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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세상 사람 다 꼬시려는 건가, 해일 형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해일이 방금 한 말의 파급 효과는 강렬했다. 전국의 ‘재하’들이 숨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권해일 에스퍼, 방금 하신 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이는데요.』
『재하라는 건 혹시 서재하 가이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 말씀만 더 해 주세요.』
그 한마디가 가져올 파장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해일은 따라붙는 기자들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혼란스러운 화면 속 상황과 달리 휴게 공간은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조용했다. 재하의 팔을 실컷 주물럭거리던 남자의 손도 슬그머니 떨어졌다.
권해일이 재하를 언급한 순간, 막연한 우월감에 가이드를 쉽게 대하던 이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앞서 납치해 온 가이드나 A급 에스퍼인 유마로는 방송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기 요양을 하러 간 것처럼 가볍게 언급된 게 전부였다. 백마혁은 의리도 없이 비즈니스 관계일 뿐인 협회를 비웃으며 가족 같은 우리를 빌런이라 부른다면 빌런이 되어 주겠노라 당당하게 선언했다.
협회에선 에스퍼와 가이드를 지켜 내지 못한 일을 치부처럼 여겨 숨기는 것이었다. 빌런의 길을 걷는 이들에겐 오히려 기회였다. 또다시 손에 넣게 된 에스퍼와 가이드는 이전보다 더 높은 등급이었기에 써먹기 좋을 거라고만 여겼다.
백마혁과 이영우가 신경 쓰는 재하에 대해서도 기회만 되면 결국 다른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손대기 쉬울 거라 예상했지만 생방송 중 당당하게 선언해 버린 해일의 한마디로 인해 그 예상은 깨어졌다.
긴장으로 침묵하던 에스퍼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 보스에게 알려야 하지 않나?”
“어? 어어. 그래야지.”
“협회의 개 주제에 저러면, 지들 이미지 박살 날 텐데…….”
가이드를 잃었다는 걸 협회의 대표 격인 에스퍼가 스스로 밝혀 버렸다. 책임을 추궁당할 수도 있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만큼 이번에 납치해 온 가이드가 중요하다는 의미로도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는데도 재하는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꽂히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왔던 길을 돌아가는 재하의 당당함이 새삼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다른 가이드랑 다르게 여유롭더라니…… 이유가 있었네.”
“찾으러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봐.”
불안해진 에스퍼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긴 아무도 못 찾는다며?”
“그건 그런데……. 인식 저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이러다 한판 붙는 거 아냐?”
“오라고 해. 내가 다 찌그러트려 버릴 테니까.”
어쩌면 협회와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신경이 해일에게 쏠려 있는 틈에 자리를 피한 재하는 돌아다니는 이 없는 복도를 빠르게 지나 가이드 룸에 도착했다.
여전히 조용했기에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자 쉽게 열렸다. 재하가 안을 살피자 문고리 돌리는 소리만으로도 놀란 가이드들이 벽 쪽으로 붙어 웅크리고 있었다.
“저예요, 서재하 가이드.”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재하가 작은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송서림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며 얼굴을 내밀었다.
“서재하 가이드님?”
“좋은 소식이 있어서 들렀어요. 제가 다가가면 겁먹는 거 같으니 다른 가이드분들에겐 송서림 가이드가 제대로 전해 주세요.”
“네, 네.”
“방송에서 우리를 구하러 올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저, 정말요?”
가이드가 납치됐다는 사실이 일부이긴 하나 방송을 통해 전해졌음을 알렸다.
“그러니까 조금만 버텨 주세요. 저도 최대한 휴식 시간을 늘릴 수 있게 부탁해 볼게요.”
“정말로…… 구하러 오는 걸까요?”
“그럼요. 권해일 에스퍼 알죠? 구하러 온다고 했어요.”
자신에게 한 말이었지만, 납치된 이들과 함께 탈출하는 게 당연했기에 재하는 송서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골라 전달했다. 기쁜 소식임에도 송서림은 믿기지 않는 듯 입술만 달싹이다 말을 삼켰다. 납치된 몇 주 동안 희망을 품었다 버리길 반복해 온 탓이었다.
“믿고 싶은데…… 솔직히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떨군 채 덜덜 떠는 송서림의 손을 꼭 잡아 준 재하는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송서림 가이드, 혹시 유마로 에스퍼 기억해요?”
“당연히 기억하죠. 그분 가이딩 하려고 남아 있던 가이드들이 전부 달려갔던 건데…….”
원망과 걱정이 뒤섞인 송서림의 울먹이는 얼굴에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마로 에스퍼를 제가 가이딩 하고 있어요. 물론 남들 모르게.”
송서림의 습하게 젖어 들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멀찌감치 벽에 붙어 있던 다른 가이드들마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만큼 유마로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에게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유……마로가…… 사…… 살아…… 있어요?”
벽 쪽에 있던 가이드 중 하나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질문해 왔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납치해 가이드와 따로 격리해 두었으니 그 결과는 최악이라 짐작해 왔던 이들이었다.
