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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을 끊은 재윤이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광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척을 했다. 어설프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강광의 작위적인 반응에 재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고 있어요?”
“목소리랑 표정이 완전 달라서 좀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해일과 통신을 하는 동안 재윤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점차 차갑게 굳어 갔다. 강광은 통신기로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었기에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권해일 에스퍼가 서재윤 에스퍼를 많이 의지하는 거 같은데…… 권해일 에스퍼한테 왜 그래요? 그동안 둘이 되게 친해 보였는데.”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재윤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간 것처럼 감정이 식어 가는 것 역시 강광의 눈에 보였다. 핸드폰에 영상으로 담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지만,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재윤은 강광의 질문에 답할 이유가 없었기에 무시했다.
해일에게 통신이 왔을 때도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연락하리라 예상했었다. 자신은 해일에게 이런 모습을 바랐던 게 맞았다. 위기 상황에 협회의 도움을 받기 위해 둘 중 하나는 남아 있어야 했다.
“……알 게 뭐야.”
모든 대비와 선택은 어디까지나 형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조금이나마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당장 형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필요에 의해서라 할지라도 가족 외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현실에 재윤은 다 지긋지긋해졌다.
“이제 됐어…….”
“어? 그걸 왜 풀어요?”
통신기를 풀어 내 버리는 재윤의 행동에 강광이 당황하며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설마 나, 여기서 처리되는 거 아니지……요? 난 일반인이고 그쪽은 에스펀데 설마 힘으로 다 뒤집어엎진 않겠죠?”
분위기를 풀려는 건지 자극하려는 건지 애매한 강광의 노력에도 재윤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통신기를 본 강광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강광이 입을 다물자 들려오는 건 배가 나가며 만들어 내는 일정한 소음뿐이었다.
시커먼 바다를 향해 선 재윤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속내를 꾹꾹 눌러 삭였다.
‘신경 쓰지 마. 형을 구하지 못하면 다 의미 없는 짓이야.’
미동도 없이 어둠을 바라보는 재윤의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 * *
가이드가 된 이후 재하에게 밤샘이나 불면증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면 시간이 길어져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납치되어서까지 가이딩을 하느라 어김없이 늦잠을 자던 재하는 다투는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몽롱한 머리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고개를 들다 포근하게 감싸 오는 도톰한 담요의 감촉에 저항 없이 끌려갔다.
“이런. 보스 때문에 재하가 깨 버렸잖아요.”
“그러게, 밖으로 나오랄 때 나왔으면 됐을 거 아니냐.”
“재하 혼자 두면 불안하잖아요. 그나저나 방까지 따라와서 잔소리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잔소리를 하게 만드는 게 누군데. 가이드한테 눈길 좀 줬다고 자는 놈 눈알 수집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
“죽이진 않았잖아요.”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어 눈만 깜박이던 재하는 백발의 중년 남자가 보이는 심상치 않은 존재감에 몸을 움츠렸다. 그런 재하를 담요째로 끌어안은 영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약품 등의 보관을 위해 온도가 서늘하게 유지된 영우의 방이었기에 담요가 주는 포근함은 잠결인 재하를 안정시키는 데 제법 도움이 됐다.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졸리면 더 자렴.”
“으응…….”
영우는 제 품으로 파고드는 재하를 보듬으며 백마혁을 무시했다.
“허, 참. 어이가 없네…….”
백마혁이 보기엔 순한 얼굴을 한 재하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부러 영우가 새벽에 벌인 짓을 언급해 주었는데도 피하기는커녕 달라붙었다. 실상은 잠이 덜 깨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기를 찾아 움직인 것뿐이었다.
“도가 지나치다는 거다.”
협박이 안 되면 설득해야 했기에 백마혁은 한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경고만 해도 될 걸 굳이 상해를 입혀 일을 키우니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지 않으냐.”
“터트리지도 않고 돌려줬잖아요. 힐러한테 가면 금방 나을 거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백마혁은 담요로 둘러싸인 재하가 손을 뻗어 영우의 얼굴을 쓰다듬는 걸 보고 하던 말을 멈췄다. 영우조차도 재하의 행동이 의아했는지 가는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여기…….”
재하의 손이 닿은 뺨에 긴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던 중에 영우의 습격을 받은 에스퍼가 휘두르는 손에 긁힌 자국이었다. 이능을 사용할 생각도 못 하고 바들거리던 볼품없는 인간을 떠올리자 불쾌해 찌푸려지려던 미간이 재하의 손길에 사르르 풀렸다.
“재하야, 나 아파.”
“아파? 아프면 안 되는데…….”
“만져 주면 안 아플 텐데.”
“만지면…… 상처 덧나. 약…… 발라야지…….”
걱정하면서도 점점 느려지는 재하의 말투에서 졸음을 이겨 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거기에 반말을 하는 게 영우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재하의 손을 붙잡고 뺨의 상처에 비벼 대는 영우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만져 줘, 재하야.”
