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던 탓에 갈라진 피부 그대로 상처가 남아 피까지 흘러나왔었다. 붕대를 감은 팔을 보고서야 기억해 낸 재하가 손을 내저으며 재윤을 밀어냈다. 고작 그 정도의 움직임만으로도 말 못 할 곳이 아파 와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으으…… 너, 팔 제대로 치료받고 와.”
“형이야말로 허리 나간 거 아냐? 힐러 부를게.”
“미쳤냐? 힐러를 이런 걸로 오라 가라 하게? 너나 가서 받아.”
“난 안 받을 거야. 이 정도는 자체 치유력으로 금방 나아. 협회랑은 이제 끝낼 거라 떠나는 마당에 빚을 지면 귀찮아져.”
재하를 되찾기 전부터 결심했던바, 재윤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형은 피해자니까 받을 거 다 받아.”
“협회랑 끝낸다고? 왜?”
“그거야, 형이 위험해졌잖아.”
“떠나면 안 위험해?”
“최소한 난 형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베개에 묻은 얼굴을 돌려 재윤을 바라본 재하가 손을 뻗었다. 재윤은 냉큼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은은하게 이어지는 가이딩에 무리하지 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다정한 온기를 놓치기 싫었다. 살랑살랑 손끝부터 채워져 오는 부드러운 가이딩이 재윤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이제 너랑 내가 페어인데 떨어질 이유가 없잖아.”
당연하다는 듯 건네진 재하의 말은 재윤을 흔들 뻔했지만, 그는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없었다.
“협회에 있으면 그럴 수 없어. 난 계속 게이트에 가야 하는데 형을 위험한 곳에 데려갈 순 없잖아.”
“너도 안 돼.”
“어? 나?”
“그래. 가이드도 데려가지 못할 게이트에 널 보낼 거 같아?”
가이드가 갈 수 없는 게이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당연하게 자신을 챙기는 형의 말에 재윤은 가슴 안쪽마저 따뜻해졌다.
“와, 진짜 형한테 반하겠어.”
넘어갈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 둔 계획을 다시 털어놓으려 했다.
『권해일 에스퍼?』
『괘, 괜찮은 겁니까?』
소란스러워진 TV 소리에 재윤과 재하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화면에는 창백해진 해일을 지호가 부축하고 있었다. 이내 지호가 기자들을 쓱 돌아본 후 화면을 향해 잠시 곤란한 표정을 보이다 상큼한 미소를 내비쳤다.
『다들 너무 무리해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만나요.』
마무리 윙크까지 곁들인, 아이돌 저리 가라 할 만큼 산뜻한 마무리 인사와 함께 지호와 해일이 사라졌다.
곧바로 문이 열리며 지호에게 부축받은 해일이 들어섰다. 해일과 닿기 전부터 불안정한 마나 파동이 느껴졌다. 재윤과 재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본 해일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힘들군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게이트 토벌을 끝내자마자 빌런을 상대하고 아지트를 불태우느라 마나가 바닥을 보일 만큼 무리했다.
“가이드 팀으로 데려갈까 하다가, 권해일 에스퍼는 다른 가이드랑 잘 안 맞잖아.”
아무래도 매일 마주치던 에스퍼끼리는 서로의 정보가 공유되기 쉬웠다. 해일이 곤란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자 지호는 손을 털고 밖으로 향했다.
“전 그럼 택시 노릇 하러 가 볼게요. 주도준 에스퍼가 아직 안 나와서 챙겨야 할 거 같아서요.”
도준이 언급되자 경직되는 재윤의 반응에 해일이 기민하게 그를 살폈다. 자신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재윤은 도준에게 경계심을 드러냈었다. 이영우야 빌런이 된 걸 보아 바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도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오늘 아지트에서 보았던 도준의 모순적인 모습을 떠올리면 재윤의 불안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서재윤 씨,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지쳐 있음에도 든든한 해일에게 재윤은 결국 그어 두었던 선을 잊을 만큼 마음이 풀려 버렸다.
“도움은 권해일 에스퍼가…… 아니, 해일 형이 더 필요해 보이는데요.”
“해일…… 형이라고?”
“뭐야, 너. 지금 해일 형이라고 부른 거야?”
밖으로 나가려던 지호마저 놀라 돌아봤다. 도준이나 해일을 향한 재윤의 꿋꿋한 호칭 탓에 지호마저 편하게 부르지 못하고 꼬박꼬박 이름에 에스퍼를 더해 불러 왔었다. 갑작스러운 친근한 호칭에 당황한 건 해일을 포함한 전부였다. 머쓱해진 재윤이 손을 휘저어 지호를 내쫓고 나서야 벙찐 얼굴을 했던 해일이 표정을 관리했다.
“그, 서재윤 씨?”
“해일 형,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와 함께 재윤은 허리까지 숙여 왔다.
“당신은 제가 끝까지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형의 페어가 됐으면 했고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주어가 빠진 사과였지만, 해일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눈만 굴리는 재하를 보곤 옅은 웃음을 보였다.
“이해합니다. 앞으로 재하와는 가이딩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 왜요?”
“아, 아니요. 가이딩은 하셔야죠.”
재하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사과라 여긴 해일이 먼저 물러서려 했지만, 오히려 당황하는 형제의 모습에 의아해졌다.
“아닙니까? 그럼 어째서 사과를…….”
“그간 해일 형의 진심을 의심했거든요. 도움은 되겠지만, 결국엔 협회 사람일 거라고. 그걸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아,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재윤의 진심에 해일은 안도한 듯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가이딩 부족으로 지친 상황에 재윤의 사과가 해일을 안심시켰다. 재하가 납치된 이후 재윤이 보이기 시작한 거리감을 해일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하면서도 재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결과는 한결 가까워진 호칭과 사과였다.
“하지만 역시, 형과 저는 협회를 떠날 거니까 가이딩 하긴 힘들겠네요.”
해일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