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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가득 채울 만큼 나타난 여러 명의 A급 에스퍼가 각각 어떤 이능을 가졌는지 모르면서 맞붙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수장인 백마혁과 그의 오른팔이자 파트너인 사해라가 도망치는 걸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주도준 에스퍼.”
“알아요.”
해일과 도준은 최근 여러 번 합을 맞춰 왔다. 해일이 팔을 휘둘러 불을 사용하고 마무리하듯 손을 내리면 도준이 방어 막을 이용해 불을 밀어내거나 동료를 보호했다. 저들이 가진 능력을 모르지만, 선제공격하지 않으니 이쪽이 가진 패를 깔고 뒤로 물러나 지켜보고자 불을 내질렀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날릴 만큼 강한 불기운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사람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건 아직 저항감이 있었지만, A급 에스퍼에게 여지를 주었다간 당하는 건 이쪽이었다.
“후우.”
복도가 화마에 휩싸인 양 시뻘겋게 불타오르며 불의 주인인 해일조차 열기를 느낄 만큼 삽시간에 온도가 올라갔다. 상대 에스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긴장하며 지켜보는데 불길 사이에서 불기둥이 쏘아져 나왔다.
“읏!”
해일이 피하는 것과 동시에 도준의 방어 막이 펼쳐지며 불기둥을 막아 냈다. 하필 해일과 같은 이능을 가진 자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이렇게 되면 화력 싸움이었다. 해일은 미궁에서 얻은 아이템을 이용할 생각으로 감정을 끌어 올렸다. A급이라 해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강한 화력을 만들어 내려던 해일은 불의 방향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그곳엔 아직 타고 있는 벽과 천장의 불길이 닿지 않아 제자리에 서 있는 빌런들이 있었다. 익숙한 보호막의 존재에 해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쪽에도 방어 능력자가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A급 이능을 막는 방어 막이라면 S급이란 소린데…….”
도준은 미래의 기억으로 인해 백마혁의 이능을 알고 있었지만, 해일에게 모른 척 의문을 표했다. 해일이 알아채지 못하고 전투에 임했다면 도준은 그걸 기회 삼아 한 사람 치워 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해일은 신중했다.
“저들이 수상합니다.”
해일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에스퍼의 숫자가 여럿이라 해도 그중 둘이 같은 능력을 갖췄다는 건 우연이라기엔 지나쳤다. 능력을 흉내 내거나 복사하는 이능을 가진 자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도준의 이능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깨기 힘들 수 있었다. 상대의 인원수가 많다는 것 역시 거슬렸다.
재정비를 위해 탈출하는 게 가장 적합한 판단이었으나 재윤과 재하가 아직 안에 있었다. 폭주 진행 단계였던 재윤의 상태가 불안정하다 해도 당장 데려와야 했다.
“견지호 에스퍼, 두 사람을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 불안한데. 일단 다녀올게요.”
심각한 상황임에도 지호는 평소처럼 가벼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마도 몇 초에서 길어야 1분이면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대치 상태를 잘 유지하고자 견제만 했다.
해일은 손에 불을 일으킨 채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대 역시 추가 공격 없이 시선만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이 눈을 굴릴 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거울 같은 반응에 해일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 갔다.
A급 에스퍼를 이만큼이나 보유했으면서도 협회에 쳐들어온 빌런은 오합지졸이었다. 가이드를 상대로 덤벼든 게 아니었다면 납치에 성공하지 못했을 만큼 애매한 능력이었다.
‘A급 에스퍼를 숨겨 놨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아무래도 거울처럼 반사하는 능력으로 보였다. 해일이 공격하지 않자 상대는 계속 지켜볼 뿐이었다.
“늦네요.”
안전을 의심치 않는 도준의 느긋한 목소리에 해일은 통신기로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라면 지호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필 그에게 통신기가 없어 연락도 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재윤에게서 통신이 들어왔다.
“서재윤 씨, 괜찮으십니까?”
― 아오, 내가 불안하다고 했죠! 내 눈!
반갑게 받은 통신기를 통해 지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지호 에스퍼? 눈을 다쳤습니까?”
― 하아, 전 괜찮아요. 거기, 얼마나 심각해요? 5분, 아니 10분 정도 버틸 수 있어요?
지호의 질문에 해일은 여전히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이쪽을 주시하는 이들을 확인한 후 답했다.
“급하면 통신 넣겠습니다.”
― 으으…… 알았어요.
지호가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아 초조했는데 짜증이 난 목소리나마 들어 안심이 됐다.
이쪽의 통신이 들렸을 텐데도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힘이 비등할 때 견제가 길어지기도 했지만, 상대는 아직 이능을 사용하지 않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주도준 에스퍼.”
이름을 부르며 해일이 손을 들자 방어 막이 사라졌다. 아주 약한 불꽃을 날려 보내자 바로 같은 양의 불꽃이 쏘아져 날아왔다. 목만 까닥해도 피할 수 있을 만큼 약하고 느렸다.
해일의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저들과 대치하는 내내, 마치 시간 벌이용 더미를 놓고 간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두면 아무것도 아닌 인형 같은 상대였지만, 힘을 사용하면 동급의 이능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 봤지만, 역시 물러서는 게 최선으로 느껴졌다.
아무 일 없이 10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기다렸던 지호가 두 사람과 함께 돌아왔다.
