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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하게 앞서가는 영우에게 끌려 나아갈수록 흐느낌은 커졌고, 다그침은 심해졌다.
귀를 막고 싶어지는 불편한 대화에 이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까지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저 안에서 몇 명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
알고 싶지 않다고 해서 외면하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재하는 도저히 이 장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영우를 붙잡았다.
“왜 그러니?”
여상하게 돌아보는 영우의 얼굴엔 미소마저 감돌았다. 저를 붙잡는 재하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선배, 저기…….”
“응, 재하야.”
평온하기만 한 영우의 반응에 재하는 하려던 말을 삼켜야 했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을 텐데도 영우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저들의 고통이나 짐승 같은 행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으면서도 본인을 붙잡는 자신과는 눈을 맞추며 기다려 주었다. 인정에 호소하는 건 통하지 않으리란 확신에 재하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선배, 가이딩은 호의를 기반으로 효율이 높아지는 거 알죠?”
이미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가이딩에 집중했다. 은은하게 이어지던 가이딩이 짙어지자 웃고 있던 영우의 눈이 더욱 휘어졌다.
“재하가 애교를 다 부리네?”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가 절 배려해 준다는 걸 알게 돼서 더 친밀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거짓이었지만, 영우가 좋아할 만한 말이었다. 재하의 의도대로 영우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더 마음에 드는 말이구나.”
“그런데 가이딩을 많이 하면 금방 피곤해지거든요. 푹 자야 효율도 좋아지고요.”
재하는 영우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듯 잡고 가이딩 양을 조금씩 늘렸다. 영우의 파동이 워낙 거칠었던 탓에 재하가 능숙하게 가이딩을 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영우는 한 차례 의식이 없던 재하에게 가이딩을 받아 냈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만성이 돼 버린 고통에 익숙해진 탓에 생긴 오해였다. 의식이 없는 가이드에게 느릿하게 받은 것으로는 숨통이 조금 트인 정도였다. 오랜 시간 가이딩을 받지 못한 영우에게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선배는 가이딩을 안 받았나 봐요. 파동이 되게 거칠어요.”
“후우…… 저속한 짓엔 관심 없단다.”
영우는 재하가 조절하며 느릿하게 밀어 넣는 미미한 가이딩도 만족스러웠다.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이능을 사용하면서 조금씩 마나 파동이 불편해지던 영우였다. 백마혁의 파트너인 사해라의 접근은 꺼림칙해 거절하고 가이드를 노리개 삼는 조직원들의 저속함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영우로선 재하와의 자연스러운 가이딩이 마음에 들었다.
한결 편안해진 영우의 표정에 재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선배 말대로 저속한 방식으로 가이딩을 하는 건 좋지 않아요.”
“하지만 결과를 보면 그나마 효율이 좋은 편이더구나.”
“접촉이 깊어지면 매칭률이 나쁜 상대와도 가이딩이 되긴 되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효율이 떨어질 거예요.”
필사적인 재하를 보며 영우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주었다.
“네가 힘든 일은 없을 거야.”
예상대로 영우는 납치한 가이드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신경 써 주는 건 자신뿐이었기에, 재하는 직접적으로 말을 꺼냈다.
“선배, 여기 대장이랑 자주 만나시는 거 같은데 말 좀 전해 주세요. 가이드에겐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감정의 동요가 심하면 가이딩 효율이 더 떨어질 거예요.”
“가이드에 대한 권한은 나한테 있는데. 내가 데려왔으니까.”
납치 사실을 당당히 밝히는 영우의 태도에 재하는 언제부터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어 아찔해졌다.
“그럼……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지 마세요. 여유 시간을 두고 평온한 상황에서 가이딩을 한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효율을 보일 거예요.”
영우가 아는 것과 저들이 원하는 것을 떠올리며 끔찍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재하는 말을 골랐다.
“시험 삼아 딱 3일만 쉬게 해 주세요. 더 많은 에스퍼에게 더 좋은 효율의 가이딩을 할 수 있을 거예요.”
“3일은 무리야.”
협회에서 구하러 올 수도 있기에 시간을 벌고자 적당히 꺼낸 3일은 바로 거절당했다. 재하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목에 힘을 줬다.
“그럼 이틀이라도요. 그동안 제가 가이딩 교육도 할게요.”
재하가 아는 건 이론 몇 가지뿐이라 오히려 신입 가이드보다 지식이 부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전 경험은 누구보다 많았기에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영우가 대답이 없자 재하는 슬그머니 손을 놓으려 했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영우가 빠르게 손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지금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치던 문을 향해 다가간 영우는 노크도 없이 활짝 열었다. 은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는 문조차 잠기지 않아 쉽게 열렸다.
“뭐야? 아직 시간 안 됐는데 왜 벌써 문을 열고 지랄…… 이, 이영우?”
“엥? 고고하신 분께서 여길 왜 와?”
살색투성이인 방 안 풍경에 재하는 고개를 돌렸다. 영우 역시 에스퍼들의 얼굴만 쳐다본 채 덤덤하게 지시했다.
“저속한 짓거리 그만하고 다들 나가요.”
“와, 이건 아니지. 장기 출장 다녀와서 일주일 만에 하는 거라고.”
“맞아. 풀 땐 제대로 풀어야지.”
