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렇게 되면 더는 막을 수 없었다.
도준은 방어 막을 키워 재윤을 밀어내려 했지만, 재윤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방어 막은 부서져 나갔다.
“아예 생성이 안 된다고?”
당황한 도준을 눈앞에서 본 재윤은 몸속을 진탕으로 만드는 마나 폭주 현상에도 웃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조금만 더 버티면 도준의 목을 손에 쥘 수 있으리란 희망이 보였다.
“진정해, 재하 동생. 아직 되돌릴 수 있어.”
다급한 도준의 반응에 끝이 다가옴을 확신했다.
재윤은 재하의 죽음 앞에 맹세했다. 한 번만 제게 기회를 준다면 무슨 수를 쓰든 형을 지켜 낼 거라고. 내 모든 걸 바치겠노라고. 목숨마저 내던질 각오를 했다. 원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하는 것쯤은 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뿌리 깊은 분노를 삭이고 형만을 바라봤다. 그러면 한결 견디기 쉬워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널 형 앞에서 치워 낼 거다.”
이번에야말로 형을 지킬 것이다.
재윤의 목 아래까지 시커먼 그을음이 올라오는 걸 본 도준은 당황하던 모습을 지우고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말해 두지만, 난 형제인 너희를 꽤 좋아했어. 재하를 가지는 데 이용하느라 괴롭히긴 했지만.”
덤덤하게 말하는 도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도 재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 방어 막 아래 도준의 맥박마저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손아귀에 힘을 주는 순간, 재윤은 전신에 내리꽂히는 격통과 함께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했다. 어느새 바닥에 쓰러진 재윤의 눈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도준의 얼굴이 비쳤다.
“이거, 손가락이 저릿하다 싶어서 전기 계통일 줄 알았는데 마비 능력이 나갔나 보네.”
손가락을 언급한 도준의 손에 밋밋해 보이는 반지가 보였다. 특징 없는 형태와 달리 마나를 듬뿍 머금어 짙은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어디 보자……. 혹시 마지막 가는 길에 도움이 될까 싶어 마나를 넣어 봤는데, 이번 건 꽝인가 봐. 시원하기만 한 걸 보니 바람이나 냉기 같은 거려나.”
“너…….”
재윤은 그제야 도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자신을 마비시켰다는 걸 알아챘다. 한 수를 숨겨 놓는 타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방어 막에만 집중한 탓에 아이템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와 후회한다 한들 이미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몸속을 뒤집을 기세로 날뛰는 마나는 폭주를 앞당기고 있었다.
재윤의 상태를 충분히 확인한 도준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물러섰다.
“그러게 적당히 타협하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도준은 손까지 흔들며 재윤에게서 돌아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윤을 농락한 도준의 모습을 구석에 숨은 강광이 핸드폰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능이 패시브처럼 사용되는 강광의 특성 탓에 다른 에스퍼가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도준은 재윤을 방치하고 떠났다.
도준이 완전히 떠나 더 이상 위험이 없음을 본능처럼 알아챈 강광은 이 감각이 이능이라는 걸 확신했다. 피투성이인 바닥을 조심스럽게 가로질러 바닥에 쓰러진 재윤에게로 다가갔다.
“서재윤 에스퍼?”
하늘을 보고 쓰러진 재윤은 울고 있었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재윤의 얼굴을 강광은 핸드폰이 아닌 눈으로만 담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폭주에 휩쓸리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강광은 이상하리만치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직감이, 이능이 보내는 신호를 재윤에게 알렸다.
“괜찮을 거예요.”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한 배려라 여긴 재윤은 허공이 아닌 강광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 굳어 버린 재윤의 입을 움직이게 했다.
“피……해.”
“괜찮아요. 여긴 안전하니까.”
에스퍼라면 아무리 약하다 해도 재윤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무엇보다 재윤은 눈에 보이는 뚜렷한 폭주 전조 증상이 있었다. 그러나 강광은 여기까지 따라오게 만든 자신의 이능을 믿었다.
“이곳에 있으면 최상의 장면을 볼 수 있을 거란 감이 왔어요. 아, 물론 그게 고어 한 건 절대 아니에요. 제 방송은 전 연령이거든요.”
태연하기만 한 강광의 태도에 재윤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런 재윤을 따라 강광 역시 엄지까지 치켜들며 웃어 보였다.
“절 믿어 보세요. 이 정도로 기대가 되는 걸 보아 극적인 재회가 있을 거라고 봐요.”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터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알아챈 강광이 핸드폰에 보조 배터리를 장착하며 물러섰다.
“전 관찰자니까 뒤에 있을게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대화가 이런 거라니. 재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분노로 뜨거웠던 머리가 환기됐음을 느꼈다. 분노가 사그라드니 남은 건 형을 향한 걱정과 그리움이었다.
형이 위험 속에 뛰어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형을 만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형이 위험해질 바에는 차라리 아예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재윤은 눈을 감았다.
에스퍼들의 침입은 빠르게 조직 내부에 알려졌다.
“권해일이 아지트에 침입했습니다.”
“서재윤도 목격됐다고 합니다.”
“보, 보스. 여기 영상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파트너와 룸에서 쉬고 있던 백마혁은 연달아 날아드는 소식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설치는 해 두었지만, 평소 볼 일이 없어 잊고 있던 내부 감시 카메라에 담긴 영상이 백마혁의 눈앞에 들이대졌다.
