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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라는 정신계 이능을 십분 발휘해 마나 파동이 거칠어진 에스퍼의 정신을 안정시키거나 잠재워 폭주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해 왔다.
문제는 가이드와 달리 이능을 사용하는 터라 에스퍼를 진정시키는 대신 사해라 본인의 마나 파동이 날뛰게 된다는 점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사해라의 마나 파동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스스로를 가수면 상태로 만들어 수일간 잠드는 것이었다. 하루면 털고 일어나는 가이드와 달리 이능을 사용해 타인의 마나 파동을 가라앉힌 대가로 며칠씩 의식을 잃거나 만성이 돼 버린 무기력과 두통을 달고 살게 되었다.
“그래도 좀 더 누워 있지 않고.”
“충분히 쉬었어요.”
백마혁이 다가와 부축하자 사해라는 자연스레 몸을 맡기며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거리낌 없는 친밀한 접촉에 이어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영우 군이 데려온 사람, 내버려 두세요.”
“어째서? 가이드가 필요한 거면 더 잡아 오면 돼.”
쇼핑이라도 하듯 가벼운 백마혁의 답에 사해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파트너를 향해 웃는 얼굴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약점이나 원인은 섣불리 없앴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해요. 오히려 잘 지켜보고 수단으로 써야죠.”
나긋나긋하게 질책하는 상냥한 목소리에 백마혁의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목소리에도 힘이 좀 생겼군.”
자신을 위해서만 이능을 사용했던 시기에는 파트너가 이토록 파리한 얼굴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인재를 영입하고 조직을 키워 갈 때마다 필연적으로 사해라의 상태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기에 부채감도 커져 왔었다.
가이드 덕에 이능을 남용하지 않게 된 사해라가 매일 조금씩 건강해지는 게 보일 때마다 백마혁은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이영우의 영입으로 인해 생겨난 행운이었다.
“다행이군. 정말이지 복덩이가 들어왔어.”
“그 복덩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게 서재하였잖아요. 가이드가 아니었을 때부터 계속. 그걸 건들려고 하면 안 되죠.”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잖나. 수장인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백마혁이 불만을 토해 내며 툴툴거리자 여인의 입가에 웃음기가 퍼져 나갔다. 사해라는 자신의 앞에서만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백마혁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원래도 천천히 가려던 길이에요. 어차피 가야 할 길은 같은데 너무 초조해 말아요, 우리.”
“그건…… 그렇지. 그대 두통도 나아지고 있다니 안심이고.”
파트너의 말에 수긍하던 백마혁은 아직 두통이 남아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사해라를 다시 소파에 앉혀 다독였다. 눈을 감고 편히 쉬는 사해라를 다독이면서도 백마혁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뿐이었다.
이영우는 다른 에스퍼들과 달랐다. 제 욕심만 챙기며 몸을 사리거나 애매한 범죄를 저질러 관리하기에 급급했던 대다수의 에스퍼와 태생부터 달라 보였다. 죄책감도 없고, 목적을 위해서는 다수의 희생도 마다치 않는 영우의 과감함이 몇 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조직의 행보에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던 거지.’
에스퍼의 권익을 외치면서도 특별한 능력을 갖췄기에 은연중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잘것없는 일반인에게 굳이 해를 끼치지 않으며 천천히 나아가는 사이 협회와 자신의 차이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좋은 패가 들어왔으니 최대한 써먹어야 할 거 아닌가.’
세상이 바뀌었으니 자신도 바뀌어야 했다. 최초에 파트너와 이곳을 꾸려 가며 계획했던 것보다 빠르게 일을 키워야 할 때였다.
‘이영우의 비위를 맞추려면 몇 명 정도 희생당해도 어쩔 수 없지. 당분간 그놈이 이능을 쓰더라도 모른 척 맞춰 줘야겠어.’
아무래도 서재하를 이곳에 두는 이상 짐승 같은 놈들을 전부 단속하기 힘들었다. 늑대 무리 속에 양 한 마리를 풀어놓는 것과 같았다. 그것도 비쩍 곯은 양 몇 마리를 나누어 먹던 늑대 무리 속의 아주 통통하고 먹음직스러운 최상급 양이었다.
망나니 같은 조직원들도 소중하게 돌봐 오던 사해라에겐 다소 힘든 일일 수 있었기에 백마혁은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 * *
백마혁에게 한참 동안 잡혀 있던 영우는 감옥으로 향하는 걸음이 조급했다.
섬을 개편한다며 조감도를 꺼내 시설의 규모를 키울 계획을 보여 줄 때는 조금 혹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빈방 천지였다. 연구를 위한 시설 역시 규모에 비해 연구원의 숫자가 현저히 적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그간 백마혁은 자금이나 대 줄 뿐, 인재를 영입하는 일에는 형편없었다. 실제로는 성질 더러운 기존 에스퍼들이 영입해 온 인재들에게 텃세를 부리다 상해를 입히거나 도망치게 만든 탓이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규모에 비해 사람이 적었다. 영우가 손을 조금 거든 것만으로 몇 년째 부적합 시제품이던 구속구가 완성될 만큼 인력도 의욕도 부족했다.
“아, 쓰레기 좀 정리하자고 의견을 내 줄 걸 그랬나.”
이곳의 에스퍼들은 몹쓸 인성들이 대다수였다. 영우 역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기에 결코 좋은 인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명분은 있었다. 하지만 인원 정리를 한다면 지금 있는 에스퍼 중 절반 이상을 내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 해도 상관없지 않나 싶기도 했다. 빌런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든 자신에겐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연구 설비쯤이야 투과 능력자인 자신의 이능이라면 어느 연구소든 들어가 가지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대가로는 폭탄 구슬 몇 개 정도면 충분하리라.
