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121화 (121/142)

121

이런 경험은 지금까지 딱 한 번 겪었었다. 유마로와 가이드가 납치되었던 날. 빌런 본거지만큼은 자신의 이능으로도 찾아갈 수 없었다.

“재하 선배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빨리, 윽…….”

이능을 사용하려 한 데다 급격한 감정의 동요로 인해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부작용 반응이 다시 몰려왔다. 지호는 견디기 힘든 울렁거림에 입을 틀어막고 속을 다스리려 애썼다.

“진정해, 지호야. 아직 몸에 약 기운이 남아 있어서 쉬어야 해.”

이희진이 다가와 다시 자리에 눕히는데도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눈앞이 흔들렸다. 다시 몸을 뉘고 숨을 고르자 속은 조금 편안해졌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재하를 두고 나왔을 때만 해도 주도준이 함께 있었다.

“대체 왜…… 주도준이 있는데도 못 지켜 낸 거야…….”

원망이 가득 담긴 지호의 우울한 목소리는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지호가 내보인 진심에 이희진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 사람들은 지호 너처럼 힘들어하지 않아.”

“누나는 우리가 어떤지 모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멋대로 추측하는 이희진의 태도에 화가 났다. 지호의 날 선 표정에 이희진이 다급히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마침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게이트 현장이 비쳤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게이트 앞에 제복을 입은 에스퍼들이 진입을 위해 늘어서 있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이는 권해일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어?”

지호는 이능을 사용해 재하의 곁에 가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공간 이동이 통하지 않은 건, 재하가 빌런 본거지로 납치되어서라고 여겼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재하의 페어 후보인 에스퍼들이 그를 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권해일처럼 멀쩡한 얼굴로 게이트 앞에서 에스퍼들을 지휘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추측하지 말고 직접 물어보기 위해 화면에 보이는 해일에게로 공간 이동을 하려 하자 이희진이 먼저 알아채고 지호를 붙잡았다.

“놔요, 누나. 방해하지…… 윽!”

일반인을 달고 게이트로 갈 수 없어 멈칫하는 사이 지호의 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집혔다. 이 상태로 능력을 사용하면 어디로 이동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또다시 의식을 잃게 될 수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지호의 모습에 이희진은 그를 붙잡고 설득하려 했다.

“가지 마, 지호야. 저 사람들은 네가 없어도 잘 해내고 있잖아. 너까지 위험한 곳에 갈 필요 없어.”

이희진은 지호가 에스퍼의 의무를 위해 무리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저 사람, 네가 없어졌는데도 찾을 시도조차 안 하잖아. 인터뷰할 때도 네 이야기 전혀 안 했어.”

이희진은 많은 방송에서 지호가 권해일을 데리고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마치 마술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지호의 능력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멋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권해일과 서재윤의 무력에 열광했다. 화려함이 없는 방어 능력자에게조차 수호자라는 멋진 별명을 붙이며 동경했다. 하지만 지호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잘생긴 에스퍼라는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이희진은 그게 억울했다. 여친을 모두 정리할 만큼 에스퍼 일에 진심인 지호를 편리한 셔틀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속상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희진은 계속해서 설득하려 했지만, 지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후…… 전화 좀 빌려줘요.”

핸드폰과 통신기를 모두 잃어버렸기에 협회로 직접 전화해서라도 권해일에게 답을 들어야 했다. 재하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편히 쉴 수 없었다.

지금도 화면에 지나가는 대표 전화번호로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했지만, 수십 번을 해도 통화 중이었다. 참다못한 지호가 일어나자 이희진도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

“협회.”

이능을 쓰기 힘들면 대중교통이라는 편리한 수단을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문까지 몇 걸음 걸어간 것만으로도 눈앞이 핑 돌며 무릎이 꺾였다.

“지호야!”

다급하게 달려온 이희진이 지호를 끌어안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식은땀을 흘려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인 지호는 실은 마음이 여렸다. 본인을 속이고 붙잡는 자신이 귀찮은 방해물일 텐데도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해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호야, 조금만 더 같이 있어. 너 나을 때까지만. 몇 시간이면 약 기운 다 빠질 거야.”

명분이 있기에 지호는 들어줄 것이다. 이희진의 예상대로 지호는 억지로 밀어내고 떨어지는 대신 핸드폰을 가리켰다.

“협회에 전화는 계속해 줘요.”

“응, 내가 할게.”

“……스피커폰으로 하고요.”

믿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는 지호가 귀여워 이희진은 기꺼이 그의 말을 따랐다. 몇 시간뿐인 유예에도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웃는 이희진이 지호는 불편해졌다. 가장 얌전하고 배려심 깊다고 여겼던 사람이 일반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변수를 만들어 낼 것 같아 거슬렸다.

“저한테 붙였던 패치는 몇 개 가지고 있어요?”

“실패할 때를 대비해 두 개를 받았지만, 버렸어.”

“괜히 거짓말하지 말고요.”

