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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일과 2세대 에스퍼가 진입한 게이트의 공략은 많은 관심 속에 시작됐다.
“그럼 먼저 입장하겠습니다.”
입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검은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 입구는 불길하게만 보였다. 해일이 워낙 담담하게 먼저 입장해 버린 덕에 2세대 1기 에스퍼는 자연스레 뒤를 따랐고, 2기 에스퍼들은 겁을 먹고 망설이다 떠밀리듯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달라진 공기와 주변 풍경에 저마다 두리번거리며 정신이 없었다.
“여기가…… 게이트?”
“저기 좀 봐. 왼쪽은 사막이고, 오른쪽은 설산이 보여.”
“태양이랑 달이 동시에 떠 있는 게 말이 돼?”
게이트 경험이 없는 2기까지 참여한 터라 여기저기서 감탄과 의문이 튀어나왔다. 게이트 진입과 동시에 방어 자세를 취하고 침묵해야 한다는 기본 규칙은 까맣게 잊은 새내기들다운 반응이었다. 게이트 경험이 있는 1기조차도 상반되는 지형과 날씨가 공존하는 장소에 어리둥절했다.
그들을 집중시킨 건 이미 현장을 빠르게 파악한 해일의 침착한 안내였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지형만 최소 세 군데 이상입니다. 효율을 따지기보다는 안전하게 진행할 테니 교육받은 대로 따라 주시면 됩니다.”
“네!”
힘차게 대답하던 에스퍼들은 해일이 검지를 들어 입술 위에 올리자 멍하니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대화라면 모를까, 배에 힘을 주며 큰 소리를 내는 건 마수를 끌어 들일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다들 교육받았음에도 게이트에 들어와 두려움 반 흥분 반인 상태여서 잊어버린 탓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들 교육받은 것을 떠올리며 손에 무기를 쥐거나 마나 파동 측정기를 꺼내 주변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해일이 걷기 시작하자 모두 따라 움직였다.
극단적인 사막이나 설산보다는 가운데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리라 예상했던 이들은 해일이 몇 걸음 만에 멈추어 서선 꼼짝도 하지 않자 의아해했다. 에스퍼들의 시선에 해일은 담담하게 상황을 알렸다.
“이번 게이트 환경을 보아 금방 끝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일은 마침 게이트 입구가 높은 바위산이라 시야가 확보된 것에 이번 일이 빠르게 끝나리라 예상했다.
“전이 능력자는 앞으로 나와 주세요.”
“네, 넵!”
허둥지둥 앞으로 뛰어나온 에스퍼에게 해일이 숲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디까지 전이시킬 수 있습니까?”
“저, 그게…… 생명체는 안 되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전이 거리를 알려 주십시오.”
“그…… 무게 제한이 있긴 한데요. 배낭처럼 무거운 건 숲 입구 정도까지밖에 안 되고…….”
신입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전이라는 능력을 갖추게 됐을 때만 해도 염동력과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신입은 실제 사용 시 많은 제약이 따르는 능력임을 알고 실망했다. 이번 게이트 공략에도 능력보다는 2기 에스퍼라는 이유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을 찾아 불러낸 해일에게 놀라면서도 자기 능력을 밝히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점점 작아지는 신입의 고백에도 해일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가벼운 건 저기…… 음…… 육안으로 보이는 숲 끝까지 보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전이 능력자의 소심한 답에도 해일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모두가 넋을 놓고 보게 될 만큼 진심으로 웃어 버린 해일이 손에 불길을 일으키며 물었다.
“불의 무게라면 가벼울까요?”
“어…… 네…… 네! 아주 가벼울 거 같아요.”
“그럼 숲의 끝에서 끝까지, 정중앙에 불을 옮겨 주겠습니까?”
“할 수 있어요.”
전이 능력을 갖추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신입에게 시선이 몰렸다. 신입의 장담대로 해일의 불꽃은 숲의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옮겨져 순식간에 숲의 정중앙에 불길을 만들어 냈다.
