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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운 도준은 오랜만에 익숙함을 느꼈다.
매일 쌓이기만 하는, 도림에 대한 그리움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어나면 도준은 어둠 속에 틀어박히곤 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시시덕거리는 소음과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휴게 공간에 모여 있던 빌런들의 단순 무식한 호기심이 S급 수호자의 강함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구속구를 풀어 줄 수는 없어 이능이 아닌 육체 강도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고, 밤잠도 없는 빌런들의 심심풀이용 린치가 이어졌다.
에스퍼의 신체에 익숙했던 도준은 능숙하게 제대로 맞는 척을 이어 갔지만, 횟수가 늘어 갈수록 고통은 누적되고,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 역시 늘어났다.
눈에 보이는 상처 탓에 새벽이 돼서는 빌런들의 흥미도 떨어졌다. 느지막이 자러 가는 이들이 속출하며 적막 속에 홀로 남겨진 도준은 찬 바닥에 열기를 식히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재하라면 다시 날 찾아오겠지.’
그때 자신의 모습이 비참해 보일수록 효과가 좋을 거라는 걸 알았다.
거구의 남자에게 붙잡히면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던 재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는데도 어떻게든 버텨 낼 각오가 재하에게서 보였다. 설령 끔찍한 일을 당한다 해도 자신을 안심시키고 지키려 했다.
가장 약하면서 가장 강한 이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며 자신으로 인해 무너졌던 재하가 떠올랐다.
이렇게나 버틸 수 있는 이를 자신이 꺾었다. 불필요한 관계를 요구하면서까지 더없이 소중했던 친구를 제 손에 쥐고 있었다. 동정심과 죄책감을 가진 재하를 가지는 방법을 그때의 자신은 그것밖에 알지 못했다.
자신의 욕심에 망가지지 않은 재하는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였다. 위협에서 쉽게 벗어났을뿐더러 밤새 자신에게 린치를 가할 정도로 흥미와 재미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이딩을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자신이 듣기에는 속임수가 섞인 이야기였는데 재하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런 곳에 있는 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직하고 순해 보이는 소년을 붙잡아 가이딩을 시현하는 재하를 보며 더욱 확신했다.
누군가 재하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하고 있다는 걸.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는 재하는 납치돼서도 두려움을 이겨 내고 그답게 행동했다. 좀 더 비참한 상황에서의 재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그를 중심으로 여왕벌을 모시는 말벌 같은 꼴이다. 언제든 꿀벌의 여왕 따위 손쉽게 목을 딸 수 있으면서도 기회를 노리며 얌전한 척 모여든 꼴이 가관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빌런 조직의 수장, 백마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부드럽기까지 해 더욱 놀라웠다.
“빠른 시일 안에 나를 좋아하도록 해, 서재하 군.”
보지 않아도 선명한 호의였다.
“……아저씨, 저한테 왜 이러세요.”
“푸훗.”
거기에 즉답하는 재하의 얼빠진 반응에 도준은 잠든 척하는 것도 잊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감옥 안에 있는 도준의 작은 웃음은 바깥까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백마혁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다. 철없어 보이는 재하에게 맞춰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고작 가이드 하나에 에스퍼들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맞추려는 태도가 우습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 역시 재하의 관심을 끌고 관계를 깊게 만들기 위해 빌런의 손을 빌려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끝까지 재하 옆에 붙어 있을 줄 알았던 백마혁이 적당히 물러섰는지 익숙한 기척이 문 앞에서 느껴졌다.
“빨리, 빨리 열어 줘.”
“네, 네.”
창문 안으로 누워 있는 자신을 본 재하가 문지기인 소년에게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눈을 감은 도준의 얼굴 위로 재하의 손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이게 다 뭐야. 도준아, 눈 좀 떠 봐.”
바깥에서 들려오던 당당한 목소리의 재하는 도준을 보자 덜덜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굳이 의식이 없는 척을 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도준은 느릿하게 눈을 떠 재하를 쳐다봤다. 울상이던 재하의 얼굴이 안도로 펴지며 그가 도준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 댔다.
“얼마나 맞은 거야? 일어날 수 있어?”
“괜찮아, 재하야.”
아니라는 말 대신 괜찮다며 웃자 딱지 앉은 입술이 터지며 피가 비쳤다. 화들짝 놀란 재하가 셔츠를 끌어 올려 상처를 눌렀다.
“기다려 봐. 약 달라고 해 볼게.”
“그러지 않아도 돼.”
부러 도준이 힘을 빼고 말하자 재하의 표정이 굳으며 목소리마저 낮아졌다.
“정신 차려, 주도준.”
울거나 떨 거라 예상했던 재하의 단호함에 도준은 그가 일으키는 대로 몸을 세웠다. 재하는 발자국이 선명한 도준의 옷을 끌어 올려 멍든 몸을 확인하고 여기저기 누르며 도준의 반응을 살폈다. 힘들어해도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이는 도준을 보며 재하는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다른 반지들을 꺼냈다. 그러고는 도준의 손에 반지들을 쥐여 주며 작게 속삭였다.
“이거, 개떡 같은 아이템이긴 한데, 계속 너한테 해코지할 거 같아서 가져왔어.”