재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폭주 위험 때문인지 잠재워 놨더라고요.”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가이드들의 눈에 믿음과 안도가 깃들었다. 유마로의 생존 소식에 모든 걸 포기했던 가이드들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완전히 꺼졌던 희망과 이제는 불신밖에 남지 않았던 마음에 작은 빛이 켜진 듯 흐릿하던 눈이 또렷해져 재하에게 향했다.
재하는 그들의 희망을 위해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알렸다.
“원래는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급변할 거 같아요. 구출하러 오면 힘을 보탤 수 있게 유마로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제대로 해 두려고요.”
“탈출……이요?”
“우릴…… 구하러 온……다구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가이드들의 물음에 이어 재하가 붙잡고 있던 송서림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 손을 다시금 꽉 붙잡아 준 재하는 믿음직스러웠던 해일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보였다.
“네. 그러니 여러분들도 푹 쉬어야 해요. 저도 최대한 도울 테니까 같이 나가요.”
납치된 지 얼마 안 돼 사태 파악을 못 한 희망찬 모습일지 모르나 그래서 더 간절히 믿고 싶어졌다. 가이드들이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해 준 후에야 재하는 그들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상냥하던 웃음이 지워진 재하의 얼굴에 단단한 각오가 들어섰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모아 두자.’
누군가와 마주치면 길을 잃었다고 하고 방에 돌아가 유마로를 가이딩 할 계획을 세운 재하는 낯선 길로 들어섰다. 영우가 알려 주지 않은 장소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새로운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재하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쉴 새 없이 내달리던 보트가 바다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보트 위에 서 있는 두 남자 사이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재윤 쪽이었지만, 강광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혼잣말이었다.
“함대에 미사일을 요청하면…… 아니지, 방향을 특정하지 못하는 이상 위험해. 이제라도 협회의 힘을 빌려야 하나. 하지만 빌린다 한들 쓸 만한 게 없을 텐데. 아니면 직접 접근하는 방법을 써야 하나…….”
거침없이 움직이던 재윤이 헤매기 시작한 원인은 반지가 가리키는 방향과 강광의 호기심이 이끄는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반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형을 찾아내던 강광의 감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방향이 달라진 순간 재윤은 보트를 멈추게 하고 고민했다. 혹시나 반지가 이동하고 있다면 또다시 방향이 달라질 수 있어 일단 무작정 기다렸다. 그렇게 상당히 오랜 시간을 바다 위에서 허비했으나 여전히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킬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반지에 마나를 불어 넣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결심한 듯 선장에게로 향했다. 그런 재윤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던 강광은 한참 전부터 촬영 상태였던 핸드폰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표정이 정말 무시무시한데요. 무얼 하려는 걸까요, 서재윤 에스퍼는.”
후시 녹음을 따로 하더라도 현장감이 느껴지는 녹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재윤을 쫓아가는 대신 줌 인을 하면서 발생하는 흔들림조차 긴박함으로 녹여 낼 수 있을 것 같아 강광은 마냥 신이 났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핸드폰을 양손으로 들던 강광의 앞에 갑자기 새하얀 천이 펄럭이며 나타났다.
“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금방이라도 무대에 서도 될 만큼 완벽하게 꾸민 견지호였다.
새하얀 셔츠에 무의미한 하네스까지 착용한 모습은 장기 자랑에서 보던 어설픈 수준이 아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상상도 안 가는 깃털로 만든 머플러까지 두른 모습은 남자가 보기엔 눈살이 찌푸려질 스타일이었지만, 견지호 본체가 워낙 화려해 원래 직업이 아이돌이었나 싶을 만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외모 지상주의, 더러운 세상을 입 안으로 삼키면서도 강광의 눈에 견지호는 좋은 피사체였다. 두리번거리는 지호의 행동조차 배경 음악만 깔아 주면 아이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보기 좋았다. BGM으로 깔면 딱 좋을 만한 곡을 몇 가지 떠올린 강광은 저작권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차피 짧은 시간밖에 넣지 못함을 계산하고는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 놀란 목소리를 꾸며 냈다.
“우와, 견지호 에스퍼 아니세요?”
재윤을 찾아왔다가 강광을 만난 지호는 표정이 굳었지만, 이어진 질문에 머쓱함이 스쳐 갔다.
“그런데 너무 예쁘게 입고 오신 거 아니에요? 어딜 가시려고 이렇게 꾸미신 건가요?”
“이걸 입어야 보내 준다고 해서…… 그보다 서재윤 못 봤어요?”
바다라는 특성 탓에 약간의 오차가 생겼는지 자리를 벗어난 재윤을 찾기 힘들어했다.
선장실에 들어갔던 재윤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곧바로 돌아왔다. 이미 사방이 환함에도 켜져 있던 조명 아래 서 있는 견지호의 화사한 모습에 재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견지호, 너, 납치된 거 아니었나?”
“와, 너무한걸? 알면서 구하러 오지도 않고.”
가볍게 투덜거리는 지호의 모습에서 납치된 사람의 불안감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