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방금까지만 해도 재하는 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물먹은 듯 축축 처지는 몸은 익숙해져 버린 가이딩 후 몰려오는 피로 탓이었다. 이 정도로 지쳤으면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자야 했는데 계속해서 들려오는 자잘한 소음이 재하를 깊이 잠들 수 없게 했다.
― 건드리지 마.
무엇보다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감정을 드러냈기에 무거운 눈을 억지로 떠야 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거구의 스킨헤드 남자가 도준의 멱살을 붙잡아 올리는 모습이었다. 친구가 위험에 처한 걸 본 재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도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버티는 중이었다.
필사적인 재하를 본 거구의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킬킬거렸다.
“이야, 이번 가이드는 성깔 좀 있나 보네.”
“걔가 그거잖아. 최초의 가이드인가 뭔가.”
“고등급 에스퍼만 상대한다던 그 귀한 몸 아니시냐. 살살 다뤄 드려.”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방심하는 틈을 타 재하는 도준을 끌어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 봤자 몇 걸음 만에 벽에 등이 닿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남자들 역시 재하의 어설픈 회피를 여흥 거리라도 되는 양 내버려 두었다.
재하는 곧바로 도준을 살폈다. 입술이 터지고 머리카락이나 옷이 흐트러진 걸 보아 구타당하고 있었던 걸로 보였다.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족쇄가 채워져 있는 도준의 모습에 재하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왜 날 따라와서 쥐어 터지고 있냐? 힘은 아예 못 쓰는 거고?”
“응, 미안.”
“니가 왜 사과를 해?”
미안한 마음에 도준의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던 것도 잠시, 누군가 등 뒤에서 재하의 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윽, 이거 놔!”
“자자, 소꿉놀이는 그만하고 이제 슬슬 가이딩 맛 좀 보자.”
“재하를 놔줘!”
끌려가는 재하와 남자 사이에 도준이 끼어들어 족쇄 찬 팔로 매달렸다. 일대일이라면 족쇄를 찼더라도 필사적인 도준이 버틸 수 있었다.
“야, 니들 보고만 있을 거냐? 이러다 시간 없어서 나만 먹으면 니들 손해인데.”
“족쇄 찬 놈도 못 떨어내면서 잘난 척은. 알았다, 알았어.”
거구의 남자가 시간을 언급하자 킬킬거리며 지켜보던 남자들도 합류했다. 재하를 지키려 매달린 도준을 두 사람이 붙잡아 떼어 내는데도 그는 완강하게 버텼다.
“이러지 마세요. 당신들이 짐승입니까?”
“하여간 협회 새끼들, 깔끔한 척하기는.”
이능을 봉인당하고도 여전히 정의로운 수호자를 본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을 걷어붙인 남자가 도준의 머리채를 잡았다.
“윽!”
“온실에서 자란 놈들은 일단 좀 패고 시작해야 한다니까.”
짝!
남자의 손이 도준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에스퍼의 강화된 신체가 만들어 낸 커다란 소리에 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도준아!”
도준의 고개가 옆으로 크게 꺾이자 이번엔 반대편 뺨을 후려쳤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도준이 노려보자 짜증 난 남자가 자비 없이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상황 파악 안 되지? 매를 버는구나, 벌어.”
정강이를 걷어차인 도준이 몸을 앞으로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 뒤통수를 후려쳤다. 휘청이는 도준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 남자는 여전히 기죽지 않는 눈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우리 서로 좀 쉽게 가자. 어차피 여기 들어온 이상 니들은 못 나가.”
무너지지 않는 도준을 향해 남자의 주먹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남자의 등에 가려져 도준이 보이지 않는데도 둔탁한 소리를 내는 주먹질에 재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 마! 도준이 때리지 마!”
재하가 아무리 소리쳐 봤자 소용없었다. 도준이 발길질에 차여 쓰러지자 거구에게 붙잡혀 끌려가던 재하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그래 봤자 남자의 손 하나 쳐 내지 못하는 미약함이었다. 부딪치는 곳마다 벽을 두드리는 것처럼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간 에스퍼들을 가이딩 하며 밀어내거나 쳐 낼 때면 순순히 비켜나 주던 이들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던 건지 알게 됐다.
짓누르는 손 아래에서 꼼짝할 수 없으면서도 재하는 할 말을 잊지 않았다.
“당신들, 가이딩 해 달라더니 사람은 왜 치는데?”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가 언제 귀한 가이드를 때렸나?”
“도준이한테 한 번만 더 손대면 절대로 안 할 거야, 가이딩.”
재하는 자신의 옷을 벗겨 내는 거구의 남자가 무얼 하려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도준의 안전을 먼저 챙겼다. 그런 재하를 향해 마치 자신이 더 강함을 어필하려는 듯 남자가 쓰러진 도준의 머리를 지그시 짓밟았다.