“이게 뭔데?”
“감각 둔화랑 외부 충격 시 일정 확률로 체력 회복 효과.”
던전이나 게이트 입장 시 필요 없는 효능이었다. 사냥을 위해서는 감각이 예민해야 했다. 충격을 받아야만 랜덤하게 터지는 힐을 위해 감각 둔화라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이딴 쓰레기템은 주워 올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직 초창기인 게이트와 던전에서 발생하는 모든 아이템을 알뜰하게 모았고, 영우는 그중에서 분류와 관계없이 가벼워 보이는 것은 죄다 재하에게 가져왔다. 그 덕에 재하는 도준이 쓰기에 적당해 보이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준은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반지를 보곤 재하를 다시 쳐다봤다.
“두 갠데?”
“다른 건 랜덤 이능. 그런데 잡아먹는 마나가 상당해서 고등급은 돼야 쓸 수 있대. 태그 끝에 보니까 B급이 한 번에 마나가 다 털려서 폭주 직전까지 갔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고 쓰여 있더라.”
남이 보면 뭐 이딴 걸 가져왔냐 할 만한 이상한 아이템이었지만, 사라져도 찾지 않을 만한 아이템이면서 도준이라면 쓸 수 있는 것으로 골라 왔다. 마나가 막혀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지를 통해서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온 것이었다.
도준은 재하가 가져온 반지를 손안에 쥔 채 신기함을 느꼈다. 다친 자신을 보면 마음 아파하면서도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 가져왔다. 실제로 도준이 구속구를 풀 수 없는 상황이라면 두 아이템 모두 어떤 식으로든 유용했다.
재하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뱀 반지도 주고 싶었지만, 도준을 쉽게 건드리는 빌런의 행동 탓에 그들이 돌이라도 됐다가는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수 있었다.
재하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에 도준이 덤덤하게 물었다.
“어디서 났어?”
“영우 선배가 잔뜩 가져온 것 중에서 적당히 집어 온 거야. 더 챙겨 올 테니까 일단 두 개만 가지고 있어.”
“도로 가져가. 아이템 없어졌다고 너한테 뭐라고 하면 어떡해.”
“도준아.”
재하는 자신을 챙기는 도준의 말에 다시 단호해진 얼굴로 변했다. 도준의 어깨를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붙잡은 재하가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것 같은 얼굴을 버텨 내며 어제부터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늦어지면 도림이가 걱정할 거야.”
재하가 꺼낸 동생의 이름에 도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속해서 예전의 재하를 떠올리며 도림의 죽음을 상기하면서도 현재 살아 있는 도림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던 도준이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지. 너라면 기회가 생겼을 때 방어 막을 써서 도망칠 수 있을 거야.”
도준을 먼저 탈출시키려는 재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계속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가서 해일 형이랑 재윤이 데려와 줘. 더 많이 데려오면 좋고. 화력으로 팡팡 터트리고 가이드랑 유마로도 구해야 해.”
탕탕.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재하가 힐끗 뒤를 돌아봤다.
“무사한지 보기만 한다고 하셨잖아요.”
문지기인 소년의 부름에 재하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도준이가 많이 다쳤어. 약을 받을 수 없을까?”
“그건…… 에스퍼는 그 정도 다쳐도 괜찮아요. 빨리 나오세요.”
소년은 우물우물하면서도 안 된다며 재하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면서도 재하는 멍한 도준을 다독였다.
“또 핑계 만들어서 올게. 그 전에 탈출하면 더 좋고. 넌 S급이니까 반지를 쓸 수만 있으면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잠시 망설이던 재하가 멀쩡한 도준의 손등을 빠르게 두드렸다. 이 정도를 외부 충격으로 인식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매서운 재하의 손등 치기 덕에 도준이 고개를 들었다. 다소 놀란 도준의 표정에 재하도 놀랐다가 환한 웃음을 보였다.
“효과 있어?”
“어. 거의 아무 느낌도 안 나는 데다가 방금 약한 힐이 들어온 것 같아.”
당장 눈에 띄게 회복은 안 돼도 버프를 받아 회복 속도가 올라갔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끼지 않고 손에 쥐고 있어도 효과가 있구나. 다행이야.”
“가이드님!”
소년의 부름에 재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도준을 돌보지 못해 미안하면서도 급하게 고른 것치고는 쓸 만한 아이템을 건넸구나 싶어 뿌듯해졌다.
도준은 재하가 떠나는데도 혼란스러워 아무 반응도 못 하고 있었다. 재하에게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너와 함께가 아니면 탈출하지 않을 거라 말해 두어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여겼던 동생, 도림의 존재가 분명 머릿속에 있고 떠올릴 수 있는데도 살아 있는 도림을 향한 걱정이나 불안이 없었다. 다시 만나 끌어안고 행복했던 감각은 선명한데도 이곳에 있는 내내 현실의 도림을 다시 만나기 위한 초조함이나 동생이 울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재하에게 어떻게 해야 유용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지 궁리하던 중 이렇게나 철저하게 양분된 감정을 깨달은 도준은 이상함을 넘어선 불안을 느꼈다. 그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 손안의 반지가 손바닥에 박혀 들며 미약한 통증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