“음?”
손바닥만 한 폰 화면 속에선 어디선가 나타난 서재윤이 조직원들을 김밥 말듯 둘둘 말고 있었다. 소중한 부하들이 에스퍼에게 제압당하는데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이어진 영상은 분위기가 달랐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S급 에스퍼가 연기 속을 자유롭게 거니는 모습이 포착됐다. 문제는 그 뒤였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직원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투명한 막에 눌려 압사하는 이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이후 영상은 카메라가 망가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가 구속구를 어떻게 풀었지?”
영상을 보는 짧은 시간에도 통신기마저 시끄럽게 울려 댔다.
― 보스, 포털 주변이 불바다가 돼서 탈출이 불가능해요!
“누가 탈출을 한다고? 당장 침입자를 막으러 가지는 못할망정!”
백마혁은 리더이긴 해도 이상만 있을 뿐, 구체적인 행동은 조직원들의 자율에 맡기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서재하를 데려오기 위해서라곤 해도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이영우의 존재가 무척이나 귀하게 느껴졌다.
― 우리끼리 가면 개죽음인데 어떻게 막으러 가요.
― B급이라도 모여서 가든가요.
“보스가 나서야 할 때인 거 같은데요.”
조심스러운 누군가의 말에 백마혁은 망설였다. 그의 능력은 다인전에 특화되었기에 에스퍼들이 흩어져 있는 상황에선 밑천을 들킬 수 있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백마혁의 태도에 기다리는 이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수호자라더니 사이코패스였어. 사람을 다 터트려 놨잖아.”
“이러다 다 죽겠어요! 전 개죽음당하긴 싫다구요!”
“보스! 명령을!”
구심점이 없다는 게 티가 났다. 이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규칙이 없다는 게 긴급 상황에선 스스로 오합지졸임을 드러낼 뿐이었다.
“잠깐만 보여 줄래?”
조용히 앉아 있던 사해라가 핸드폰을 든 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카메라 영상을 전부 확인하기 위해 빠르게 터치했다. 금세 기지 내의 사태를 확인한 사해라는 폰을 돌려주곤 백마혁에게 생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가 반 이상 보이지 않아요. 손상될 만큼 타격을 입었거나 연기나 불길에 가려 보이지 않는 거예요. 대응하기보다 탈출하는 게 나아요.”
“흠, 역시 그렇군.”
백마혁은 파트너인 사해라가 항상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고 결정을 내린다는 걸 알았다. 재력과 힘으로 무작정 밀어붙이는 백마혁은 그런 파트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작 에스퍼 서너 명 때문에 탈출한다고요?”
아직 영상을 보지 못한 에스퍼가 못마땅한 듯 불만을 드러냈다. 에스퍼 몇 명 침입했다고 해서 섬 하나를 통째로 버리고 도망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희는 우양희랑 이영우를 찾아 와. 다른 놈들은 내가 챙길 테니.”
“양희는 숙소에, 영우는 연구실에 있을 테니까 바로 데리고 오렴. 함께 탈출해서 후일을 도모하자꾸나.”
사해라의 상냥함은 가이드가 없을 때 에스퍼들을 안정시켜 주던 이능과 닮아 있었다. 불안해하던 에스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요 멤버를 데려오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백마혁마저 나가려 하자 사해라가 살며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먼저 탈출하세요. 인식 저하 능력은 마지막까지 유지돼야 하니까 제가 데리고 갈게요.”
포털 능력자인 우양희와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이영우도 꼭 필요한 인재였지만, 지금까지 안전하게 숨어 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인식 저하 이능을 가진 에스퍼도 챙겨야 했다.
“가이드도 하나 챙겼으면 좋겠는데.”
“이미 권해일과 만났으니 무리예요.”
백마혁이 가이드라고 표현했지만, 서재하를 말하는 게 뻔했다. 영상 속에 언뜻 스쳐 지나간 그들을 떠올린 사해라는 백마혁의 욕심을 웃음으로 넘겼다. 그러면서도 후일을 기약하는 걸 잊지 않았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업체를 구해야겠어요. 불이 이렇게 나는데도 스프링클러가 작동을 안 하네요.”
“그런 것까지 확인하다니. 역시 내가 파트너 하나는 잘 얻었지.”
당장의 위협에 놀라 하얗게 질려 허둥지둥하는 조직원들과 달리 두 사람은 불안함도 없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자동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어때요?”
“아예 함정을 만드는 것도 좋겠군.”
“그래요. 이영우가 있으니 게이트의 마나를 이용해서 지금처럼 숨길 수 있을 거예요. 굳이 한국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되고요.”
우연히 발견한 인공 섬이 아니더라도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아지트를 쉽게 포기하는 것으로 보였던 건, 실제로 다시 만드는 게 쉬웠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머릿수나 채우는 셈 치고 적당히 모아 왔던 이들이었다. 필요한 인재만 제대로 챙겨 탈출한다면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서기엔 가오가 안 사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백마혁이 붙잡힌 손목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어린애 같은 욕심조차도 사해라의 눈에는 사랑스러웠기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백마혁의 뒤를 따랐다. 여차하면 상대의 뇌를 진탕으로 만들어 버리더라도 백마혁만큼은 탈출시킬 각오로 몸 안의 마나 상태를 점검했다.
‘한 명 정도는 해치울 수 있겠어.’
페널티가 크기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최우선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며 사해라는 은은한 미소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