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말릴 틈도 없이 부딪쳐 오는 단단함이 상상도 못 한 곳을 찔러 댔다. 반사적으로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오려던 재하는 이성이 날아간 재윤의 붉은 눈과 검게 변한 양팔을 보며 간신히 입 안으로 삼켰다.
“형, 좀 더…….”
“가이딩 하고 있잖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봐.”
핏줄이 터질 만큼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가이딩에 필사적으로 달라붙게 되는 현상을 이해했다. 이해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덮쳐질 위기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재하가 허리를 비틀며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하자 자극받은 재윤의 움직임이 멈추질 않았다. 아직은 부드러운 살을 찔러 댔지만,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 재하는 불안해졌다.
“재윤아, 잠깐만 멈춰, 윽!”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움직임에 금방이라도 몸이 꿰뚫릴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대화를 하는 것 같아도 흐릿한 재윤의 눈을 보면 본능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자꾸만 도망치려 꿈지럭대는 재하의 반응에 재윤이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덕분에 양손이 자유로워진 재하가 재윤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처음엔 뺨을 쳐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할 생각으로 뻗은 손이었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워 감싸듯 잡아 버렸다.
얼굴을 붙잡힌 재윤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멎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정신 차리라고, 너 이러다 형이랑 일 치르게 생겼다고 호되게 쓴소리해 주려던 재하는 발갛게 익은 뺨을 제 손에 비비며 숨을 헐떡이는 재윤의 절실함에 심장이 다 지끈거렸다.
“재윤아, 나 좀 봐. 잠깐 형 좀 봐 봐.”
혼을 내기보다 설득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재하의 다정함에 재윤은 순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과 부풀어 있는 눈두덩이를 본 재하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봐도 재윤이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반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아파 보이는 동생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많이 아파?”
“아파. 너무 아파, 형.”
항상 괜찮다고 말하던 재윤은 자신을 구원하는 손길에 솔직해졌다. 순한 양처럼 재하의 손에 뺨을 비비면서도 맞닿은 몸은 여전히 뜨겁고 더욱 단단해졌다. 이건 윽박지른다고 해결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
선을 넘은 과한 접촉은 재윤을 느리지만 확실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목까지 내려온 그을음이 그걸 증명했다. 그러면서도 간헐적으로 넘어오는 날카로운 파동에 재윤이 숨을 삼키며 인내하는 모습을 보이자 재하는 더는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재윤의 뺨을 감싼 손을 떼지 않고 천천히 움직여 어깨로 이동하는 동안 재윤이 신음을 흘리며 덜덜 떨었다. 마구 움직여 댈 때와 달리 이성이 남아 있는 재윤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미안해. 아무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좀 겁이 나서.”
“형…….”
재하의 거절에 재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전혀 다른 뜻을 비쳤다.
“내가 널 구하는 거야.”
거부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재하에겐 재윤이 가장 중요했다.
에스퍼에게 결국 마지막 단계를 같이 할 페어 가이드가 붙어야 한다면 재윤에게 좋은 사람이 함께했으면 했다. 가이드인 자신 역시 단 한 명의 페어 에스퍼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린 이는 재윤이었다.
재윤이 저를 후보에 두지 않았기에 선택할 수 없었다. 형제인 탓에 저항감이 있어 말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이미 형제가 아님에도 함께 지낸 시간과 그동안의 인식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거부감과 고통에도 구해야 할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재윤을 선택할 재하였다.
“그러니 너 진짜로 눈 돌아가기 전에…… 하자.”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윤에게 붙잡힌 허리가 꺾일 것처럼 들렸다. 올려다본 재윤의 눈은 이미 이성이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다리를 붙든 재윤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가이딩을 더 해 이성을 찾길 바라는 행동이었지만, 재하의 행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재윤은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달라붙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욕망이 진득하게 배어나는 재윤의 시선에 재하는 눈을 피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시선을 맞추며 바싹 다가온 재윤의 애끓는 목소리가 재하의 귀를 간지럽혔다.
“이제 형 못 놔줘.”
인내심이 닳아 헐떡이는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열기를 애써 외면하던 재하가 눈을 감고 받아들이자 가장 깊은 가이딩이 시작됐다.
* * *
“가이드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괜찮겠죠?”
“통신기로 위치를 알렸으니 포털 반대편에 협회의 지원이 있을 겁니다.”
“그럼 우리만 탈출하면 되겠네요.”
우리라고 말한 지호가 이미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공간 이동을 사용하면 재윤과 재하를 두고 온, 로비처럼 보였던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다만, 폭주 상태에 접어들던 자신보다 훨씬 더 심각한 듯한 재윤의 상태를 보아 가이딩이 쉽지 않을 듯했다.
“최소 한 시간은 필요할 거 같죠?”
“2차 가이딩을 할 테니 한 시간 후면 공간 이동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그럼 그동안 잔당이나 해치우면서 시간 좀 벌까요? 불이 여기까지 안 번지게 관리도 하고요.”
지호의 제안에 걸음을 옮기던 해일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도준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마주한 도준에게 아직 남아 있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의심하는 이에게 등을 맡기기엔 장소가 좋지 못했다.