“힐러 일 늘리지 말고 그 정도만 해라.”
지켜보는 것도 짜증스러워 백마혁이 손을 뻗자 영우가 몸을 틀어 피하려 했다. 그러나 몸 쓰는 일에 훨씬 더 익숙한 백마혁의 손이 더 빨랐다. 재빨리 붙잡은 백마혁의 커다란 손에 재하의 손까지 붙잡혔다.
“음?”
백마혁은 재하의 손을 잡자마자 빠르게 이어지는 가이딩에 그대로 멈췄다. 백마혁이 가이딩 중임을 알아챈 영우가 불쾌해하며 재하를 끌어당겼지만,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재하와 손을 겹친 채 가이딩을 빨아들이던 백마혁은 그간 파트너에게 받았던 안식과 전혀 다른 감각에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온몸의 피가 열기를 품으며 손이 아닌 다른 곳까지 닿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가이딩이…… 이런 거였나?”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이렇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에스퍼들이 낮은 등급인 가이드를 상대로 가이딩을 받겠다고 방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래서 다들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였군.”
다른 가이드와도 악수를 해 봤지만, 은은한 바람이 스치다 마는 수준이었다. 빠르게 몸을 순환하는 가이딩 효과를 보이는 건 재하가 처음이었다.
백마혁은 이성적으로 굴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했다. 가이드라는 건 온전히 제 것이 아닌 이상 위험하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한순간이었지만, 최근 얻은 가장 큰 수확인 이영우를 치워 버리고 취하고 싶어질 만큼 소유욕이 치솟았다.
“손 놓으시죠.”
“후우…… 고등급 전담 가이드라더니 어중이떠중이와는 역시 다르군.”
탐내는 눈빛을 감추지 않는 백마혁의 반응에 영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정말이지 이건, 마치 회춘이라도 하는 것 같네.”
“도둑질이에요, 그거.”
“심정은 이해하나 이런 가이드를 독점하려는 건 좋지 않아. 손 좀 잡았다고 그리 경계하면…… 하아…… 이거 참 좋군.”
숨마저 다소 거칠어지는 백마혁의 반응에 영우는 위협을 느꼈다. 백마혁이 가진 이능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대응이 어려웠다. 재하를 품에 안은 채 지켜 내기 위해선 고민할 틈이 없었다.
까득.
영우는 손에 쥔 구슬을 굴려 일부러 소리를 냈다. 이래도 비키지 않는다면 그대로 몸 안에 쑤셔 박을 생각이었다. 영우의 경고를 알아챈 백마혁이 지금까지 보인 반응과 다르게 산뜻하게 손을 뗐다.
“지금은 가이드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으니 다음에 허락받도록 하지.”
영우가 노려보는데도 백마혁은 더 이상 그를 혼낼 수 없었다. 이런 감각을 상시 느끼고 싶어 하고 독점하려는 건 에스퍼에게 본능과도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다 깨서 맹하게만 보이던 재하의 졸음에 취한 얼굴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부드러워 보이는 뺨을 손에 쥐고 발간 입술을 열게 해 한껏 취하고 싶었다.
백마혁의 시선이 탐욕으로 물드는 걸 본 영우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재빨리 한 걸음 떨어져 피한 덕에 영우의 손은 허공을 스쳤다.
“나가세요.”
“오후에는 회의에 참여하는 게 좋을 거다. 이번에 데려온 가이드에 대한 처분도 신중해야 할 것 같으니.”
또 이런 쓸 만한 가이드가 섞여 있다면, 이전처럼 함부로 대하기엔 아까웠다.
영우가 품 안에 꼭꼭 숨기는 재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눈에 담으려 백마혁의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이내 담요 아래로 나온 하얀 발끝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고 눈이 가늘어졌다.
가지고 싶다. 손에 넣고 싶다. 탐욕스럽게 핥아 삼키고 싶었다. 이 모든 감각을 미소 아래 눌러 감추기에 급급했다. 백마혁은 그럴싸한 경고조차 이어 가기 힘들어 영우의 방을 나섰다.
백마혁이 사라진 후에야 영우의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버린 재하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재하야, 가이딩은 마음이 통해야 하는 거 아니었니? 왜 저런 아저씨랑도 가이딩이 되는 걸까?”
그새 도로 잠든 재하에게선 답이 없었다. 영우 역시 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백마혁이 보인 탐욕 탓에 불안해진 마음을 털어 내고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랑 붙어 있어서 그런 거지? 그래서 착각한 거야. 나인 줄 알고 가이딩이 됐던 거지. 그렇지?”
재하의 손을 붙잡아 다친 뺨에 가져다 대니 자연스럽게 가이딩이 이어졌다.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이딩에 영우의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만 더 쌓였는데도 영우는 가장 염원하던 이를 곁에 두어 마냥 행복했다. 잠에 취한 재하가 자신을 다른 이로 착각하고 걱정했다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어나면 제대로 날 봐 줘야 해, 재하야.”
그러지 않으면 조금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