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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구한 보트에 강광의 목덜미를 잡고 올라탄 재윤은 선장에게 다녀온 뒤로 말이 없었다. 바다 위를 한참 달리는 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답답함을 참지 못한 강광이 겁도 없이 재윤의 근처에 앉아 방송을 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무심하게 앉아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재윤의 머릿속은 재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제발, 형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실험에 미친 이영우의 손에 떨어진 형을 한시라도 빨리 구해 내야 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회귀 전과 달리 이영우가 형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듯한 행동을 해 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애정을 요구하는 데에 흥미가 떨어지면 가이드를 실험하겠다며 또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었다. 그 전에 구해 내서 형과 함께 잠적해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진작 이렇게 결심했어야 했는데. 체계 자체를 안전하게 바꾼다는 허황된 꿈 따위 꾸는 게 아니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형을 지킬 수 없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설픈 각오였던 건 아니었는지 재윤은 계속해서 후회가 밀려왔다.
점점 무거워지는 재윤의 분위기에 강광은 꺼냈던 핸드폰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강광의 꼼지락거림에 언제까지고 무시할 것 같던 재윤이 손가락의 반지를 매만지다 먼저 말을 걸었다.
“그쪽 방송은 전부 봤어요.”
“헐, 설마 서재윤 씨도 우리 광광이였어요? 나, 방송 켜도 되나?”
곧바로 기가 살아 까불거리는 강광의 너스레에도 재윤은 표정 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무섭게 볼 것까지야. 어차피 바다 위에선 연결도 안 되는데…….”
설레발치던 강광이 기가 죽어 얌전해지자 재윤이 본론을 꺼냈다.
“그간 올린 영상을 보니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더군요. 그래서인지 남들은 담지 못한 장면도 여럿 담아냈던데, 어떻게 알고 온 건지 궁금했어요.”
“우리 광광이들이 워낙 정보를 잘 물어다 줘서 말이죠. 나도 정말 위험한 건 싫은데…….”
“내부에 사람을 심어 놨다 해도 지나치게 빠른 정보력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관련 이능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역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네요.”
구독자의 제보를 핑계로 빠져나가려던 강광은 이미 재윤이 알아챈 것에 감탄했다. 감추려던 것도 잊고 재윤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신기해했다.
“그게 느껴져요? 역시 A급은 다른가 봐.”
“각성했으면 협회로 오지 그랬어요. 홍보 팀으로 활동하면 더 편했을 텐데.”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말을 걸어오는 재윤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어찌 보면 편안하게 들렸다. 덕분에 강광도 긴장을 풀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게, 좀 애매한 이능이라서요. 대신 유튜버 하기 딱이랄까, 하하.”
“추적 능력이면 요긴하게 쓰일 텐데요.”
“아, 그런 식으로 오해했다니 미안하네요. 내 이능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트러블 메이커랄까.”
실실 쪼개며 툭 내뱉은 강광의 말에 재윤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갑판 위를 질질 끌고 가는 재윤의 거침없는 행동에 당황한 강광이 버둥거렸다.
“왜, 왜 이래요?”
“그쪽 이능이 사고를 유발하는 거라면 당연히 버리고 가야죠.”
재윤이 진심으로 강광을 갑판 밖으로 떠밀려 하자 그가 기겁하며 진실을 토해 냈다.
“악,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한 거! 트러블 메이커는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한 말이고, 실은 사건 탐지기 같은 거예요!”
강광의 답을 곰곰이 생각하던 재윤은 그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놀라 격하게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누르며 자신을 경계하는 강광에게 지금까지의 무표정 대신 대외적인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대화를 좀 더 할까요?”
“와…… 그거, 꾸민 웃음이었구나? 조금 어색하게 웃어서 진실성 있게 보이는 거.”
“강광 에스퍼.”
강광의 지적에도 재윤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워서 강광은 재윤에게 집중했다.
“그냥 강광이라 불러 줘요. 각성한 거 당분간 비밀로 가려고. 콘텐츠 떨어지면 그때 써먹으려고요.”
“알겠습니다, 강광 씨. 저도 입 다물어 드릴 테니 솔직하게 답해 줘요.”
웃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는 재윤의 행동에 이상하리만치 섬뜩함이 느껴졌다. 재윤은 긴장한 강광의 손을 붙잡아 보트 앞쪽으로 이끌었다. 불안해하며 발을 끄는 강광에게 재윤은 가볍게 질문을 이어 갔다.
“이능을 쓸 때 어떤 식으로 알게 되나요?”
“딱히 이능을 쓴다기보단,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라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건가요? 뭔가 보인다거나?”
환청이나 환시, 혹은 예지 계열인지 확인하고자 묻는 말에 강광이 눈을 굴리며 망설였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때그때 달라서요. 갑자기 특정 단어가 눈에 계속 들어오거나 안 가던 길을 걷다가 에스퍼 차량을 발견한다거나 하는 식이요.”
“오늘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온 건데요?”
“갑자기 처음 보는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감처럼. 그리고 이 근처에서 또 갑자기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렸더니 서재윤 씨가 보이더라고요.”
우연이라 부를 수 없는 직감이었다. 이능이 확실하기에 재윤은 다시금 기대를 걸었다.
“이능이 예감이나 예지 비슷한 건가 보네요.”
“그런 것치고는 로또 번호는 안 맞던데.”
“아마도 게이트나 특정 인물에 대해 이끌림이 있나 보네요. 그쪽 영상을 보면 매번 우리 형이 게이트에 나타날 때마다 찾아왔잖아요.”
