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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120화 (1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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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의 호의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재하는 등줄기가 쭈뼛거릴 만큼 소름이 끼쳤다.

웃으며 자신을 대하고 있지만, 쉽게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영우였다. 잊고 있던 두려움이 엄습한 재하의 시선이 흔들리는 걸 본 영우의 시선은 되레 부드러워졌다.

다행히 영우는 재하와의 약속을 깨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가던 길에 만난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드 룸에 에스퍼의 출입을 통제하라 지시했다. 안도하면서도 반걸음 뒤처져 따라 걷던 재하는 길어지는 침묵에 답답해졌다.

‘숨 막혀.’

대격변의 날 이후, 재하는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도 순응해 왔다. 큰 불만 없이 순순히 따랐던 건 어디까지나 동생, 재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그의 의도가 아닌 상황에 놓이자 조금의 불안에도 두려움이 커졌다.

비슷한 체격임에도 이길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진 신체 능력과 에스퍼에게만 있는 특별한 이능은 재하의 의지로 이겨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겁먹었구나.”

재하의 침묵이 길어지자 영우가 먼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가이딩은 여전히 잘되고. 무섭긴 해도 날 여전히 좋아하는 거야. 그렇지?”

친밀도를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영우는 재하가 겁을 먹었음에도 가이딩이 된다는 것에 기뻐했다.

기분 좋은 티를 내며 자신을 방 안으로 이끄는 영우의 행동에 재하는 거절이란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하지만 문턱을 넘기 전, 재하는 자신을 위해 이능을 봉인당하면서까지 함께해 준 도준을 떠올렸다. 영우의 비호를 받으며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받은 자신과 달리 열쇠만 뺏기면 다시 폭력에 노출될지 모를 위험 속에서 홀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언제는 무섭지 않았던가. 무서워도 할 수 있는 건 해야 했다.

재하는 서서히 가이딩을 닫아 자연스럽게 흐름을 끊었다. 은은하게 이어져 오던 가이딩이 끊기자 영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영우가 괜한 짐작을 하기 전, 재하가 먼저 상황을 꾸며 냈다.

“가이딩을 많이 하면 효율이 떨어지거든요. 한계가 온 거 같아요, 선배.”

“그렇구나. 그럼 내일은 또 해 줄 수 있니?”

“물론이죠. 선배 파동도 아직 덜 가라앉아서 계속해야 해요.”

재하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영우는 가이딩이 되지 않는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 가이딩이 되지 않을 때도 영우는 재하의 손을 잡고 싶어 했었다.

“자면 회복되는 거랬지? 안에 침대 있으니까 한숨 자렴.”

“선배는요? 선배도 쉬어야 하잖아요.”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재하의 말은 영우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개량해 보고 싶은 시제품이 있어서 연구실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원래는 내 방을 소개해 주고 같이 가려고 했지만…….”

손깍지까지 끼며 손바닥을 비벼 오는 장난을 친 영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가이딩이 안 되니 재하가 날 안 좋아하는 거 같아서 섭섭해. 어서 체력을 회복해서 다시 해 주렴.”

“그럴게요. 다녀오세요, 선배.”

방 안에 선 재하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영우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잠시 머무는 것뿐인 숙소가 갑자기 괜찮게 보였다. 재하와 지낼 거라면 더 넓은 방으로 옮기는 게 좋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배웅받으며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이라 재하의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흔들리는 것이나 빛을 머금고 예쁜 색을 내는 것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방을 옮겨야겠어.”

“네?”

“쉬고 있으렴. 문은 잠가 두고 밖으로 나오지 마.”

재하의 손을 두어 번 토닥인 영우가 주저 없이 문 바깥쪽 바닥에 검은 구슬을 뿌렸다. 마치 사춘기를 맞은 동생이 자기 방에 얼씬도 말라며 레고를 깔아 놓았던 것과 닮아 있었다. 대놓고 폭탄을 연상시키는 물건을 뿌려 놓는 영우의 경고에 재하는 어색한 웃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설픈 재하의 미소에도 영우는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걸 억지로 움직여 멀어졌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곳이었다. 오히려 연구실에 다녀올 일이 기대될 만큼 재하의 인사에 몰랑거리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재하를 위해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옮겨야겠다 결심하며 나아가는 영우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혼자 남은 재하는 재빨리 문을 닫고 열쇠를 걸어 잠갔다. 빌런들 천지인 곳에서 가이드인 자신이 혼자 돌아다니는 건 아주 위험한 일임을 알았다.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가이드들이 눈에 밟혔다.

영우가 자리를 비운 동안 뭐라도 건질 게 없나 뒤져 보자 싶어 안을 살피려던 재하는 입이 떡 벌어지는 방 상태에 할 말을 잃었다.

책상이고 침대고 할 것 없이 온갖 잡동사니와 서류들이 널려 있었다. 어찌 잘 비벼 보면 사람 하나 누울 자리, 앉아서 책 한 권 펴 놓을 자리 정도는 있어 보였다. 쌓여 있는 종이들을 대충 살펴보니 히어로 영화에서나 봤음 직한 형태의 무기 설계도에 수없이 수정된 흔적과 더불어 보류 표기가 되어 있었다.

“여전하네, 선배는.”

그 대상이 과제가 아닌 실전에 사용 가능한 무기류라는 게 씁쓸했다. 탑을 이룬 자료들 뒤로 익숙한 기계음까지 들려왔다. 설마 피실험자를 방에 둔 건 아니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책 더미 뒤로 이동한 재하는 상상이 이루어진 현장에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병실 침대와 마나 파동 그래프 모니터, 무엇보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인물이 온몸에 패치를 붙인 채 잠들어 있었다.