“너무 늦어서 재하가 놀라겠어.”
시간이 예상보다 더 지체됐기에 재하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재하에게 수상한 눈빛을 보내던 조직원의 심장을 터트려 경고해 두었으나 욕망이 앞서는 에스퍼들을 전부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억지로 범해져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저를 보면 도와 달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
빠르게 걷던 영우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저를 보고 웃으며 손을 잡아 주는 재하가 좋았지만, 저를 향해 울면서 매달리는 재하도 보기 좋을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빨리 보고 싶어져 느려졌던 영우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서둘러 도착한 감옥에선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활짝 문이 열린 감옥 문턱에 당당하게 서 있는 재하와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에스퍼들의 모습은 영우가 떠올린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재하의 옆에는 영우가 열쇠를 맡긴 소년도 서 있었는데, 재하가 소년의 손을 잡아 위로 들었다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자, 보세요. 아까 저분이랑 손잡았을 때랑 다르죠? 여기 착한 에스퍼분이랑 손을 잡으니까 가이딩이 되잖아요. 에스퍼님, 지금 가이딩 되고 있죠?”
“네, 네.”
“가이드의 감정에 따라 가이딩 효율이 천차만별이고, 아예 안 되는 경우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 가이드를 대할 때는 정중하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셔야 해요.”
재하의 설명에 앉아 있던 에스퍼 중 하나가 의문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야 손만 잡으니까 그런 거고, 찐하게 한 방 해 버리면 감정 없이도 가이딩 되던데.”
“맞아, 맞아.”
“내가 잘해 줄게. 한 번만 하자.”
키득거리는 에스퍼들의 놀림 속에서도 재하는 말을 이어 갔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세요?”
“힘들긴, 허리나 좀 뻐근하지.”
여전히 킬킬대기만 하는 이들을 향해 재하는 진지하게 말했다.
“여기 모인 분들은 에스퍼가 제대로 대우받기를 바라신다면서요. 가이딩 부족으로 힘들다고 하셨고요.”
납치해 온 가이드를 등급 높은 몇몇 에스퍼가 독식하다시피 하다 보니 여전히 마나 파동이 엉망인 에스퍼들이 많았다. 그들의 귀는 재하의 다정한 목소리에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여러분들이 말한 에스퍼가 우대받는 삶, 지금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재하의 말에 저마다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일반인들이 에스퍼를 몰라봐서 서운하셨다면, 몇 달 사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에스퍼가 광고도 찍고, 스포츠카도 몰고 다닌다고요.”
다들 세상이 달라진 걸 알면서도 제멋대로 사는 삶이 좋아서 협회 에스퍼를 욕하고 머저리 취급 하고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정말로 몰랐던 건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반응을 보였다.
“가이드인 저조차도 밖에 나가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알아봐요. 에스퍼는 오죽하겠어요. 그리고 정식으로 에스퍼 등록만 하면 이런 가이딩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소년은 재하가 움직이는 대로 종이 인형처럼 팔을 흔들고 있었다. 모두가 꼭 잡은 손에 시선이 팔린 사이, 재하가 쐐기를 박았다.
“협회에 가이드 많아요.”
가이딩 부족으로 힘들어하던 많은 에스퍼의 눈에 열망이 깃들었다. 뻔하다면 뻔한 선전에도 혹할 만큼 감질나는 가이딩은 그들을 더 목마르게 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에스퍼 뒤로 영우가 멈춰 서자 재하의 웃음이 굳더니 이내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 늦었잖아요.”
어느새 소년의 손까지 놓아 버린 재하가 영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부하거나 놀라는 게 아닌, 평범한 재하의 반응에 영우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이들이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흩어져 멀어지는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재하가 내민 손에 손을 겹치자 그가 가볍게 붙잡아 왔다. 쥐는 힘은 약했지만,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으며 접촉 범위를 넓혀 오는 행동에서 친밀감이 느껴졌다. 예상과 다른 재하의 행보에도 기분은 좋았기에 현재의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재하야, 저 애 손은 왜 잡고 있었어?”
“여기 사람들, 가이딩이 뭔지 제대로 모르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시범도 보여 주고, 설명도 해 줬어요.”
“흐음…… 쟤들이 그런 거로 얌전해질 리가 없는데.”
“저, 여기서 계속 있을 텐데 규칙만 지켜 주면 가이딩 해 준다고 했어요.”
“그런 걸 왜 네 맘대로 정하니?”
“선배 손 잡아 주고 난 뒤에 남는 만큼만 해 주려고요. 그래야 저도 이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죠.”
재하는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 것을 가정하여 대화를 이어 갔다. 너무도 쉽게 상황을 받아들인 재하를 향한 의아함은 자연스럽게 넘어오는 가이딩으로 인해 지워졌다.
“재하 넌 나만 보면 되는데.”
“방금도 선배가 없었잖아요. 에스퍼가 얼마나 힘이 센지 자각 좀 해 주세요.”
“그렇긴 하지.”
“그리고 뭔가 보호받을 수 있는 아이템 같은 거 없을까요? 제가 가지고 있던 게 다 사라져서요.”
재하가 빈손을 보여 주자 영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씻기는 데 방해되어서 다 빼 버렸지. 거기에 방어 기능이 있는 거였니? 그런 것치고는 보호받지 못한 것 같구나.”
손등에 남아 있는 상처를 쓸어 만진 영우가 다시금 웃어 보였다.
“창고에 아마 쓸 만한 게 있을 거야. 내일 예쁜 거로 선물해 줄게.”
“당장 필요할 거 같은데요.”
“오늘은 나랑 있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자신을 가뿐히 안아 드는 영우의 웃음에 재하는 흔들리는 눈으로 감옥 안을 돌아봤다. 족쇄를 찬 도준이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