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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러 가다 형이 납치되어서.”
“아, 그럼 인정이지.”
지호의 덤덤한 반응에 재윤은 표정을 굳혔다. 갑자기 나타난 견지호의 멀쩡한 모습을 보자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형이 납치됐다는데 왜 침착하지? 너도 납치됐던 거 아니었나?”
순식간에 경계심을 드러내는 재윤의 태도에 지호는 흰 셔츠일 뿐인데도 무척이나 공들인 차림처럼 보일 만큼 완벽한 핏을 포즈까지 잡아 가며 내보였다.
“이것 좀 봐 봐.”
“아니, 그런 짓은 여자들 앞에서만 하지 그러세요…….”
투덜대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강광과 단숨에 불쾌해진 재윤의 표정이 동시에 썩는데도 지호는 당당했다.
“보시다시피 납치범이 애지중지해 준 덕에 TV랑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었거든.”
“그렇다고 해서 형이 납치된 걸 알 수는 없었을 텐데.”
가이드 납치 사실이 알려지면 협회에 좋을 게 없었다.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는 데 급급한 협회가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을 알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지호를 납치한 범인이 형을 납치한 자와 동일 인물일 거란 가설이었다.
재윤의 기세가 매서워지자 지호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여긴 위성 방송 같은 것도 안 되나?”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누가 널 납치한 건지 말해.”
“진정해. 일단 권해일 에스퍼부터 데려올게.”
해일을 언급하자 재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바쁜 사람이야. 내버려 둬.”
“바빠도 선배를 찾는 게 우선이지.”
“그러지 마. 어차피 권해일은 협회 사람이야.”
재윤의 체념한 듯한 말투에 지호는 고개를 기울이며 가벼운 어투로 물었다.
“물어봤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지호는 한숨을 쉬며 재윤에게 다가섰다.
“기회는 공평하게 얻자고 했잖아. 나름대로 페어플레이 중이라고.”
재윤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지호를 향해 급히 손을 내밀었지만, 깃털이 손가락 사이를 긁는 듯한 느낌만 남고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금방 다시 돌아올 지호는 해일과 함께일 것이다. 해일에 대한 기대를 접어 둔 자신의 입장에선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막막해진 상황에 이성적인 해일이 와 준다면 든든한 것도 사실이었다.
심란해진 재윤과 달리 제삼자의 자리에서 지켜보던 강광은 좋은 걸 찍었다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냉기를 풀풀 풍기던 재윤이 지호 앞에서는 제 또래처럼 감정적으로 구는 모습이 인간미 넘쳤고 희귀했기에 만족스러웠다.
비슷한 시각. 해일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기자들에게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비켜 달라고 말해도, 몸으로 밀어붙이려 해도 평소보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질문을 쏟아 냈다.
“권해일 에스퍼! 해당 발언은 공식 입장인 겁니까?”
“재하는 서재하 가이드를 말하는 게 맞습니까?”
“서재윤 에스퍼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관련이 있습니까?”
“한 말씀만 해 주세요!”
비슷한 질문들이 쉼 없이 쏟아졌다. 해일이 던진 마지막 말은 기자들이 절대 놓칠 수 없는 먹음직스러운 떡밥이었다. 이대로는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해일이 멈춰 서자 따라붙던 카메라맨들이 재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기자들 역시 빈틈없이 에워싸기는 했어도 해일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두어 걸음씩 물러났다.
이들이 원하는 말을 해 준다면, 권해성의 앞에서 충동적이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말은 일종의 경고였으며 혹시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를 재하를 향한 다짐이었다.
누구도 믿어 주지 않았지만, 모든 걸 걸고 재하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떠올리며 앞으로 일어날 비난이나 불이익을 받아들일 각오를 다졌다. 그런 해일의 단단해진 마음은 얼굴에도 드러났다.
지금부터 해일이 할 말은 그게 어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지라도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그의 모습은 진중하면서도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질문을 쏟아 내는 대신 마이크를 내민 채 숨죽여 해일의 대답을 기다리는 기자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침묵하던 해일의 입이 드디어 열리는 순간.
“읏차.”
해일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나타난 지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높은 곳에서 떨어진 지호가 걸치고 있던 머플러의 깃털들이 의도적인 연출처럼 흩어져 내리며 기자들의 시야를 가렸다.
“뭐, 뭐야?”
“견지호 에스퍼?”
해일의 어깨에 매달린 지호는 카메라를 향해 가볍게 윙크해 보이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호와 함께 등장했던 깃털이 바닥에 다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실시간으로 방송을 보고 있던 에스퍼 갤러리가 뜨거운 불판이 되어 쉴 새 없이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방금 아이돌이 뉴스 난입한 거 보신 분?]
어그로 맞음. 오늘부터 견지호는 내 마음속의 아이돌에서 만인의 아이돌임.
캡처 1. 캡처 2.
⤷ 미친, 누가 합성했냐.
⤷⤷ 합성 아님. 생방 캡처.
⤷ 철 지난 천사 컨셉 미쳤냐고.
⤷⤷ 컨셉이라뇨. 견지호는 천상계 미모니까 천사 맞고요.
⤷ 해일이랑 투 샷 나만 설렜냐.
