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114화 (114/142)

114

백마혁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써야 했다.

“후우…… 우린 동료다. 동료끼리 주먹다짐하기 전에 대화부터 해야지. 하물며 네놈은 치고받기 전에 목숨을 끊어 버리니 과하다는 거다.”

“다들 손이 빠르니 경고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규칙을 어긴 건 미안해요.”

반성의 기미도 없이 툭 내뱉어진 사과에 백마혁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꾹꾹 누르며 뒤돌아섰다.

“다시는 동료에게 이능을 쓰지 마라.”

“네.”

가볍기만 한 영우의 대답은 진심이 아니었다. 백마혁 역시 그걸 알아챘으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면을 세워 주는 최소한의 답이었기에 적당히 만족했다.

“따라와. 다음 작전에 관해 이야기 좀 하자.”

부리나케 달려온 것치고는 시시한 정리였다. 백마혁이 한발 양보한 상황임에도 영우는 태연하게 제 할 말을 했다.

“재하부터 씻기고 갈게요.”

“……30분 내로 오도록.”

마음 같아선 영우를 물에 처박아 정신 교육이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놈이란 걸 알기에 백마혁은 주변 사람들에게 시체를 정중히 묻어 주라고 지시한 후 돌아갔다.

영우는 재하에게 몰리는 시선을 빠르게 피하고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감옥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안쪽에는 제대로 된 욕실 설비가 존재했다.

바깥에선 시신을 수습하느라 어수선한데도 영우는 개의치 않고 욕조에 물을 받아 재하를 씻길 준비를 했다. 도와주는 이 없어도 발현한 에스퍼답게 힘이 세진 영우는 재하를 손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에 들어가도 안 깨네. 숨 쉬는 건 편안해 보이니 괜찮겠지?”

영우가 대답 없는 재하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며 씻기는 사이, 백마혁이 경고한 30분의 시간은 가뿐히 지나가 버렸다.

시간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영우는 실컷 공을 들여 재하를 깔끔하게 씻겼다. 무방비인 상대를 손으로 조몰락거리며 씻겨 가는 건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무엇보다 손이 닿는 곳마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가이딩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역시 애정이 있어야 제대로 된 가이딩이 되는 거였어.”

유마로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딸려 온 가이드의 손을 잡아 봤자 찌꺼기 같은 미미한 가이딩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에스퍼들이 억지로 가이딩을 시도할 때면 결과는 제법 괜찮았다고 하나 영우는 그런 쓰레기 같은 가이딩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재하 네가 직접 잡아 주면 좋겠어.”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는 재하를 씻기며 가이딩까지 실컷 채운 영우는 무척 너그러워졌다. 언제까지고 재하를 만지고 싶었지만, 문 앞에서 서성이는 인기척에 시간을 확인한 영우는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수건으로 감싼 재하를 안고 나오자 눈치를 보던 유순한 남자가 모포를 여러 장 겹쳐 바닥에 깔았다. 영우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자 황급히 떨어져 금방이라도 문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침대를 가져올까요?”

“아니. 어차피 내 방으로 데려갈 거니까 지금은 이걸로 됐어. 그보다 재하가 입을 옷 좀 가져다줄래?”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큰 수건으로 감싼다 해도 재하의 맨다리가 드러나는 게 신경 쓰였다. 문밖을 지키고 선 서너 명의 인원을 제외하고도 주변을 맴도는 발소리가 더 많았다. 다들 탐난다는 듯 재하를 훑어보는 시선이 불쾌했다.

“여기 괜히 데려왔나 봐. 그냥 둘만 있을 곳으로 데려갈걸.”

“저기, 이영우 님. 보스께서 당장 오지 않으면 직접 오시겠다고 하는데요.”

이미 한 번 들렀다 갔던 백마혁이 다시 내려온다는 소식에 영우는 잠시 망설였다. 동료 운운하며 쓰레기를 걱정하던 백마혁이었지만, 그가 뒤돌아서기 전 재하에게 시선이 머물렀었다. 백마혁의 이능은 아직 모르지만, 수장 격인 인물이다 보니 척지고 싶지 않았다.

“갔다 올게, 재하야.”

물기 어린 재하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영우가 마지못해 일어섰다. 영우가 문밖으로 나오자 말을 걸어온 소년이 소심하게 물어 왔다.

“가이드는 이영우 님 방으로 모실까요?”

“그…….”

대답하려던 영우는 시선을 피하면서도 이쪽을 신경 쓰는 이들의 탐욕스러움이 여전함을 읽어 내고 감옥 문을 닫았다. 가이드인 재하를 향한 이토록 뜨거운 관심은 무심한 영우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아무도 없는 제 방에 데려다 놓는 것보다 감옥에 두는 편이 더 안전해 보였다.

“아니. 갔다 와서 직접 데려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혹시 자리를 비웠을 때 안에 급한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소년에게 열쇠 하나를 넘겼다. 영우가 자리를 뜨자 주변을 서성이던 에스퍼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영상을 통해 접했던 가이드는 물론 S급 에스퍼를 보기 위해 눈높이에 있는 창살 너머로 머리를 들이대기 바빴다.

“저게 수호자야? 되게 평범한 학생 같은데?”

“S급도 족쇄 차니까 쪽도 못 쓰네.”

“바닥에 누워 있는 게 그 가이드죠? TV에 나오던 귀여운 애요.”

“귀엽기는, 그냥 평범하더구만. 뭐…… 피부는 볼만하네.”

저마다 감추지도 않고 제 할 말을 해 대는 틈으로 온순한 얼굴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영우 님, 옷 가져왔습니다.”

“이영우는 보스가 호출해서 여기 없는데.”

