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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웠던 도준은 문득 이곳에 재윤과 단둘뿐임을 자각했다.
재윤이 설령 재하의 가이딩으로 어느 정도 회복했다 한들 아직은 상태가 불안정했다. 재윤을 방어 막으로 압박해 처리하고 빌런의 짓이라며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다.
‘이건 기회야. 재하를 먼저 차지했다고 여유를 부리는 틈을 놓칠 수 없지. 내게 유리한 상황이야. 사고는 언제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 여기서 끝내.’
하마터면 초조한 탓에 재윤의 어설픈 협박에 넘어갈 뻔했다. 신뢰를 잃지 않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재윤을 없애면 재하에게 진실을 알릴 사람은 없었다.
재하가 설령 재윤을 잃고 절망하다 다시 부서지더라도 자신이 그 조각들을 끌어안고 놓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과 부서진 걸 손에 넣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손에 넣는 쪽이었다.
“여길 정리하는 대로 떠나 주세요.”
포털로 향하는 재윤에게 방어 막을 겹겹이 쌓기 위해 집중했다. 마나에 예민한 재윤이 반응하더라도 막을 수 없도록 압박하려면 수십 개의 방어 막을 한 번에 생성해야 했다.
오로지 재윤에게만 집중하던 그때, 도준은 누군가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은 불쾌한 감각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윽!”
마나의 흐름을 감지한 재윤이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이능을 사용했다. 도준에게 개입한 존재를 빠르게 구속했지만, 이미 도준은 이지를 잃은 흐린 눈으로 굳어 있었다. 정신계 이능에 당했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이게 무슨…….”
아직 탈출 전임에도 도준이 방어 막을 풀어 버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윤의 힘에 눌린 사해라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 기이한 웃음을 보였다.
“사해라, 당신이 왜 여기에……?”
“수호자의 뇌를 주물러 놓기 전에 그이를 풀어 줘.”
백마혁과 함께 탈출했으리라 여겼던 사해라의 등장에 재윤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녀가 한 말을 보아 협회가 제시간에 도착한 듯싶었다.
“저한테 권한 없어요.”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지. 이건 제안이 아니니까.”
백마혁과 사해라는 아지트 안에서 이영우와 우양희를 찾지 못했다. 일단 인식 저하 능력자를 챙겨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빌딩에 짧은 시간 작동하는 탈출용 포털을 심어 두었기에 안심하고 도착하였으나 협회 제복을 입은 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백마혁이 붙잡히고 포털이 닫히기 직전, 사해라는 그를 구하기 위해 아지트로 다시 돌아왔다. 정신계 이능을 이용해 협회에서 가장 쓸모 있는 고등급 에스퍼를 볼모로 잡고자.
실제로 사해라의 계획은 성공했다. 주도준을 발견하고 그의 주변에 방어 막이 보이지 않자 곧바로 이능을 사용했다. 백마혁의 이능과 조합해 더미로 세워 둔 허수아비가 사라지며 모든 능력이 수호자를 붙잡는 데 집중됐다.
“너희 상사한테 연락해. 그이를, 백마혁을 풀어 주지 않으면 수호자는 백치가 될 거야.”
“그런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요. 다른 걸 합의하죠.”
“요구 사항은 단 하나야. 들어주지 않겠다면 수호자 다음엔 네 차례야.”
사해라의 경고에도 재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재윤의 이능이 몸을 옥죄어 오자 답답함에 사해라는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꺼냈다.
“그 후엔 너희가 그렇게 싸고도는 가이드를 찾아내서 똑같이 만들어 주겠어.”
뜯긴 벽이나 돌 따위가 몸을 조여 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해라는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경고했다. 그게 재윤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걸 모른 채.
“하아, 당신 말이에요.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사해라는 백마혁의 일이 아니라면 말이 통하는 편에 속했다. 회귀 전, 구속당한 백마혁과 함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협회의 다양한 요구를 충실히 따를 만큼 유순했다.