에스퍼를 찍은 영상에는 딱히 누가 우선이랄 게 없었지만, 형이 비공식으로 나타난 게이트에서까지 강광은 촬영에 성공했다. 형의 외출이 극히 적었던 것에 비해 빠짐없이 남아 있는 영상 기록에 형의 스토커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재윤의 시선이 날카로워짐을 느꼈는지 강광이 빠르게 부정했다.
“그건 우연인 거 같은데요.”
“우연이라도 좋으니 말해 봐요. 당신의 직감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어둠이 내려앉은 망망대해에서 뭘 어쩌라는 건지 강광은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막상 보트 앞머리에 서자 어둠 속인데도 한쪽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저곳에 가면 유튜버 강광 채널에 올릴 만한 특별한 영상을 찍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어둠 한구석을 가리키는 강광의 행동에 재윤의 웃음이 일그러졌다. 이에 식겁한 강광이 급히 손가락을 접으며 뒤로 물러섰다.
“직감이라 틀릴 수도 있어요. 화내지 말고 말로 합시다.”
“고마워요.”
“엥?”
“그쪽…… 아니, 강광 씨. 당신 능력, 믿어도 될 것 같네요.”
자신만만하던 강광이 바로 꼬리를 내리는데도 재윤은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질 만큼 안도했다. 반지가 이끄는 방향과 강광이 가리킨 방향이 일치했기에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쩌면 배가 나가는 방향이라 지레짐작으로 맞힌 것일 수도 있지만, 작은 희망이라도 모조리 긁어모아 손에 쥐고 나아가야 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는 재윤을 힐끗거리던 강광이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고마우면 영상 좀 찍어도 될까요? 문제가 될 만한 건 편집할 테니까.”
겁먹은 지 몇 초나 지났다고 그새 기가 산 강광은 영상을 찍을 기회만 노렸다. 이런 사람이라 사건 감지 같은 엉뚱한 이능이 생긴 게 아닐까 싶어 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이든 형에게 도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모조리 이용할 셈이었다.
결정적일 때 도움도 안 되는 협회 따위 진즉에 버렸어야 했다고 이를 갈며 재윤은 어둠 속 어딘가를 바라봤다.
* * *
“집중 좀 하지?”
영우가 예상한 것보다 긴 시간 동안 백마혁은 그를 붙잡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왔다.
협회와는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며 대외적으로 활동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밑도 끝도 없이 길어졌다. 미래에 인정받는 조직이 될 거라며 당찬 포부를 꺼내다가도 어둠의 조직이 되어 법의 테두리 밖에서 에스퍼답게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은 에스퍼를 영입하자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를 위해 조직의 능력을 알려야 한다며 영우의 협조를 요구했다.
“마나 파동 측정기가 있다고 해도 말이지. 이번처럼 미리 손봐 놓은 상태에서 도심에 포털을 설치하고 크게 한 방 터트리는 건 어떤가?”
“이미 저번에 써먹은 방법인 데다 대형 게이트가 널려 있는 건 아니라서요.”
시큰둥한 영우의 답에 백마혁 역시 동의했다. 그에겐 이상은 있어도 실현시킬 계획은 늘 부족했다. 머리가 될 만한 놈은 들이는 족족 어찌 된 게 실종으로 이어지곤 했다. 몇몇은 힘쓰는 것밖에 모르는 조직원들에게 시달려 도망친 것 같지만, 이능을 쓰지 말라는 경고에도 은연중에 겨루기로 이어져 사상자가 생기고는 했다.
“그러니 이영우, 자네가 하고 싶은 걸 말해 봐. 뭐든 지원해 줄 테니.”
백마혁이 내놓는 여러 안건 중 어느 것도 영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미 영우는 가장 데려오고 싶었던 재하와 더불어 어쩌다 보니 딸려 온 S급 에스퍼까지 손에 넣었다. 한동안 틀어박혀 실험만 해도 충분히 즐거울 일만 가득했다.
영우의 시큰둥한 반응에 백마혁은 화를 내기도 하고 설득하려 하기도 했다. 한참을 붙잡혀 있던 영우가 혼자 두고 온 재하가 신경 쓰여 아예 문만 쳐다보자 백마혁이 손을 들었다.
“오늘 큰 성과를 봤으니 급하게 굴 건 없겠지. 가서 쉬고, 내일 제대로 이야기하자고.”
대답도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영우를 향해 백마혁은 혀를 찼다. 애초에 전력이 된다 뿐이지, 야욕은 없는 영우였다.
영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리자 백마혁은 주요 전력을 딴생각하게 만든 존재를 향해 불만이 튀어나왔다.
“마음만 먹으면 전국의 게이트를 제 맘대로 열고 닫을 수 있으면서 고작 가이드 하나에 만족하다니. 차라리 그걸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나.”
“그런 무서운 소리 마세요.”
백마혁의 짜증에 커튼 뒤에서 가벼운 질책이 들려왔다. 백마혁이 영우를 설득하는 동안 커튼에 가려진 소파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파트너가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며 앞으로 나왔다.
커튼을 치우며 나온 이는 허리 아래까지 찰랑이는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나른하게 감기는 눈꺼풀의 긴 속눈썹이 우아함을 더해 시선을 끌어당겼다.
“두통은 좀 나아졌나?”
“네, 이영우 군이 지난번에 데려온 가이드들 덕에 제 일이 줄어서 편안해요.”
백마혁의 파트너이자 조직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 사해라는 정신계 능력자로, 가이드의 존재를 몰랐던 몇 년간 에스퍼들을 위해 희생해 왔었다.
“그래도 이번엔 좀 쓸 만한 가이드가 충원됐으면 좋겠어요. 이전 애들은 효율이 너무 나빠서 몸이 먼저 망가지겠더군요.”
상냥한 미소였지만, 외부에서 데려온 가이드를 희생시키는 일에 가차 없는 평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