“주도준 에스퍼는 이곳에서 방어 막을 사용하고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순순히 그러겠다는 도준을 두고 돌아서는 해일은 찜찜한 마음에도 당장 해야 할 일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도준은 조금 전 보았던 재하에게서 받은 충격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도무지 회유할 수 없는 재윤을 이 기회에 처리한다면 재하를 제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기댈 곳 없어진 재하를 손에 쥐는 일은 무척 쉬울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만 생각했던 일이 재하의 단호함에 흔들렸다.
제 손을 뿌리치고 재윤을 향해 달려가던 재하의 뒷모습은 너무도 낯설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과 다를 바 없는 재윤에게 입을 맞추며 가이딩을 퍼붓던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곳에서의 재하는 자신이 알던 재하와 달랐다. 말 몇 마디에 쉽게 흔들리고,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던 재하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재윤에게만 집중하던 재하를 떠올리자 처음으로 불안해졌다.
‘재하가 날 밀어낼 리 없는데.’
재하는 이곳에서 자신을 지키려 했다. 본인을 위해 함께 납치되고 얻어맞으며 감옥에 갇힌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함께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지금의 재하는 강했다. 폭주가 진행 중인 재윤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재하는 그에게 달려갔다. 어쩌면 자신이 재윤과 비슷한 상황이었어도 재하는 똑같이 행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재윤처럼 스스로를 내던지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재하를 위해 목숨마저 내던지던 재윤과 위험을 알면서도 재윤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던 재하.
어쩌면 손에 넣기에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도준의 사고를 흐리게 했다.
“아니야. 다시 기회를 노리면…….”
과연 다음 기회가 있을까. 하려면 차라리 재윤이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 처리하는 게 쉬운 길이었다. 재윤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재하에게 자신의 거짓말을 알릴 것이다. 어쩌면 미래의 기억까지 끄집어내 진실을 알릴지도 모른다.
‘재윤이 하는 말이면 믿겠지. 제 동생을 그리 싸고도는 재하니까.’
하지만 이미 자신을 의심하는 해일의 시선이 떠올랐다. 자신이 다시 로비로 돌아가 재윤에게 해코지한다면 변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하와 함께 있는 재윤을 해친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제 형제를 지키는 일이 최우선인 재하의 예민함만 건드리게 될 뿐이었다.
“하아……. 거의 다 손에 넣었던 건데.”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재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입장이 역전됐다.
재하는 자신에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포식자이고 상대는 손쉬운 먹이라고 생각했지만, 먹잇감의 마음을 원하게 된 이상 약자는 정해졌다.
“감옥에 있어야 할 수호자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방어 막 바깥에서 들려오는 빈정대는 목소리는 도준의 생각을 방해할 수 없었다.
백마혁은 저를 무시하는 도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하의 행방을 슬쩍 물었다.
“서재하는 어디에다 두고 혼자 있나?”
상대의 입에서 서재하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타개책을 찾느라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네 가이드는 어딨느냐고 묻잖나, 수호자.”
애초에 단 한 번도 제 것인 적이 없었다. 도림의 죽음을 이용했고, 자신의 허락이 없으면 구원할 길 없는 재윤과의 가이딩을 빌미로 묶어 두었다. 제 품이 아니면 짐승들에게 굴려질 거라고, 협박하듯 에스퍼들에게 던져 주었다.
하지만 단단한 마음을 가진 현재의 재하에겐 어떤 것도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재하가 자신에게 가진 신뢰 한 자락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매달려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멍청하게도 착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의 손안에 재하가 있다고 여겼던 어리석음이 큰 오류를 만들어 냈다.
“수호자, 너. 아까부터 무시하는데…….”
“포털에서 떨어지십시오.”
해일의 경고와 함께 붉게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백마혁에게로 떨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뒤로 물러나 불을 피한 백마혁은 협회의 고등급 에스퍼가 셋이나 모인 것을 보고 크게 웃었다.
“이거 참, 신은 내 편인가 보군. 딱 판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
백마혁이 양쪽으로 팔을 펼치자 그의 등 뒤로 수많은 에스퍼들이 나타났다. 어디에 숨어 있다 갑자기 나타난 건지 의문일 정도로 복도를 가득 채운 에스퍼들이 저마다 A급 이상의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해일은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을 이용한 장막을 만들어 냈다. 지호는 공간 이동에 제약이 있는지 눈으로만 살피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 애들이랑 놀아 주게나. 오랜만이라 힘이 제어가 안 될지 모르니 조심들 하고.”
호탕한 웃음과 함께 뒤로 물러나는 백마혁을 따라 고혹적인 분위기의 여인이 함께 움직였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갑자기 나타난 에스퍼들은 전부 세 사람에게 집중했다.
A급 능력자가 이 정도 모여 있으면 아무리 해일이라도 힘들 터. 도준은 해일의 앞에 방어 막을 세워 주며 백마혁이 불러낸 능력자들을 눈에 담았다.
‘재하에게 있어 우선순위가 밀렸다면.’
자신이 재하의 첫 번째 소중한 사람이 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걸 위해 주변의 불필요한 인연을 치워 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떠올린 생각이 마음에 들어 도준의 웃음이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