제멋대로 살아왔던 백마혁이 감옥 생활을 참지 못해 한 번씩 힘을 남용했지만, 이미 그의 이능이 환시와 환각임을 아는 감시자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사해라는 그런 백마혁의 곁에서 항상 웃으며 협조적으로 굴었기에 조금 유하게 대할 뻔했다.
“형은 건들면 안 되죠.”
“꺄악!”
사해라는 자신을 구속한 물건들이 강하게 조여 오자 통증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미래는 이미 지워지고 현재는 다른 길이 생겼는데 제가 또 무르게 굴 뻔했네요.”
어디선가 날아온 철판이 사해라의 팔을 누르고 꺾어 내렸다.
“아악!”
“굳이 차례를 언급하는 걸 보니 한 번에 한 사람한테밖에 쓸 수 없는 이능인가 봐요. 손을 대상에게 뻗고 있어야 사용 가능하고요.”
“그만, 그만해!”
사해라는 재윤의 거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계 이능을 사용 중인 에스퍼를 이런 식으로 다루면 위험했다.
수호자가 이능을 사용할 수 없게 붙잡아만 두었던 사해라는 갑작스러운 고통 탓에 실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정신계 이능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가 싶어 쳐다보자 그곳엔 일그러트린 얼굴로 웃고 있는 재윤이 있었다.
“고마워요.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뻔했는데. 덕분에 일이 쉬워졌네요.”
사해라는 어린 청년 같던 재윤에게 비친 어울리지 않는 씁쓸함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단 한 번밖에 쓰지 못할 힘을 써 버린 것을 깨닫고 빠르게 포기했다.
“날 체포해. 그이 곁에 있게 해 준다면 최대한 협조할 테니까.”
“그럴 거예요. 당신이 해 줘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재윤이 멍하니 서 있는 도준을 쳐다보자 약속받은 사해라가 한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고의는 아니었어. 협박만 하려던 건데 갑자기 고통을 주니까……. 한번 망가트리면 고치는 건 불가능해. 어딘가에 S급 정신계가 있다면 또 모르지만.”
“알아요.”
담담한 재윤의 반응에 사해라는 불안하기만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도준의 느릿한 목소리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사해라가 입술을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방금 분명히 망가지는 게 느껴졌는데?”
아무리 S급 에스퍼라 해도 방심한 상태에서 정신을 공격당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사해라는 이능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건가 싶어 재윤에게 슬쩍 힘을 써 봤지만, 이미 써 버린 힘은 그녀에게 페널티를 주었다.
과도한 이능 사용 시 가이드 없이도 회복할 수 있도록 사해라의 몸은 가사 상태에 가까운 깊은 숙면에 빠졌다. 빠르게 멀어지는 의식에 사해라의 의문 역시 지워졌다.
“흐으……. 이게 뭐야. 난, 내가…….”
덜덜 떨며 흔들리는 도준의 모습을 재윤은 방심하지 않고 지켜봤다.
사해라의 이능은 위험했다. 백마혁이 엉뚱한 낭만을 찾느라 본인의 환각 능력을 부풀리는 데만 써먹으려 들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국가의 주요 인물들을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었다.
사해라의 이능으로 망가졌어야 할 도준이 멀쩡하게 서서 혼란스러워했다.
“하아, 하……. 말도 안 돼.”
도준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지독한 소유욕이 한순간에 뭉개져 버린 걸 믿기 힘들었다.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은 소유욕과 집착으로 비틀려 있었다. 미궁에서 덧씌워진 기억은 감정까지 삼켜 버렸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마저 찾아 하며 상황을 최악으로 이끌었다.
“……끔찍해.”
기억 탓에 자신이 원래 그런 인물임을 알 수 있었기에 남의 일인 양 말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간접 체험 해 버린 끔찍한 소유욕은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이상의 만족감이 있을까 싶을 만큼 완벽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도준은 저를 경계하며 언제든 이능을 사용할 기세인 재윤을 보고 습관이 돼 버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어색하게 흐려지며 도준은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을 전했다.
“미안해.”
“무슨 수작이야, 주도준.”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아니, 내가 한 게 맞긴 하니까.”