⤷⤷ ㅇㅇ
[재하 구하러 갈 파티 모집(2/10000)]
1은 해일 오빠니까 다들 뒤에 붙어요.
⤷ (3/10000)
⤷⤷ 4444 근데 이거 심각한 거 아닌가요? 권해일이 저러는 거 처음 봄.
⤷⤷ (5/10000) 견지호 보고 이벤트인가 진지 빨다 멘붕 중.
⤷⤷ 지호 아이돌 데뷔하는 거 아님? 내 최애 포카 뒤집어 둠 ㅠㅠ
커뮤니티에서는 심각해하기보다는 견지호와 권해일의 외모 찬양과 평소와 달랐던 분위기에 대한 다양한 추측으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다양한 반응과 달리 협회의 분위기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분주하고 무거웠다.
“협회장님, 가이드 부서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게이트 공략을 마친 에스퍼들이 인터뷰에 응해도 되는지…….”
“다들 미쳤나? 다 안 된다고, 기다리라고 전해.”
협회장 권해성의 분노에 비서들이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향했다. 협회장실 밖은 사방에서 오는 연락으로 인해 시끄러웠다. 반면 협회장이 머무는 공간은 소리를 낮춘 여러 개의 화면이 각각의 방송을 보여 주고 있었다. 모두가 이번 일을 숨겨진 음모라도 있는 양 시끄럽게 다뤄 댔다.
권해성은 개인 핸드폰까지 벨이 울리기 시작하자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생아 새끼가 기어코 일을 치는구나.”
분노로 끓어오르는 화를 꾸역꾸역 누르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권해성의 목소리가 호탕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차관님.”
― 허허, 어쩐 일이라니요.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짜증스럽다는 듯 책상을 두드리면서도 권해성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섭섭지 않게 접대해 드린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 제가 그리도 보내 달라 요청했던 가이드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듣게 되니 착잡해서 말입니다.
저열한 요구를 여러 번 거절했더니 대놓고 빈정거리며 연락해 온 상대의 의도가 뻔히 보여 권해성은 이가 갈렸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공존에 대한 중요성을 알렸음에도 교류를 핑계로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상대의 속셈이 불쾌했다. 처음에는 자신 역시 쉽게 내주고 빚을 지워 두거나 신생 길드를 견제하는 법안에 손을 더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려 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었지만, 납치가 의심됐던 견지호가 갑자기 나타나 권해일을 데리고 사라진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서재윤은 연락이 되지 않고, 주도준은 서재하와 함께 납치됐으니 주요 인력이 전부 자리를 비운 비상사태였다.
주변에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때를 놓치지 않고 대성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뜯어먹으려 달려들 하이에나가 널려 있었다.
권해성은 애써 웃음으로 불안을 감추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많아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 살을 깎아 내주어야 할지 모르나 지금은 아군의 숫자를 늘려야 할 때였다.
“긴밀하게 부탁드릴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그야 협회장 하기 나름이지요.
“그럼요. 그럼 오늘 저녁에라도 자리를 마련할 테니 뵙도록 하지요.”
권해성은 상대가 내민 독이 든 잔을 서슴없이 받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발목을 조여 오는 불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금 핸드폰 벨이 울려 댔다. 이번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곳에서 온 전화였기에 권해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웃는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러야 했다.
협회장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연락에 시달릴 때, 안 그래도 권해일의 폭탄 발언에 긴장 상태였던 빌런들 역시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권해일이 사라졌어.”
“저거…… 공간 이동으로 여기 오고 있는 거 아냐?”
“미, 미친! 보스한테 보고해!”
권해일이 무슨 말을 할지 초조해하며 방송에 집중하던 이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채널을 잘못 돌렸나 싶을 만큼 화사한 분위기의 견지호가 나타나 깃털을 뿌리고 권해일과 함께 사라졌을 때만 해도 몇몇은 사태 파악을 못 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협회의 개에 이어 협회의 아이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그러나 그런 비웃음은 뒤늦은 깨달음에 불안으로 뒤바뀌었다.
당장이라도 권해일이 나타나 기지를 불바다로 만들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왕좌왕하는 빌런들 사이에서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한 명이 목소리를 높여 모두를 진정시켰다.
“야, 이 빡대가리들이. 우리가 왜 섬에 틀어박혔는지 까먹었냐?”
“왜였더라?”
“어이구, 멍청한 새끼들. 인식 저하 장치 때문이잖냐. 쟤들은 우리 못 찾아.”
타박하는 소리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빌런들의 허둥거림이 멈췄다.
애초에 게이트로 인해 생겨난 섬이자 무인도에 정착한 건 풍부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낮은 등급이라 위험하지 않은 게이트를 닫지 않고 마나를 끌어와 인식 저하 장치를 쉴 새 없이 가동할 수 있었다. 빌런에겐 최적화된 장소였고, 백마혁이 넘쳐 났던 재산을 퍼부어 기지를 세우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 그 가이드는 어디 갔냐?”
정석적인 말만 해 대던 재미없는 권해일이 자신들을 혼란에 빠트릴 만큼 직접 언급한 가이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파에 있었던 서재하가 진즉 일어나 사라졌음에도 이제야 알아채고 불안해진 이들이 무작정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