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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십 분 전, 빌런들에게 압박받던 재하는 영우를 언급해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세 사람을 내쫓고 나서도 바깥에서 실랑이가 있었다.
“어휴, 겁쟁이들. 이영우가 뭐 그리 무섭다고 쪼르르 나와?”
“가서 고추나 떼라. 사내구실도 못 할 거 뭐 하러 달고 다니냐?”
“아, 씹. 이영우 때문이 아니고 가이딩이 안 돼. 안 되는데 굳이 이영우랑 척질 필요 없잖아.”
거구의 스킨헤드 남자가 이유를 알려 주었는데도 순서에 밀려 못 들어갔던 다른 에스퍼가 어깨로 밀치며 감옥에 들어가려 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이영우가 그리 무섭냐? 덩치가 아깝다, 새끼야.”
“아오, 니들 맘대로 해라. 열쇠는 알아서들 가져가.”
남자가 열쇠를 바닥에 던졌는지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문고리라도 잡고 버텨야 하나 싶어 몸을 일으키던 재하는 터진 입술로도 웃음을 보이는 도준의 평온함에 덩달아 차분해짐을 느꼈다.
“재하야, 괜찮을 거야.”
“어, 괜찮아야지. 그럴 거야.”
재하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떠는 재하를 바라보며 도준은 잠시 말을 골랐다. 본인을 저속하게 희롱했다는 이유로 영우가 심장을 쥐어 사람을 죽였다는 걸 재하는 아직 몰랐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재하에게 가이딩을 받아 보려고 몸뚱이를 들이대는 저들이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벌써 저렇게 떨고 있었다.
도준은 최대한 순화해서 상황을 전달했다.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가이딩이야.”
“어, 그래 보이더라.”
몸을 더듬던 소름 끼치는 감각을 애써 털어 내며 단추가 뜯어진 셔츠를 대충 여몄다.
“아마도 이전에 납치된 가이드에게 강제로 가이딩을 받아 왔을 거야.”
“그랬겠지. 개새끼들…….”
재하답지 않은 거친 말에도 도준은 차분히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알려 주었다.
납치된 가이드는 신입들이었고, 교육도 거의 되지 않은 데다 낮은 효율밖에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저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을 터였다. 영우만 봐도 TV에서 재윤이 언급한 친밀도에 따른 가이딩의 효율을 믿고 있었다.
“재하 너는 최초의 가이드이자 S급, A급 에스퍼와 함께 게이트까지 들어간 유일한 가이드야. 저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제대로 된 가이드라는 거지.”
실제로 가이드로서 한 일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바깥에서 보기에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미등록 에스퍼에겐 어쩌면 평생 접하기 힘든 특별한 가이드가 갑자기 뚝 떨어진 상황이었다. 미지의 영역이자 한 번이라도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든 접촉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억지로 취하려 드는 이도 있겠지만, 감정을 기반으로 친밀도를 올려 효율 좋은 가이딩을 경험하고 싶은 에스퍼도 있을 거야. 아무리 빌런이라 해도 가이딩 효율은 무시 못 할 테니까.”
본능적인 선호도라는 것과 호기심도 있을 것이라는 게 도준의 조언이었다.
이에 재하가 선택한 건 먼저 가이딩을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아싸, 내가 주웠다!”
“에이씨, 도둑 새끼. 치사하게 이능을 이딴 데 쓰냐?”
마침 열쇠 다툼이 끝났는지 누군가 소리쳤고, 누군가는 혀를 차며 욕을 했다. 더는 시간이 없음을 깨달은 재하가 빠르게 문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철창에 매달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 하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열쇠를 집어 든 에스퍼조차 꼼짝하지 않고 재하에게 집중했다.
“혹시 가이딩 효율이 감정의 영향을 받는 건 다들 아세요?”
아무도 대답하진 않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는 게 알고는 있는 듯했다. 재하는 슥 주변을 살핀 후 가장 여려 보이는 소년과 열쇠를 놓쳤다며 욕을 하던 남자를 향해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거기 착하게 생긴 학생이랑, 빨간 머리에 진청색 입으신 분. 제가 가이딩 시범 보여 드리고 싶은데, 와 보실래요?”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직접 에스퍼를 지목하자 서로 달려들려던 이들이 당황하며 멈추어 섰다. 억지로 밀치고 잡을 수도 있지만, 납치된 가이드가 너무도 당당하게 굴자 뭔가 있나 싶어 경계와 호기심에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재하의 뻔뻔한 가이딩 호객에 휩쓸린 에스퍼들은 서로서로 견제하며 영우가 목격한 황당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었다.
영우는 자신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평소처럼 열심히 상황을 해결하려 노력한 재하가 귀엽게 느껴졌다.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안아 든 영우의 행동에 재하가 감옥 안을 가리키며 다급히 물었다.
“도준이는요?”
“친구는 에스퍼잖니. 저 안에 있어야 여기 에스퍼랑 부딪치지 않지.”
“선배도 보셨잖아요. 아무나 들어가서 도준이 때리고 그러면 어떡해요. 아무 잘못도 없는 앨 때리려고 데려오신 건 아니잖아요.”
실험하기 좋은 대상이라고 여기기도 했고, 굳이 상처를 낼 이유도 없었다. 영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문 앞에 서 있는 소년을 가리키며 주변의 에스퍼를 휙 둘러보았다.
“저 애한테서 열쇠 뺏거나 빌려 가면 자는 동안 폭탄 먹일 거야.”
“어우, 씨. 팔자에도 없는 문단속 하게 생겼네.”
누군가의 투덜거림에 영우는 주머니에 넣었다 뺀 손에 든 검은 구슬을 굴리며 웃음으로 답했다.