‘잠든 게 맞나?’

무슨 실험이라도 당하는 게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영우의 웃는 얼굴에 조금이나마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몰려왔다.

재하가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보자 마나 파동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폭주하고도 남을 것 같은 거센 그래프의 움직임에도 정작 당사자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얌전하고 착한 얼굴을 한 에스퍼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재하는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던 유마로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폭주 직전의 유마로와도 마주쳤지만, 재윤에게 시비를 걸던 모습이 더 인상 깊어 안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유마로가 왜 여기 있어?’

치료받으러 갔던 게 아니었나.

동시다발 게이트가 도심에 생겨났던 날, 유마로는 재윤처럼 양팔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폭주 전조 증상을 보였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협회에 돌아와서도 가이드인 자신에게 따로 연락은 없었지만, 뉴스를 통해 치료와 요양 소식이 전해졌다. 그걸로 자신의 관심도 끝이었다. 애초에 유마로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따로 알아볼 이유도 없었다.

유마로는 자신에게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A급 에스퍼를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겼겠거니 했다.

하지만 협회를 등지고 빌런에 합류했다고 가정하기에는 영우의 방에 있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유마로의 옆에 놓인 서류철을 넘겨 보니 그간 해 온 실험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마로를 깨우기 위해 온갖 고통을 주었던 기록이었다. 이런 실험에 의식 없는 유마로가 동의했을 리 없었다.

“설마…… 납치당했던 거였어?”

A급 에스퍼가 사라졌는데도 방송에선 쾌유를 기원한다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협회가 유마로의 납치 사실을 감춰 왔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하는 문득 신경 쓰이는 일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견지호의 부재. 부자연스러운 연락 두절 역시 협회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지호마저도 자신이나 유마로처럼 납치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불안해졌다.

이곳에 납치된 이들의 처우만 봐도 지호가 여기 있다면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빌런이 아니라 프로 납치단인데. 에스퍼를 뭐 이리 쉽게 납치해…….”

애써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밝게 목소리를 내 봤지만, 고등급 에스퍼 중 셋이나 빌런에 납치된 거라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설마 S급 주도준이 납치됐는데도 협회가 감추고 쉬쉬하는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시간 벌이에 의미가 있는 건가 싶고, 또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에 숨이 막혀 왔다. 그러다 침대에 누워 있는 유마로의 새까만 양팔을 보고 두렵기만 하던 마음이 조금은 침착해졌다.

유마로가 왜 잠들어 있는지 몰라도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틀을 벌었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구조대가 오지 못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

재하는 망설임 없이 잠든 유마로의 새까만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의식이 없는 에스퍼를 깨우는 방법은 몰라도 마나 파동이 엉망인 에스퍼를 진정시키는 건 자신 있었다. 좀 더 빠른 가이딩을 할 수도 있었지만, 영우로 인해 상당히 무리한 터라 그대로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될 때까지 조심해야 했다.

‘도준의 구속구를 풀 수만 있어도 도망칠 수 있을 텐데.’

거기에 유마로까지 깨어난다면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호도 납치됐을지 모르니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재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머릿속에 그려 나갔다.

* * *

견지호는 눈을 감고 있어도 멀미를 하는 것 같은 울렁거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목에 닿는 차갑고 눅눅한 감촉이 싫어 손으로 밀어내자 들려오는, 그러면 안 된다며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손을 내밀어 더듬거리자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손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하던 이가 아님을 알아채고 손을 거둬들인 후 외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울렁임은 파도처럼 격렬하게 몰아쳐 구토할 만큼 괴롭다가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변덕쟁이 바다 위에서 조각배에 탄 채 흔들리는 것 같은 불안함은 점차 가라앉아 어느 순간부터는 괜찮은 시간이 더 길어졌다.

흐렸던 시야 역시 눈을 뜰 때마다 조금씩 뚜렷해져 이제는 천장의 조명 형태까지 구분할 수 있었다. 이쯤 되니 계속 자신을 부르며 울먹이던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도 확신할 수 있었다.

“희진 누나…….”

“지호야, 정신이 들어? 목 아프지? 여기 물 마셔.”

다크서클까지 생긴 이희진이 내민 컵을 손등으로 밀어냈다. 이미 한 차례 이희진에게 배신당한 상황에서 그녀가 주는 걸 덥석 마시는 멍청한 짓을 할 순 없었다.

지호의 냉담한 반응에도 이희진은 들고 있던 컵의 물을 직접 몇 모금 마신 후 다시 내밀었다.

“그냥 물이야. 지호 널 속인 건 그날뿐이야. 부모님을 가지고 협박해서…….”

“아뇨, 듣고 싶지 않아요.”

지호는 이희진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 남아 있던 친구로서의 옅은 감정마저도 이번 일로 완전히 털어 냈다. 감정 없는 상대의 변명은 무의미했기에 더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호는 목에 잔뜩 올려진 눅눅한 것을 손으로 떼어 냈다. 싸한 냄새가 나는 걸 보아 약초 같은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울렁거림이 가라앉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병 주고 약 주는 것뿐이었다.

지호는 곧장 공간 이동을 하려 했다. 그러나 몇 번을 시도해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안 가지는 거지?”

점차 하얗게 질리는 지호의 모습에 이희진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걱정했다.

“지호야?”

“이럴 수 없어. 이러면 안 돼.”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보고 싶었던 대상, 서재하의 곁으로 가기 위해 몇 번이고 능력을 사용했지만, 좌표를 찾지 못한 마나는 지호의 안을 순환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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