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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부리로 쪼듯 가볍던 키스가 갑자기 격렬해지자 재하의 머릿속엔 의문들이 날뛰었다.
공부밖에 모를 것 같던 영우의 능숙한 키스도 놀라웠지만,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쳤다는 게 재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영우는 자신에게 편중된 다정함을 보이기는 했어도 장난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빌런 조직에 속하면서 영우가 더 여유가 생긴 건가, 그렇다면 그 점이 이곳을 탈출하는 데 있어 긍정적인 신호일까.
재하의 머리가 바삐 굴러가는 사이, 영우와의 접촉이 긴밀해지며 가이딩 속도가 빨라졌다.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인 영우의 키스가 좀 더 농밀하게 변했다. 그제야 재하는 잡히지 않은 팔을 영우와 자신의 사이에 끼워 필사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냈다.
“선, 배. 그만요.”
힘없는 가이드의 불만 따위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 있음에도 영우는 젖은 입술을 가볍게 핥아 주곤 고개를 들었다. 산뜻하게 재하의 손을 끌어와 반지 아이템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 아무 반응도 없구나.”
“무효화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럼 이번엔 무효화 템을 빼고 해 보자.”
담백한 말투로 뻔뻔한 제안을 하는 영우의 행동에 재하는 어이가 없어 입만 벙끗거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냥 하나만 낄게요.”
잠시만 방심해도 금세 들이대는 영우의 행동에 재하는 빠르게 머리맡에 놓인 반지를 찾아 손가락에 꼈다.
“상해를 입힌 상대방의 일부가 돌이 된다던 게 이 뱀 반지였죠?”
“그 반지로 입술부터 딱딱해지는지 테스트해 보려고?”
“네? 입술로 무슨 상해를 입히려고요?”
“그거야…….”
입꼬리를 올리며 만들어 낸 환한 웃음은 대학 홍보용 포스터로 찍어도 될 만큼 청량했다.
“가볍게 깨물어 줄까?”
그러나 다정하게 이어진 영우의 뻔뻔한 제안이 재하를 낯 뜨겁게 만들었다.
“아니, 굳이 왜 입으로 확인하려는 거냐고요!”
“그러게. 이상하게 계속 입술만 보여서 눈을 뗄 수가 없는걸.”
바람둥이 견지호도 아니고, 볼 때마다 매번 손을 잡아 달라던 영우답지 않은 접촉이었다. 어쩌면 에스퍼이기에 가이드를 향한 본능일지도 몰랐다.
해일 역시 데이트가 끝날 때쯤 키스를 했던 건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차례대로 떠올리다 보니 대체 몇 명의 남자와 키스를 한 건지 현타가 올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남자와 입을 맞추는 것에 거부감이 들지 않게 된 건 몇 번을 경험해도 당황스러웠다. 언제 이렇게나 익숙해져 버린 건지 민망하기까지 했다.
“재하가 집중을 못 하네? 내 노력이 부족했나 봐.”
“그게 아니라…… 선배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영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재하를 들여다봤다. 동요 없이 차분하기만 한 영우의 눈을 본 재하는 열이 올라 버린 자신과 다름을 깨달았다.
영우는 자신에게만 무르게 굴었다. 반대로 본인과 상관없는 사람을 대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잔인했다. 영우의 본성은 일반적인 감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가벽 너머에 실험 대상이 된 유마로가 잠들어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납치한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해 왔다는 사실을 자신이 알 수 있는 환경에 방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한발 양보하고 곁에 두려 했다. 장난을 치더라도 요구한 아이템을 가져다주었고, 사흘은 안 되더라도 이틀이나마 납치해 온 가이드들에게 휴식을 보장해 주었다. 영우가 자신에게나마 무르게 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탈출의 기회를 잡기 쉬워질 수 있었다.
재하는 영우가 행한 악행을 애써 머리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가까운 곳에서 빤히 쳐다보는 영우로 인한 민망함을 털어 내며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선배는 항상 손을 잡아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키스를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내 생각을 한 거였구나. 기뻐, 재하야.”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영우를 생각하지 않기가 더 힘든데도 그는 자신이 보이는 관심이라면 모조리 챙기려 들었다.
한결 더 기분 좋아진 영우가 셔츠 안에 있어 보이지 않았던 긴 목걸이를 끌어 올렸다. 끝에 달린 얇은 깃털은 솜사탕처럼 보송보송했다. 그걸 재하의 목에 걸어 주고는 손톱만 한 작은 검은 알갱이를 재하의 손등에 눌러 비벼 댔다.
“선배?”
“내가 만든 검은 구슬은 크기와 색상으로 폭발력을 구분하거든. 이렇게 작은 건 따끔한 정도긴 한데…… 이거 보렴. 무효화돼서 아무 반응도 없지?”
그제야 재하는 목에 걸린 솜사탕 같던 깃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검은색으로 물든 깃털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아이템이 가진 능력뿐만 아니라 이능마저 흡수해 무효화시킬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면 버티지 못하고 파괴된다고 해. 대신 몇 초 정도 모든 피해에 면역을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
“몇 초라도 굉장한 거 아니에요?”
“글쎄.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버텨 내는지 실험해 볼 수도 없는 일회성 물건인걸.”