재윤은 재하로 추정되는 담요 더미를 안아 들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맨 탓에 드러난 건 재하의 맨발뿐이었다. 어째서 맨발일까 싶으면서도 재윤의 옷차림 역시 입다 만 것처럼 허술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해일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감각에도 애써 재윤의 상태에 집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던 마나가 제자리를 찾아 간 듯 순환하는 게 느껴졌다.
“마나가…… 상당히 안정됐군요.”
안정되지는 않았어도 폭주 위험은 지나갔다. 해일은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된 재윤의 마나에 놀랐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기록보다도 빠른 결과였다. 가이딩의 정도가 접촉 범위와 깊이에 따라 달라짐을 다시금 확인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재윤 씨.”
“형이 애쓴 거죠.”
“그렇군요. 역시 재하는 대단합니다.”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해일은 위장이 뜨끔거릴 정도로 쓰려 오는 것에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담요로 꽁꽁 감싼 재하를 자신에게 넘기는 재윤의 신뢰에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형을 데리고 가 주세요.”
“같이 탈출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해결할 게 있어서요.”
재윤이 하는 일이라면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 대부분 따르던 해일은 여전히 대치 중인 빌런을 힐끗거렸다.
“이능을 사용하면 동일한 능력으로 대응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반응이 없습니다.”
“저거, 여기 보스가 꺼낸 거죠?”
“네, 맞습니다.”
“많이도 꺼내 놨네요. 저거 다 환각이에요. 숫자가 많아지면 흉내나 내는 허수아비니까 괜찮아요.”
백마혁의 환시 이능과 사해라의 정신계 능력이 더해져 등급 이상의 능력을 만들어 냈다.
회귀 전, 수많은 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조직의 규모가 상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궁리해 낸 이능이었다. 협회도 처음에는 거기에 속아 뒷거래를 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술함이 드러났다.
거대 빌런 조직의 실체는 허울만 좋은 몽상가 리더의 사기극이었다. 다만, 상당한 수준의 아지트를 꾸릴 만큼의 자금력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럼 수장을 쫓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로 갈지 알아요. 협회가 쫓을 거예요.”
재윤은 손목의 통신기를 가리켰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협회에 백마혁이 향했을 만한 장소를 알려 두었다.
백마혁의 이능과 도주로를 모두 알고 있는 듯한 재윤이 믿음직해 보여 해일은 걱정 없이 재하를 안고 포털을 밟았다. 지호 역시 구석에 숨어 지켜보던 강광을 데리고 뒤를 따르자 남은 건 재윤과 도준뿐이었다.
젖은 머리가 귀찮다는 듯 쓸어 넘기는 재윤의 느긋한 태도에 도준은 고개를 기울였다.
“재하 동생, 폭주할 뻔해서 머리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 아냐? 나랑 단둘이 남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마지막 경고 하려고.”
“네가? 나한테?”
어이가 없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도준에게 재윤은 무심한 시선을 보냈다.
“알아. 내 능력으론 널 죽일 수 없다는 거. 하지만 네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도 알지.”
“협박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두리뭉실한 이야기 말고.”
“네가 한 짓, 아직 형에게 말하지 않았어. 그럴 정신이 없기도 했고.”
진즉 재하에게 진실을 알렸으리라 생각했던 도준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형은 널 굉장히 신뢰해. 네가 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걸 믿게 하려면 미래의 일까지 전부 다 설명해야 간신히 설득될 만큼.”
재윤은 폭주 부작용으로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온 팔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상처와 달리 팔뚝 아래에 생긴 가는 상처를 손으로 쓸며 입꼬리를 올렸다. 에스퍼인 자신의 팔에 얕은 상처를 남길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끝까지 받아 준 형을 떠올리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굳이 겪지 않을 일을 알려서 형을 힘들게 하기 싫어. 미래의 정보로 혼란스러워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도 원치 않고.”
팔을 쓸던 재윤이 고개를 들어 도준과 시선을 맞췄다. 도준만 보면 이성을 날려 버리던 재윤이 달라졌다.
“하지만 네가 계속 형 주변에서 보인다면 밑바닥까지 다 끄집어내 알릴 생각이야. 형이 널 경멸하게 되기 전에 친구로나마 남고 싶으면 떠나.”
형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게 된 이상 목숨을 버려 지키는 건 제외해야 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도준을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어떡할래? 이번에도 깨트려서 손에 쥘 거라면, 이전과 다를 거다. 나뿐 아니라 다른 에스퍼의 힘도 빌릴 테니까.”
“형에게 이르겠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어쭙잖은 협박이구나.”
유치한 이야길 들었다는 듯 도준은 가볍게 대꾸했다.
“가서 말해. 어차피 여기서 벌어진 일도 아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더는 쓰레기처럼 굴지 않는 거지?”
재윤의 말에 도준은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봤다.
“미래의 너였다면 형과 가이딩을 한 사실을 두고 비꼬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후벼 파 대면서.”
재윤의 말은 정답이었다. 회귀 전 자신은 그런 일을 일상처럼 해 댔었다. 재하를 겁박하고 재윤을 몰아가며 형제에게 절망과 분노를 주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야, 넌. 형에게도. 형이 아끼는 나에게조차.”
도준은 반박할 수 없었다.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재하에 대해 재정립된 감정과 생각 탓에 갑에서 을로 자신의 상황이 역전됐다.
그 어떤 협박보다도 재하의 신뢰를 잃는 게 가장 두려워지리란 걸 도준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