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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르륵. 챠라락. 톡. 토독.
자잘한 물건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거슬린 재하는 아직 잠이 부족함에도 억지로 눈을 떴다.
“재하 깼니?”
재하의 눈이 반도 안 떠졌는데 반갑게 아는 척해 오는 영우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영우를 앞에 두고 잘 수 없어 몸을 일으키던 재하는 침대 구석에 쌓여 있는 반짝이는 물건들을 보고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 사이 천 주머니에서 한 움큼 꺼낸 장신구가 더 얹어졌다.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했잖니. 재하는 허약한 가이드니까 가볍게 착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 종류로만 가져왔어.”
그렇게 말한 영우가 아예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자 재하가 일어나며 생긴 공간까지 아이템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반짝반짝한 보석이 박힌 화려한 장신구가 자신에게로 굴러오는데도 재하는 차마 엄두가 안 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봐.”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럼 내가 골라 줄게.”
영우는 망설임 없이 화려한 아이템을 손으로 이리저리 헤치더니 여러 개를 빼냈다. 손가락만 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는 정말 아니다 싶어 재하가 몸을 뒤로 물리자 영우가 아쉬워했다.
“이 목걸이는 시동어만 말하면 주변을 모조리 태울 수 있어. 권해일인가 하는 에스퍼가 없어도 불을 쓸 수 있단다.”
“아뇨, 전 그냥 보호 기능만 좀 있으면 되는데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잖니.”
눈뜨자마자 영우의 논리를 이겨 먹으려 하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영우가 내민 아이템을 마구잡이로 착용하자니 이 또한 불안했다.
“주변을 모조리 태운다는 건 제가 무서워서 거절할게요.”
“하긴. 사용자가 화상을 입을 수도 있겠구나.”
“안전한 걸로 골라 주시면 안 돼요?”
“안전한 건 좀 약한데. 음…… 이거랑 이거. 이것도 넣고. 흐음.”
아이템을 뒤적이던 영우가 색이 다른 반지를 여러 개 집어냈다. 크기를 보고 안심한 재하와 달리 영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반지에 달린 꼬리표를 확인했다.
“파란 건 보석 쪽을 향하게 하고 마나를 쓰면 대상이 얼어붙어. 하지만 재하는 마나를 다룰 수 없으니까…… 반지에 담긴 마나로만 쓰면 두세 번 정도 쓸 수 있을 거야. 시동어는 반지를 끼고 직접 말하면 돼.”
영우는 계속해서 공격형 반지를 집어 재하의 손에 올려 주었다.
“뱀 모양 반지는 메두사 반지라고, 반지를 대고 사용하면 해당 부위를 굳힐 수 있어. 사람에 따라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유지돼. 돌이 된 부위가 깨지면 복원이 안 되고.”
“저, 가이딩 하려면 손잡아야 하는데 이런 걸 끼고는 못 해요.”
재하가 계속해서 거절하자 영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지를 직접 끼워 주었다.
“네게 접근하는 놈들에게 쓰는 건데 상대가 다칠 걸 왜 신경 쓰니? 돌이 되든 얼음이 되든 무슨 상관이야.”
영우의 핀잔에 재하는 손가락마다 끼워지는 반지에 달린 태그를 하나씩 확인했다. 영우의 설명보다 더 과격한 정보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태그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재하의 모습에 영우가 손을 잡아 왔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가이딩에 한결 상냥해진 영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설득해 왔다.
“재하야, 여기엔 미친놈들이 많단다.”
상냥한 목소리가 그렇지 못한 이야기를 전해 왔다.
“널 노리는 짐승의 심장을 손에 쥐는 것까지 보여 줬는데도…… 또 덤벼들었다지?”
영우는 재하가 자는 동안 전날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아냈다. 실험만 하고 급하게 움직이느라 하얀 가운에 정체불명의 검붉은 액체가 묻은 영우의 질문에 다들 술술 답을 내놓았다. 개중에는 영우를 이용해 경쟁자를 처치하고 싶어 하는 이의 사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이 내놓은 답은 한결같았다. 영우의 경고에도 여럿이 재하를 취하려고 했고, 함께 잡혀 온 수호자가 그를 지키려 했다.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리고 재하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재하는 자신을 노리던 에스퍼가 죽는 것도, 시체도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빌런들을 상대로 가이딩에 관해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널 덮치려 했던 대머리는 따로 경고해 두긴 했지만, 또 찝쩍댈지도 몰라.”
재하가 잠들어 있는 동안 영우는 거구의 스킨헤드를 찾아가 자고 있던 남자의 눈을 손에 넣었다. 남자다운 척은 그렇게 해 대더니 안구가 사라진 것에 대한 공포와 고통 탓에 이능도 사용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손을 휘저어 댔다. 그 탓에 뺨에 상처가 생겼지만, 덕분에 재하가 걱정해 줬기에 이득이기는 했다.
“사용법만 숙지하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거절할 거니?”
납치당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으면서도 재하는 여전히 타인을 해치는 일에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평화로운 시절의 감각대로 살 수는 없었다. 꺼림칙하다면 게임을 하던 때의 감각을 떠올려서라도 적응해야 했다.
“아이템끼리 상성은 괜찮아요? 정말로 반지를 열 개 끼면 열 개 다 사용할 수 있나요?”
“그런 짓은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사용 제한이 있는 게 아닌 걸로 시험해 볼까?”