영우가 없다는 소리에 온순한 남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형님 시신은 어디 갔습니까?”

“그야 소각장으로 갔겠지.”

묻어 주라는 말에도 다들 귀찮아하며 대충 수습했을 게 뻔했다. 즐길 줄이나 알지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에스퍼들의 반응에 남자는 가까이 있던 이에게 옷을 던지듯 건넸다.

“쓰레기들.”

차마 영우 앞에서는 티 내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며 내달렸다.

얼결에 옷을 받아 든 스킨헤드의 거구가 어깨를 으쓱이며 감옥 문을 붙잡았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쓰레기며 빌런임을 자각하며 편하게 살고 있었다.

“이거 참~ 귀한 가이드가 감기 걸리면 안 되니 옷을 입혀야겠지?”

“그럼 그럼. 혼자 하면 힘드니까 나도 도울게.”

“새끼, 가이드만 보면 아주 앞뒤 안 가리고 덤비지?”

사람이 죽어 나간 걸 보고도 겁 없이 들이대는 인성 실종 현장을 지켜보기만 하던 도준이 몸을 일으켰다. 도준이 조용히 움직이는 동안에도 문 앞에선 열쇠를 가진 소년과 어른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욕망을 제어당하지 않는 에스퍼란 짐승 새끼와 다를 바 없었다. 현재의 협회는 그럭저럭 깨끗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미래는 빌런과 협회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내기에 적절했다.

‘재하가 페어를 고르면 나머지는 아웃이라니. 그런 이야길 들어 버린 이상 친구 자리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재하의 선택을 자신이 강제할 필요는 없었다. 마침 납치라는 적절한 상황도 생겨났으니 이용할 뿐이었다.

빌런들이 다투는 와중에 철창 안쪽으로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재하에게 입히는 일은 익숙했다. 항상 피로했던 재하는 쉽게 의식을 잃거나 의욕 없이 늘어져 있곤 했기에 자신의 손에 몸을 맡기는 일이 잦았다.

‘재하 몸은 원래 이랬지.’

이곳에 와서 옷을 입히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탄력 있는 피부가 손에 붙는 느낌이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점점 말라 가며 버석거리던 몸과는 전혀 다르면서도 피부에 코를 문지를 정도로 가까이 하면 익숙한 체향을 흠뻑 들이마실 수 있었다.

실컷 현재의 재하를 확인하며 느릿하게 옷을 입히는 동안 열쇠를 뺏은 이들이 누가 먼저 들어갈 건지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욕심 많은 이들의 실랑이는 시시했다. 그보다 손안의 재하를 만지는 게 더 이득이고 즐거움이었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처럼 수건을 주워 물기를 닦아 내며 뺨에 손을 댔다. 포털을 통과할 때 부작용으로 기절했던 재하는 욕실에서 영우에게 강제로 가이딩을 당했는지 파동이 흐릿했다.

이대로 둔다면 다음 날까지 잠든 채로 회복하겠지만, 강한 충격을 주면 깰 수 있었다. 뺨을 톡톡 두드리자 미간을 찌푸리다 다시 잠드는 걸 보아 쉽게 깨울 수 있을 듯 보였다.

“이야~ 공식 에스퍼랑 가이드라 그런가, 붙어 있는 게 자연스럽네?”

“거 협회에 있을 때 실컷 즐겼을 텐데 양보 좀 하쇼.”

“이 안에선 이능도 못 쓰니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요.”

먼저 들어갈 사람을 힘겨루기로 정한 건지 거친 숨을 쉬며 들어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감옥에 들어서면 모두가 공평하게 이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인원수가 많은 쪽이 유리했다. 거기에 도준은 양 손목이 붙어 손을 쓰기도 힘들어 보였으니 이들이 의기양양하게 구는 건 당연했다.

어느 모로 보나 불리한 상황임에도 도준은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곤란함이 담긴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재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사람에게 손대지 말아 주세요. 소중한 사람입니다. 다치게 둘 수 없습니다.”

타인을 지키면서도 그걸 요구하는 게 자연스러운 도준의 선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은 빌런이 될 만큼 인성 쓰레기인 이들에게 불편함을 불러왔다. 애써 힘으로 다른 에스퍼들을 제치고 먼저 들어온 세 사람은 일반인들이 열광하는 수호자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짜증을 냈다.

“S급 귀는 쩌리들 목소리가 안 들리나 보지?”

“이능도 못 쓰니 처맞으면 오지게 아플 텐데 왜 일을 귀찮게 만드나 모르겠네.”

“그냥 비키기엔 가오가 안 살아서 그런가 봐요. 적당히 몇 대 패고 시작하죠.”

도준의 의도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지키려는 마음을 짓밟고자 하는 악의는 선한 얼굴을 한 도준에게 폭력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도준에게 악의를 푸는 동안 거구의 스킨헤드 남자가 재하에게 다가갔다.

“그새 옷을 다 입혀 놨네. 쓸데없는 짓을……. 뭐, 선물은 벗겨 먹는 맛도 있으니 상관없지.”

남자의 손이 재하의 셔츠를 잡아당기자 후드득 단추가 뜯어져 나갔다. 그걸 본 도준이 날아드는 발을 피하며 달려와 재하를 보호하듯 몸으로 막아섰다.

“건드리지 마.”

“아오, 씹. 니들은 둘이서 족쇄 찬 놈 하나를 못 잡고 있냐?”

짜증을 내며 도준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던 남자는 이상하게 무거워 팔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도 잘 들리지 않아 의아해하는데 도준의 허리에 매달린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들 뭐야? 도준이한테 뭘 하려는 건데?”

방금 막 깨어나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재하는 도준을 위협하는 존재를 보고 몸을 날려 친구를 붙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