“식사에 타는 것도 괜찮겠지. 아니면 발밑에 서비스로 여러 개 던져 줄 수도 있고.”
“그랬다간 보스한테 경고 먹을 건데.”
“쫓아내 주면 좋고. 벌을 준다면, 내가 구슬을 어디에 숨겨 놨는지 모조리 찾아야 할 거야.”
영우에게 들려 있는 재하가 불편함에 조금 몸을 뒤틀자 그가 등을 도닥이며 말을 이었다.
“내 이능으로 만든 폭탄을 고작 B급도 안 되는 너희가 찾을 수나 있겠니?”
등급이 낮을수록 타인의 마나를 느끼는 것도 둔했다. 영우의 웃음 섞인 지적에 다들 불퉁한 얼굴로 흩어졌다. 이능이 봉인된 에스퍼보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될 가이드에게 더 관심이 많기도 했기에 쉬운 해산이었다.
영우의 몇 마디로 도준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되자 재하는 안심하며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선배, 우리, 손잡고 가요.”
재하는 영우에게 내려 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 그가 가장 원하던 걸 제시했다. 예상대로 영우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 주었다. 그러곤 바로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재하는 상대가 원하는 걸 잘 아는구나.”
영우가 내미는 손을 잡자 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여유로운 태도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아니나 다를까 영우 쪽에서 먼저 안내를 자처했다.
“내 방 근처는 재미없으니까 구경 좀 시켜 줄게.”
“저, 납치된 거 아니었어요? 막 돌아다녀도 돼요?”
“뭐 하러 가둬 두겠어. 어차피 계속 여기서 살 건데.”
재하가 부러 언급한 불편한 이야기에도 영우는 태연했다.
“물론 이곳이 싫다면 다른 곳을 구해서 나갈 수도 있지만.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는 게 나을 거란다. 편의 시설이 제법 잘돼 있어서 지내는 데 불편하지 않을 거야.”
영우의 상식에는 마음의 불편함은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 납치해 놓고도 당연히 자신을 따라올 거라 여기며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이었다. 영우는 꽤 수다스러웠지만, 조곤조곤 말을 해 왔기에 잔잔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우에게 이끌려 걸어가는 내내 여러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애써 피한 시선은 영우를 보는 척하며 내부를 훑었다.
높은 천장이 주는 개방감과 넓은 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대형 TV나 소파, 당구대와 대형 오락기가 어울리지 않았다. 나름 놀이 시설을 둔 것 같은데 중구난방으로 놓여 있어 어수선했다. 건물 형태는 기술과 예술이 합쳐져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고급스러움이 넘쳐 나는데 내부는 각자 자기들 입맛에 맞는 장난감을 가져다 대충 던져 놓은 모양새였다.
‘빌런들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일지도 몰라.’
도준은 자신을 걱정하는 재하를 향해 마지막까지 속삭였다.
작은 거라도 좋으니 이곳에 대해 정보를 모으라고.
영우가 돌아오면 도준과 함께 감옥에 있겠다며 버티려던 재하를 예측하고 만들어 준 일거리처럼 들렸다. 도준은 이능을 사용하지 못해 힘들 텐데도 재하를 위했다. 재하의 마음에 부채감이 쌓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재하가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리는데 갑자기 TV 볼륨이 올라가며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게이트에 시민들의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이럴 때 안심할 수 있게 지켜 주는 아주 든든한 분과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야야, 생방인데 젠틀맨 나왔다.”
“호오~ 신사 권해일은 다르네. 동료나 가이드가 납치돼도 시민 보호가 우선이다 이거지.”
“어차피 여긴 못 찾으니까 포기했나 보지.”
부러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인 덕에 생방송에 권해일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하는 화면을 보고 싶어 걸음이 느려졌지만, 이미 지나쳐서 TV의 뒤쪽밖에 볼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권해일입니다. 이번 게이트는 중형 정도의 크기이나 시민 여러분들께서 충분한 거리 유지만 해 주신다면…….』
“이야~ 목소리 죽이네. 얼굴이 저리 잘났으면 목소리는 모깃소리만 해야 공평한 거 아냐?”
“키라도 작든가. 세상 존나 부조리해.”
한량처럼 소파에 늘어져 투덜대는 이들 사이로 들려오는 해일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이왕이면 재윤의 인터뷰도 나와 주면 더 안심이 될 텐데 앞서 걷는 영우가 가볍게 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걷는데 영우의 상냥한 목소리가 고개를 들게 했다.
“TV는 내 방에도 있어. 이따 실컷 보렴.”
“TV 봐도 돼요?”
“당연하지.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영우는 마치 재하를 자기 집에 초대한 것처럼 행동했다. 내부를 거닐며 귀찮은 것처럼 대충 설명하긴 했어도 재하와 손을 잡고 걷는 행위 자체는 즐기는 듯 보였다.
그래서 재하도 조금은 방심할 뻔했다.
영우와 함께 들어선 복도 안쪽에서 들려오는 수상한 소리에 재하가 걸음을 멈추자 지금까지처럼 설명이 이어졌다.
“아, 여기가 지름길이라 들어오긴 했는데 다음부터는 저쪽으로 돌아가자.”
“여기……가 뭐 하는 덴데요?”
잔뜩 쉬어 버린 흐느낌과 험악하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듣기 괴로웠다. 도저히 발을 내딛지 못하고 멈춰 선 재하를 끌어당기던 영우가 여상하게 답했다.
“저번에 데려온 가이드들이 지내는 곳이야.”
어쩌면 평범하다고 여겼던 공간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