“바람 능력자, 앞으로.”
“네? 네!”
이번에도 해일의 지시에 따라 어렵지 않게 힘을 사용했다. 애초에 해일의 요구는 단순했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몇 번 해일의 작은 불을 옮기고 바람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불이 숲을 태우며 사막과 설산으로 이동했다. 불길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게 맨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작은 마수들의 이동으로 저렇게 드러나진 않을 터, 유달리 눈이 좋은 에스퍼는 중급 마수가 불길을 피해 빠르게 이동하는 걸 포착했다.
“으으, 저렇게 큰 레드 맨티스는 처음 봐요.”
“사막 쪽은 아마 전갈이나 타란툴라겠죠?”
잠잠한 사막 쪽에서도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모래가 여기저기 들썩이기 시작했다. 망원경을 챙겨 온 에스퍼가 감탄하며 앞에서 지시 중인 해일을 바라봤다.
“효율보다 안전이라고 하시더니. 엄청난 효율이잖아요.”
“이런 식이면 확실히 마수끼리 영역을 침범하게 돼서 싸움이 붙겠어요.”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해일은 게이트 입구 색상이 바뀐 이유와 안의 상황을 미리 알려 주었다. 비슷한 등급의 마수가 셋 이상 존재할 수 있다는 점, 가능하다면 불을 이용한 몰이사냥을 할 계획임을 전해 들었다.
“우와……. 이런 식으로 쉽게 사냥할 수도 있구나.”
“쉬운 게 아니야. 권해일 에스퍼님이 능숙하신 거지.”
해일의 지시대로 적재적소에 불길을 일으켜 적대 관계인 마수를 맞붙이는 방식으로 개체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한 사람당 맡아야 할 마수의 숫자도 부쩍 줄어들었다. 혹여나 불길이나 연기에 에스퍼들이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위치를 확인한 해일이 지시를 내렸다.
“이동하면서 흘러나오는 마수를 하나씩 잡아 보도록 합시다. 팀끼리 움직이되 거리는 유지하세요.”
“네!”
더 이상 소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무기나 방어구를 장착하고 해일을 따라 이동했다. 얼마 가지 않아 방향을 상실한 레드 맨티스 세 마리가 숲의 입구 쪽으로 튀어나왔다.
“1, 2, 3조 앞으로! 나머지는 대기.”
“1조 가자!”
“3조, 흥분하지 말고. 훈련받은 대로 1기 먼저 간다.”
레드 맨티스는 훈련 시 자주 봐 왔던 마수였다. 게이트에서 실전을 경험한 2세대 1기는 망설임 없이 이능을 사용하며 접근했지만, 처음 실물을 접한 2기 대부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 무서워…….”
“괜찮아! 무서우면 거기 있어!”
“4조, 2조에 합류하도록.”
“네!”
해일의 지시에 인원이 부족한 쪽으로 빠르게 에스퍼가 합류했다. 해일의 담담하면서도 빠른 판단은 불안에 떨던 신입 에스퍼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마수와 마주친 것만으로도 겁을 먹어 움직이지 못하던 2기 에스퍼조차 1기 에스퍼를 보며 용기를 냈다.
“저, 동결 사용할게요!”
“고마워. 관절 마디를 노려.”
한심해하지 않고 2기를 독려하는 1기의 모습은 참된 선배처럼 보였다. 2세대 기수들의 바람직한 모습에 해일은 병아리들의 걸음마를 보는 것 같은 답답함과 대견함을 동시에 느꼈다.
주도준이나 견지호와 같은, 안전장치가 되어 줄 에스퍼가 없기에 다른 때에 비해 느렸지만,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빠르게 진행됐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숲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배경으로 해일이 마나 파동 측정기를 내보였다.
“유의미한 마수 반응 없음.”