“와, 역시 S급은 이능을 못 써도 다른가 봐. 잘 버티네.”
“하지 마! 너희 같은 빌런 새끼들한텐 가이딩 절대 안 해!”
“가이딩도 못 받을 거면 스트레스나 풀어야지.”
발로 짓이기던 도준을 향해 축구라도 하듯 크게 발이 휘둘러졌다.
퍽. 퍽.
포대라도 두드리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에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도 도준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도준에게 자비 없는 폭력이 쏟아지는데도 재하는 막을 수단이 없었다. 그저 두려움에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소리칠 뿐이었다.
“때리지 마, 제발. 하지 말라고.”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하니까 서로 고생하잖냐. 얌전하게 굴면 어련히 알아서 잘해 줄까.”
“당신들한텐 절대로 안 해, 가이딩.”
“벌벌 떨면서 협박해 봤자 귀엽기만 하지.”
영우가 공들여 씻긴 덕에 보송보송해진 재하의 얼굴을 손안에 쥔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셔츠의 단추가 뜯어져 드러난 뽀얀 가슴 위로 손을 내리는데 밋밋함에도 손에 착 감기는 야들야들한 피부 감촉이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졌다. 일부러 엄지로 가슴 한쪽을 건드리며 뭉근하게 눌러 자극을 주는데도 당사자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재하의 모든 감각은 도준에게 향해 있었다. 초조해하는 두 눈엔 자신에게 닥칠 위협이 아닌 친우의 상처를 걱정하며 애타는 감정만이 가득했다.
“뭐야, 왜 안 돼?”
무엇보다 이렇게나 피부를 만져 대는데도 가이딩이 되지 않았다. 오목하게 들어간 복부를 손바닥 전체로 쓸어내리는데도 넘어오는 감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구의 남자의 느긋하던 표정이 굳어졌다. 허리 아래까지 손을 내려 쥐는데도 아무 느낌이 오지 않았다.
“윽, 그만 좀 만져요. 그렇게 해도 가이딩은 안 되니까.”
“뭐야? 왜 가이딩이 안 되지?”
남자가 재하를 건드리기 시작하자 도준은 두 남자에게 밟힌 채 기어 오려 했다. 그런 도준의 모습에 재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준아, 움직이지 마.”
“크큭,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오~ 가이드가 에스퍼를 걱정해 주는 걸 보니 막 설레는데.”
“난 괜찮으니까 가만히 있어.”
남자들의 빈정거림에도 재하는 도준을 걱정할 뿐이었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도준이나 재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괜한 반항은 몸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물론 도준에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준이 무력한 척 바닥을 기고 있는 건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재하를 지켜보는 게 기꺼워서였다. 거구의 남자에게 깔려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몸이 만져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재하의 눈은 죽지 않았다. 어떻게든 눈을 맞추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약하고 갈취당하는 게 마땅한 존재이면서 오히려 자신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정말이지 때때로 재하가 보이는 순수한 선의와 애정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재하야.”
“가만있으라고. 더 다치면 용서 안 해.”
재하의 온전한 걱정에 도준은 가슴 안쪽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감각에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래, 도준아. 눈 감고 있어.”
도준은 미래에도 현재에도 수호자였기에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지금과 다른 미래에서 재하는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내내 아무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게 고작이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절망으로 습하게 젖어 들며 어둡게 가라앉다가 빛을 잃고는 했다.
그랬던 재하가 자신의 손을 타지 않은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도움을 받을 수도, 스스로 헤쳐 나올 수도 없는 위기 속에서도 재하는 신뢰로 가득 찬 맑은 눈으로 자신을 지키려 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재하가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지금의 이영우가 왜 재하 앞에서 그러는지 알겠군.’
현재와 미래의 기억이 만들어 낸 간극에 도준이 취해 있는 사이, 재하를 찍어 누른 남자의 기세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시발, 뭔데?”
지난번에 납치해 온 가이드들은 피부에 손을 대기만 해도 미미한 가이딩이 시작됐다. 거기에 접촉의 범위를 넓히고 강도를 더해 강제로 취할 때면 꽤 만족스러운 가이딩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친밀도에 따라 가이딩의 효율이 정해진다고는 하나 그 정도만이라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재하에게선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마치 일반인과 접촉한 것처럼 아무 변화도 일지 않았다.
손바닥 안에 가득 쥐어 자극을 주는데도 소용없었다. 당혹스러워하는 남자의 반응에 재하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는 것으로 감추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말했잖아. 빌런한테 가이딩 안 한다고.”
“이게 조절이 되는 거라고?”