지호의 의심에 이희진은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지호 네가 피를 토했잖아. 그런 끔찍한 걸 계속 가지고 있다 실수로라도 또 네게 닿으면 어떡해.”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감추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이희진이라면 진심일 수 있었다.

과거, 새로 구매한 테이블의 모서리에 손가락을 긁혀 피를 본 자신에게 연신 사과했던 다음 날. 테이블이 재활용 쓰레기로 나와 있는 걸 목격했었다. 자신을 소유하려 하거나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애정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어쩌면 이희진은 자신이 묻는다면 제대로 된 답을 해 줄지 몰랐다.

섬에서만 해도 패치를 붙인 후엔 말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몇 가지만 물을게요.”

“응, 뭐든지 물어봐 줘.”

이희진의 열정적인 눈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뭐든 털어놓을 거라는 걸.

* * *

견지호가 부작용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이희진에게 정보를 빼내던 시각.

몰려드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성실히 응한 권해일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 게이트 앞에 모여 있는 2세대 에스퍼들의 긴장된 모습을 바라보며 핸드폰이 꺼져 있는 재윤과 통신기로 연락을 시도했다.

― 네.

“서재윤 씨,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 가능해요.

다행히 반응이 없던 핸드폰과 달리 통신기는 재깍 연락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천막 안으로 들어간 해일은 가까운 곳에 에스퍼가 없음을 마나의 존재로 확인한 후 목소리를 낮췄다.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최대한 돕겠습니다.”

― 괜찮아요. 의외로 쓸 만한 것도 주웠고.

해일은 걱정했던 재윤의 덤덤한 목소리에 의아해하면서도 사실상 재하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을 거란 걸 예상했다.

유마로의 실종 때도 미래를 알기에 소용없다는 걸 아는 재윤이었지만, 최대한 인력과 장비를 동원했었다. 지금도 혼자 떠난 이유가 다른 도움이 더해진다 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 역시 함께하고 싶었다. 재하가 걱정되기도 했고, 재윤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협회에 남아 게이트를 처리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야 했다. 주요 에스퍼가 셋이나 빠진 상황에 자신마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재윤 역시 원했던 일이지만, 이런 연락을 해야 하는 해일은 입 안이 썼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진입하려던 게이트의 색이 변한 걸로 에스퍼들이 두려워하는데, 혹시 이에 대한 정보가 있으십니까?”

재윤에게선 한동안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기에 재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해일은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말이 길어졌다.

“이곳이 정리돼야 저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재윤이 반응할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급한 게이트만 정리하고 저 역시 바로 합류할 계획입니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빠르게 공략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려 했습니다. 혹 서재윤 씨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거라면…….”

― 색이 변했다는 건 게이트의 등급이 바뀌었다는 건데 이 정도는 권해일 에스퍼도 알고 있잖아요.

당연히 해일은 알고 있었다. 대격변의 날이 오기 전부터 해일은 간헐적으로 생겨나는 게이트와 던전을 드나들었다. 연구원들 못지않게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재윤에게 확인받으려 했다. 효율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재윤에게 연락할 구실이기도 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하기엔 검은색으로 변해서…….”

― 메인급 마수가 셋 이상인 게이트인가 보네요. 그래도 걱정할 건 아니에요. 특출나게 강한 개체가 있다면 오히려 다른 색이 튀었을 거니까.

“그런 거였군요. 다행입니다.”

― 그래도 색이 변할 정도면 다량의 마수가 존재한다는 뜻이니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게 좋긴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에스퍼에게 맡기세요.

재윤은 다른 에스퍼와 달리 가이딩 효율이 나쁜 해일을 걱정했다. 적절한 가이드 없이 불필요한 상황에서까지 이능을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해일은 납치당한 재하를 찾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도 자신을 챙기는 재윤에게 그저 미안했다.

“미안합니다, 서재윤 씨. 게이트만 클리어 하고 곧 따라가겠습니다.”

― 권해일 에스퍼는 남아서 계속 구심점이 되어 주세요.

“하지만 저도 재하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당신에게 기대한 건 협회에서의 입지니까요.

어딘지 모르게 거리가 느껴지는 재윤의 담담함에 해일은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때마침 천막 입구가 열리며 앳된 얼굴의 에스퍼가 고개를 내밀었다.

“권해일 에스퍼 님, 기자들이 추가 인터뷰를 요청하는데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대화 중…… 서재윤 씨?”

조용한 통신기를 들여다보는 해일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천막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던 신입 에스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죄, 죄송해요.”

“아닙니다. 늦을 뻔했는데 알려 줘서 다행입니다.”

이내 단정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간 해일의 믿음직한 모습에 신입 에스퍼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들이 원하는 신사적인 모습을 상기하며 해일은 천막 밖으로 나섰다.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함께 기쁨이 섞인 비명과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해일은 의식적으로 입 끝을 올려 선하면서도 믿음직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안녕하십니까. 대성 협회 소속 에스퍼, 권해일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