사막 모래를 뒤집어쓴 에스퍼와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내며 돌아온 에스퍼를 차례대로 살핀 해일이 듣기만 해도 신뢰가 생기는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공략 종료합니다.”
“우와!”
“우리가 해냈다!”
승리의 기쁨으로 모두가 환호한 것도 잠시, 해일은 게이트를 나가지 않고 에스퍼들 앞에 섰다. 마수 토벌이 끝났으니 모두 나가기만 하면 게이트가 닫힐 터. 그런데도 나가지 않는 해일을 보며 모두가 의아해했다.
아직 미숙하지만 의욕이 넘치고, 에스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눈은 열정으로 가득했다. 첫 승리에 기쁨으로 흥분한 몇몇 에스퍼는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누르거나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해일에게 집중했다.
“여러분들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해일은 이들에게서 진심과 미래를 보았기에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게이트를 나가면 전 잠시 협회를 떠나게 될 겁니다.”
해일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모두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디 자신이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해일은 이들 역시 알아야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음을 상기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협회의 설비 점검은 단순 점검이 아닌, 빌런의 테러에 의한 것입니다.”
밝기만 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굳었음에도 여전히 에스퍼의 눈에는 두려움이 아닌 의문과 분노가 서렸다. 게이트에서의 승리가 어리숙하던 신입 에스퍼마저 단단하게 만들었다. 해일은 안심하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전달했다.
* * *
같은 시각.
소년의 재촉에 밖으로 나온 재하는 곧장 돌아가려 했으나 웃으며 다가온 두 명의 남자에게 붙들렸다.
“이야, 소문의 가이드님을 직접 보게 돼서 영광입니다.”
“보스가 따로 챙기는 가이드는 처음 봐서 신기한 거 있죠.”
척 보기에도 재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두 남자는 백마혁의 경고를 떠올리며 꼬박꼬박 존대를 해 왔다. 말로는 존중하는 것같이 굴었으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양쪽에서 재하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는 소파로 이끌었다.
“전 영우 선배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좀만 쉬었다 가지……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일부러 영우의 이름을 언급했지만, 자리에 없는 영우의 이름으로는 두 남자의 팔을 풀 수가 없었다. 거기에 존대가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하게 말을 끄는 남자는 노골적으로 재하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가이드님, 나도 가이딩 좀 해 주지, 요?”
“가이딩은 편안한 상태에서 된다니까요.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어야 하고요.”
재하는 이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설명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영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처럼 달라붙는 경우가 그러했다. 차라리 이들이 힘을 쓰면 반지가 작동할 텐데 애매한 접촉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템을 골랐어야 했나, 늦은 후회를 하던 재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는 안전하게 소멸하였습니다. 전국에 설치된 마나 파동 측정기를 통해 발견된 게이트는 대부분 정리되었으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크, 잘난 놈이 목소리도 죽이네.”
항상 켜져 있는 휴게 공간의 대형 TV에 해일의 잘생긴 얼굴이 가득했다. 게이트 공략을 마치고 나왔음에도 머리카락만 조금 흐트러졌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시선을 더 끌었다.
『마나 측정값을 토대로 예측한 바에 따르면 이번 주에 활성화될 게이트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정확한 계측을 위해 대성에서는 더 많은 기기를 생산, 공급할 예정입니다.』
“또 대성 광고는 빠지질 않지.”
“권해일 하나한테 빨대가 몇 개나 꽂혔는지 불쌍하다, 불쌍해.”
고작 하루 못 본 것뿐인데도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혹시 재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집중하는데 기자들의 질문에도 입을 다물고 있던 해일이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비장한 해일의 분위기는 빌런들조차 집중하게 했다.
방송 사고인가 싶을 정도의 침묵이 흐른 후 무겁게 열린 해일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전파를 통해 전해졌다.
『재하야, 구하러 갈게.』
앞뒤 설명 없는 담백한 말의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