여간해서는 영우의 말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했을 이들이 물러서지 않았다. 가이딩을 핑계로 본능적인 행위를 하던 중 방해받은 것도 불쾌한데 오늘 순번을 놓치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무엇보다 이 상태로 희미하게 이어지는 가이딩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한 번에 들어 먹는 법이 없지.”
영우는 이렇다 할 설명조차 없이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어느새 꺼내 든 검은 구슬이 그의 손안에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까득. 까드득.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 영우의 경고에 버티려던 남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발, 하필 왜 내 차례일 때 와서 지랄인지……. 알았다, 알았어.”
“으으, 그거 기분 나쁘니까 손으로 굴리지 좀 말지.”
머리는 나빠도 힘의 논리는 제대로 파악한 이들이 마지못해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내부에서 이능 사용 금지는 사고 치지 말라는 경고일 뿐, 빌런의 길로 흘러 들어올 만큼 제 성질을 못 이기는 혈기 왕성한 이들은 쉽게 힘을 꺼내 쓰곤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상해는 입히지 않는 게 은연중에 룰이었건만, 이영우는 선을 지킬 줄 몰랐다. 웬만한 시비는 무시하면서도 여간해선 짐작 못 할 거슬림을 이유로 아예 숨통을 끊어 버렸다.
그런 이영우와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귀엽게 생긴 인물에게 절로 남자들의 시선이 향했다. 안의 상황을 보고 놀랐는지 파랗게 질렸다가 붉게 물든 얼굴을 붙잡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가이드를 강제로 취한 경험을 한 에스퍼는 은연중에 모든 가이드를 성적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협회의 에스퍼였다면 평범하게만 보았을 재하를 유달리 귀엽게 보거나 탐내는 시선으로 훑어 댔다.
뒤늦게 한 에스퍼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리치며 알았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아, 방이 필요했던 거야? 드디어 이영우 너도 제대로 가이딩을 해 보려고? 그런 거면 같이 해도 되는데.”
까드득.
자문자답해 대던 남자는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에 빠르게 입을 다물고 방을 나갔다.
가이드를 괴롭히던 에스퍼들이 전부 나갔는데도 가이드들은 침대 구석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차마 눈 둘 곳이 없어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은 재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영우가 손을 놔 주지 않아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에스퍼의 파동을 느낀 예민한 가이드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제, 제발, 잠시만이라도 쉬게 해 주세요.”
“괜찮아요. 이제 쉴 수 있어요.”
“조금만 쉬고 열심히 할게요. 너무 힘들어요, 제발…….”
영우를 보며 벌벌 떠는 모습에 재하는 가이드의 시야 안으로 얼굴을 내비쳤다.
“흐익!”
“괜찮아요. 저도 가이드예요.”
“가……이드?”
처음에는 놀라 뒤로 물러서려던 가이드의 겁에 질려 흔들리던 눈빛이 조금씩 돌아왔다. 이내 재하를 알아본 가이드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서……재하 가이드님?”
“네, 맞아요. 가이드님은 이름이 뭐예요?”
“이름……. 저는 송서림인데 등급은…… 서, 서재하 가이드님도 잡혀 오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떡해……. 서재하 가이드님 없으면 영웅 에스퍼분들 가이딩이…….”
자신을 송서림이라 소개한 가이드는 재하마저 납치됐다는 사실에 고등급 에스퍼의 가이딩을 걱정했다. 참된 가이드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죽을 만큼 착취당하는 상황에서조차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는 게 너무도 대단해 보이는 한편 안쓰러웠다.
침대 구석에서 구겨진 가이드 제복을 끌어와 어깨에 덮어 주는데 허겁지겁 입는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와줄게요.”
“입어 봤자…… 소용없을 거예요.”
본능적으로 몸을 감추려던 송서림의 행동이 멈추자 재하가 직접 단추를 채워 주었다. 며칠째인지도 모를 만큼 잠도 자지 못하고 시달렸던 가이드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여 들었다.
“너무…… 힘들어요. 쉬고 싶어요.”
“허락받았으니까 쉬어도 돼요. 오늘은 일단 푹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저…… 정말 쉬어도 돼요? 저, 자고 싶어요.”
“자도 돼요. 걱정하지 말고 누워요.”
재하의 상냥한 목소리에 송서림은 두려움이 아닌 서러움에 목이 멨다.
“감……사해요.”
“잘 자요, 송서림 가이드.”
불안으로 떨리는 몸을 도닥이는 재하의 다정한 손길에 송서림은 주저하면서도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여전히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한계까지 몰린 탓에 금세 잠이 들었다.
기절하듯 잠든 송서림에게서 손을 뗀 재하는 다른 침대의 가이드들도 확인하려 했다. 죽은 듯 누워 있거나 멍하니 벽을 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송서림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재하가 더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여전히 한 손을 잡고 있던 영우가 문 쪽으로 향했다.
“선배?”
“피곤해. 쉬러 가자.”
그렇게 말하는 영우의 얼굴엔 피곤함은커녕 재하를 향한 은은한 미소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아직 다른 가이드들이…….”
“재하야, 넌 나만 걱정하면 돼. 그게 그렇게 어렵니?”
처음으로 영우가 재하에게 은은한 짜증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