대답하는 대신 노려보는데도 여전히 순하기만 한 재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한 미소를 보였다.
“일단 해 보자고. 쑤시다 보면 될지도 모르니.”
거구의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재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남은 옷마저 벗기려 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재하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러면서도 상처투성이가 된 도준과 눈이 마주치자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재하에게서는 절망 대신 버텨 낼 각오만이 느껴졌기에 도준은 이쯤에서 경고하기로 했다.
“이영우, 그 사람이 곧 올 텐데 괜찮나요?”
도준의 덤덤한 질문에 재하의 옷을 벗겨 내던 남자의 손이 느려졌다. 하지만 영우를 신경 쓰면서도 탐욕에 눈이 멀어 몸부터 들이댄 이들이라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
“보스 잔소리는 한번 시작하면 최소 30분 이상 붙잡혀 있으니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지.”
“이영우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아닐 텐데요.”
“야, 수호자인지 뭔지 입 좀 다물게 해. 정신 사납게스리.”
거구의 핀잔에도 조금 전까지 도준을 구타하던 남자는 머뭇거렸다. 충동적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영우의 존재는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차였다.
“당신이 건드리는 가이드, 이영우가 도심 게이트까지 열어 가며 원했던 사람입니다.”
도준의 말은 진실에 가까웠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30분이면 여유가 있으리란 단순한 생각으로 무작정 감옥 안에 들어왔던 세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말이 많던 남자가 먼저 창살 틈으로 밖을 살폈다. 아직 주변을 기웃대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영우가 멀리서나마 보였다면 티가 났을 것이다.
“영우 선배한테 말할 거야.”
도준이 준 힌트를 재하는 놓치지 않았다. 고작 영우에게 이른다는 어린애 같은 대처였지만, 힘없는 재하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민머리에 덩치 크고 손가락에 상처 많은 아저씨.”
재하의 위에 올라탄 채로 몸을 더듬던 거구의 남자가 흠칫 몸을 굳혔다. 이에 재하가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밟고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조곤조곤 말했다.
“까까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자세가 구부정한 당신이랑 붉은 고수머리에 주근깨, 목소리는 변성기 전인 것 같은 당신.”
재하가 보란 듯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영우 선배한테 전해 줄게. 당신들이 얼마나 우릴 불편하게 했는지.”
“아니,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래? 그냥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와, 여기 드럽게 좁네요. 신고식도 했으니 전 나갈게요.”
두 남자가 먼저 발을 빼자 거구의 남자도 가이딩이 되지 않는 재하에게서 마지못해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아쉬운지 허리를 한 번 손에 쥐었다 놓는 게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세 사람이 나가며 신경질적으로 세게 닫은 문이 커다란 소리를 냈다.
“도준아, 괜찮아?”
재하는 반쯤 벗겨진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도준에게로 달려와 그를 살폈다. 의식적으로 닫아 둔 탓에 가이딩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재하의 부드러운 피부와 따스함이 도준의 상처를 감쌌다.
“힘도 못 쓰면서 왜 개기고 그래? 눈 잘못 맞은 거 아냐? 이거, 엄청 부을 거 같은데.”
“옷, 제대로 입어.”
“지금 내 옷이 문제냐? 이 답답아, 왜 날 따라온 거야? 협회에 있다가 재윤이나 해일 형이랑 의논해서 구하러 와도 되는데.”
그랬다면 지금쯤 재하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라면 재하가 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이득이라 여겼을 자신이었다. 그러나 저를 지키고자 두려움에도 강하게 버티려 애쓰던 재하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꺾이기 전의 재하가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게 기꺼웠다.
“재하 널 어떻게 혼자 보내.”
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냐는 본심을 그럴싸한 말로 내뱉자 단단하게 버티던 재하의 눈이 습하게 일렁였다.
“하여간 착해 빠져서……. 제발 너부터 챙겨라.”
울먹이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자신을 끌어안는 재하의 품이 따뜻했다.
* * *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하면서도 재윤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형을 구하면 잠적해 버릴 테다.’
이제 더는 형을 다른 이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를 되뇌는 것만이 재윤을 버티게 했다.
추적에 쓸 만한 이능을 가진 이들은 죄다 견지호를 찾는 데 동원되어 기다릴 수 없었기에 재윤은 혼자라도 움직여야 했다.
다만, 해일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구해 둔 배에 도착한 재윤은 계속해서 뒤를 쫓는 인물에 대해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여기까지 따라온 솜씨를 보아 조금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자재가 쌓인 곳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계속 따라올 거면 앞으로 나와.”
재윤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망설였는지 잠시 조용하다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어 있던 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아…… 들켰네요.”
에스퍼 희귀 영상 유튜버로 거듭난 강광이 손에 핸드폰을 든 채 재윤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