도준의 상태가 갑자기 달라졌다. 특유의 여유롭다 못해 기분 나쁜 능글거림 대신 어리바리한 태도를 보이는 도준에 재윤은 그를 볼 때면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가라앉는 걸 느꼈다.
사해라가 정신을 건드렸다는 게 혹 미래의 주도준을 소멸시킨 건가 싶어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도준은 그런 재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랑 재하한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거. 보상할 기회를 달라기엔 염치없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떠나 버리면 앞으로 열릴 게이트와 길드 간의 충돌에 사상자가 많이 나올 거야.”
미래의 기억을 가진 수호자의 말은 묵직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재윤은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해외파 에스퍼와 트레이드할 거니까 어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떠나.”
“하늘길이 닫혔는데 무슨 수로…… 아.”
도준이 알아채자 재윤은 기절한 듯 보이는 사해라에게 겹겹이 벽을 쌓아 소리가 들리지 않게 했다. 잠깐 정도는 문제없을 테니 도준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주도준, 여긴 미래가 아니야. 에스퍼가 가이드를 제멋대로 취하고, 서울만 살아남아 마수 고기나 뜯어 먹으며 살아야 하는 세계가 아니라고.”
“맞아. 그랬어.”
혼란스러워 보이는 도준을 빤히 쳐다보던 재윤이 다리에 이능을 실어 쏘아지듯 날아들었다.
“큭!”
한순간에 목이 잡힌 도준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방어 막으로 보호하며 자신을 농락하지 않았다.
“너, 기억은 있는데 왜 다르지? 여전히 짜증 나지만, 널 죽이는 걸 주저하게 돼.”
“윽…… 그야 재윤이 넌 부조리한 짓은 안 하니까.”
입에 밴 재하 동생이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불러 왔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선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얼굴에 담긴 미안한 감정. 이능조차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손아귀에 붙잡힌 도준은 마치 정보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 진입하겠습니다.
― 협회 에스퍼부터 찾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협회가 뒤늦게 도착했음을 알아챈 재윤은 목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뗐다.
“긴말 안 해. 적당히 수습하는 척하다 떠나.”
재윤 역시 도준의 상태를 알아채고 한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도준이 특수한 경우였기에 망정이지 사해라의 이능이 자신에게 향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수긍하는 의미로 고개를 숙인 도준을 보며 재윤은 통신기로 지호를 불렀다.
“견지호, 잠깐만 들어와.”
“나가라더니 왜 불러. 인터뷰하느라 바쁜데.”
어느새 제복을 어깨에 걸친 지호가 투덜대면서도 곧바로 공간 이동을 사용해 재윤에게로 왔다.
감옥 바닥에 떨어져 있던 구속구를 가져다 달라는 재윤의 말에 인상을 쓰면서도 금세 가져다주었다.
지호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며 손끝으로 집어 내민 구속구를 기절한 사해라의 손목에 채우자 드디어 이번 일이 일단락되었음을 실감했다.
“바깥에 장난 아니야. 권해일이랑 선배를 협회에 데려다 놓고 왔더니 기자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는데, 너한테 공간 이동 하려다 달고 올 뻔했다니까.”
그간 협회는 언론에 호의적으로 굴었고, 또 이용해 왔다. 그래서 언론이 에스퍼 무서운 줄 모르고 들이대는 게 당연해졌다. 이런 평화가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형을 구했으니까 됐어.”
재윤에게 중요한 건 재하의 안전이었다. 가장 큰 불안 요소였던 도준이 사해라로 인해 변한 덕에 이대로 밀어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보였다.
“언론은 권해일에게 맡겨야지. 날 형에게 데려가 줘.”
“그래도 포털은 나가야 해. 여기선 내부 이동밖에 안 되더라.”
“그 정도쯤이야.”
포털 밖으로 발을 내디디자 이미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서재윤이다!”
“빌런과의 전쟁을 선포한 협회 발표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서재윤 에스퍼, 이번 일에 독단적인 행동이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견지호 에스퍼, 이번에야말로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에스퍼 무서운 줄 모르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자들을 보니 오히려 안심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