“잠시만요. 먼저 설명서 좀 읽어 볼게요.”
게임 시작 전 공략집을 살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재하는 반지마다 달린 종이 태그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무의식중에 사용되는 아이템도 있었지만, 대부분 시동어를 설정해 두거나 직접 상대와 닿는 식의 제약이 있었다. 세트 표시가 된 아이템과 성질이 충돌되어 무효화되는 아이템을 확인한 재하는 쓱쓱 손으로 밀어 구분을 지었다.
“이쪽이 공격 반사, 이쪽은 시동어 사용템이에요. 양쪽으로 나눠 끼고 사용해 보시겠어요?”
착용자가 충격을 받을 시 대상을 향해 공격이 나가는 자동 공격 아이템을 손에 든 영우는 자기 손이 아닌 재하의 손가락에 하나하나 끼워 주었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재하가 잠깐 방심한 틈에 엄지를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에 전부 아이템이 끼워져 있었다.
“선배?”
“공격 반사인데 내가 끼면 네가 다치잖니. 내가 널 공격하는 게 안전하지.”
“그런 게 아니라 선배가 가져가서 테스트를…… 으억!”
재하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영우의 손에 의해 침대로 쓰러졌다. 예상 못 한 영우의 행동에 재하는 놀랐지만, 반지 중 어떤 것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공격으로 인식을 못 하는 걸까?”
“아이템끼리 방해하는 걸 수도 있고요.”
“아니면 역시 위협으로 느끼지를 못한 게 문제일지도.”
재하의 양팔을 한 손으로 잡아 누른 영우가 생긋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위험을 감지한 재하의 눈이 흔들리자 영우가 미리 경고했다.
“재하야, 빨리 싫어하렴.”
“……네?”
“남자끼리 키스하는 거 싫잖니. 아무리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해도 그런 건 별로잖아. 그치?”
“갑자기 키스요?”
담백한 영우의 웃음에 어울리지 않는 키스 선언이었다. 어리둥절한 사이 거리낌 없이 영우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재하는 필사적으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넵, 싫어요. 싫슴다. 진짜루요. 정말 싫어요.”
속사포처럼 빠르게 내뱉은 말에 영우의 시선이 아무 반응 없는 아이템으로 향했다.
“흐음…… 역시 재하는 내가 너무 좋은가 봐. 아이템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져.”
영우의 손가락이 반지를 낀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문지르듯 겹치자 재하는 간지러움을 넘어서 섬뜩했다.
“저기, 선배. 진짜로 지금 저 소름 돋았거든요. 차라리 한 대 치세요. 공격 반사면 그게 더 확실하잖아요.”
“아이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재하가 다칠 텐데……. 물론 재하가 다치면 치료해 주고 싶긴 해. 하지만 난 사람 패는 취미는 없단다.”
신체 일부를 손에 넣는 무시무시한 취미는 있어도 폭력을 행사하는 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재하는 어떻게든 2차 가이딩과 같은 행위를 피하고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가위바위보 손목 때리기로 할래요? 그건 게임이니까 패는 건 아니잖아요.”
“가위바위보 항상 지는데.”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답하는 영우가 지나치게 똘똘해 보여 헛웃음이 났다. 그런 재하를 빤히 보던 영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더니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거의 느낌도 안 날 정도로 짧은 뽀뽀였음에도 정말로 영우가 이런 짓을 할 줄 몰랐던 재하는 그대로 굳어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영우는 재하의 손에서 반지 한 개를 빼내고 다시 입을 맞췄다.
쪽.
이번에는 첫 번째보다 조금 더 입술 위에 머물렀다 떨어지며 가벼운 소리가 났다.
“아직 아이템끼리 간섭이 있는 거려나?”
재하의 손에서 또 다른 반지를 빼낸 영우의 얼굴이 다시 재하에게 가까워졌다. 굳어 있던 재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대로 따라와 입술이 겹쳤다. 까슬까슬하게 스쳐 온 입술의 감촉과 달리 꾹 눌러 오는 부드러운 질감에 재하는 이 모든 게 아이템 테스트라는 걸 떠올리며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자신의 생각대로 고개를 든 영우에게선 이렇다 할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를 더 빼내며 다시 얼굴을 가까이 한 영우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어 불안해졌다.
“저, 저기, 이걸로는 안 될 거 같은데요.”
“하긴. 이 정도는 벌칙 게임으로도 종종 하는 거니까.”
재하는 금시초문인 벌칙 게임을 들먹인 영우는 이제 반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재하의 손가락에 다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선배, 아이템 설명에 위협을 느끼거나 충격이 있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거든요. 그리고 진짜로 얼거나 돌이 되면 어쩌려고 선배가 직접 해요?”
“날 걱정하는 거니? 그런 거라면 괜찮아. 무효화 아이템을 가지고 있거든.”
웃는 얼굴로 다시 다가오던 영우의 말에서 재하는 모순을 발견했다. 무효화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영우가 아이템 테스트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선배, 제가 오류를 발견한 것 같아요.”
“오류?”
“무효화 아이템보다 낮은 등급의 아이템은 능력이 통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이런 식의 테스트는 무의미한 거…… 선배, 왜 웃어요?”
재하의 다급한 설명을 영우는 웃으며 듣고 있었다.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재하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영우의 입술이 다시 겹쳐 왔다. 이번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깊은 접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