재하가 보기엔 구하기 힘들면서도 유용한 효과가 있는 특별한 아이템이건만, 영우는 실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어했다.
영우의 기준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재하에게서 발견한 호의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실험 가능 여부에 따라 보물도 하찮게 여겼다. 그런 영우였기에 구하기 힘든 아이템인데도 재하에게 넘겨주기도 하고, 부주의하게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선배, 그러지 마요. 이런 템은 구하기 힘들 텐데 아껴 줘야죠.”
“또 구하면 되지.”
“여기 메모 좀 보세요. 불사조의 알껍데기로 만들어진 깃털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알껍데기로 무슨 깃털을 만들어…… 어?”
영우의 무신경함 덕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태그를 살펴보게 된 재하가 깃털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였다.
“아이템 등급이…… S급 추정? 완전 미친 템이잖아요!”
“추정일 뿐이야. 여차하면 무용지물이 되는데, A급도 안 될걸.”
시큰둥한 영우의 반응에도 태그를 읽어 내리는 재하의 눈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A급 게이트 / 불사조의 알 파괴 조건 / 클리어 보상
“A급 게이트에서 S급 아이템이 나온 거잖아요. 밸런스 파괴 수준이라 흔한 경우가 아닌데 어떻게 또 구해요?”
상시 열려 있는 던전도 아니고, 게이트는 클리어 하면 닫혀 버렸다. 같은 아이템을 구하려면 같은 종류의 마수가 나오는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불사조가 나온다는 것도 신기한데 알까지 발견하려면 더 힘든 게 아닐까.
재하의 의문에 영우는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내 특기가 있잖니.”
재하가 아는 영우의 능력은 폭발과 게이트를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을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가정은 단순히 게이트를 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설마…….”
생글거리는 영우의 얼굴을 보며 재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클리어 한 게이트를 선배가 다시 열 수 있어요?”
“재하는 바로 아는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이트가 소멸하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걸 영우가 다시 열 수 있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나 영우는 허언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여기 사람들은 너무 멍청해서 이렇게 말해선 알아채질 못해.”
멍청해서가 아니라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재하는 영우가 협회에 몰래 들어왔던 날, 통제 구역 문을 통과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거기에 대격변의 날, 허공의 검은 균열 틈으로 손을 집어넣던 행동까지 기억해 낸 재하는 영우가 가진 능력의 특이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하의 눈에 깃든 이해에 영우의 웃음이 더없이 환해졌다.
“얼마나 답답하던지 탈주해 버릴까 했는데……. 재하 네가 와 줘서 기뻐.”
납치당한 것이었지만, 영우에게 중요한 건 재하가 자신을 이해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이었다. 재하를 끌어안으려는데 뾰족해진 목걸이가 방해되자 영우는 반지 하나를 손에 꼈다.
“재하야, 한 대 때려 봐.”
“무효화 아이템은 저한테 있는데요?”
“그 아이템, 공격을 흡수하면서 변하는 거라 다른 걸로 바꿔 줄게.”
영우의 말은 알아들었어도 차마 손이 나가질 않았다. 재하가 망설이자 영우가 손목을 잡아 제 뺨을 때리게 했다.
“선배!”
“아, 바로 바뀌는구나. 반응 속도가 상당히 빨라.”
영우의 시선이 닿은 가슴 위로 고개를 숙이자 검은색이었던 깃털이 투명하게 변했다. 손을 대 보니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게 유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얼음으로 변할 줄 알았더니 속성 변환인가…….”
영우의 호기심이 재하에게서 무효화 아이템으로 넘어갔다. 언제 파괴될지 몰라 실험도 못 해서 지니고만 다녔던 아이템이었기에 호기심을 참기 힘들었다.
과제를 할 때 영우의 집중력은 옆에서 격투 게임을 하며 소리를 질러도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굉장했다. 재하가 슬그머니 목걸이를 빼서 영우의 손에 올려놓고 옆으로 몸을 비켰다.
영우는 몇몇 개의 공격용 아이템을 가지고 밖으로 향했다. 방에서도 연구는 할 수 있지만, 좀 더 확실한 실험을 위해 연구실에 가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연구에 정신이 팔려 자리를 뜬 영우 덕에 재하에게는 기회가 생겼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아이템을 빠르게 솎아 냈다.
“뭐가 이렇게 많아?”
협회에 있을 때는 선별된 아이템만 볼 수 있었다. 게이트에 다녀오면 어느 정도의 아이템이 쌓이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침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아이템이 놀라웠다.
‘여기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면서 이걸 다 어떻게 모았지?’
영우가 가져온 것은 액세서리 형태뿐인 데다 일부일 텐데도 그 양이 상당했다. 백수 날건달처럼 보이던 빌런들이 이 많은 아이템을 모을 정도로 다양한 게이트를 접해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겉보기와 달리 실력이 대단할지도 모르겠다.
재윤이나 해일과 연락이 된다면 알려 줘야 할 내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으며 골라 둔 아이템을 챙겨 일어섰다. 새로운 실험에 정신이 팔린 영우가 닫지 않고 가 버린 덕에 열린 문 사이로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도준이한테 가야 해.’
아이템이 없었다면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빌런들이 있을 공간에 홀로 발을 내딛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하는 손에 든 반지를 꼭 쥐며 어제 왔던 길을 되짚어 감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