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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처진 재하를 바닥에 내려놓은 영우가 멀뚱히 서 있는 우양희를 쳐다봤다.
“재하가 왜 이러지?”
“포, 포털 탈 때 마……나 없으면 히, 힘들어요. 기, 절해요.”
“그걸 왜 이제 말하니?”
어차피 포털로 데려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재하를 향한 걱정에 영우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영우의 질책 어린 시선에 놀란 우양희가 억울한 듯 입술만 달싹이다 자리를 피했다. 묵직해 보이는 철문을 열어 둔 채로 나가 버리는 부주의한 우양희의 행동을 도준은 조용히 지켜보며 주변을 살폈다.
도준은 등 뒤에서 사라진 포털의 기운에 고개를 돌려 눈으로 확인했다. 포털은 허공이나 벽 어디든 만들 수 있는 건지 단단한 벽이 보여 슬쩍 등을 기댔다. 벽 안에 마나를 잡아먹는 마석이라도 박아 두었는지 기대고 있는 곳에서부터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꽤 공들인 방인데.’
장신구처럼 생겨서는 착용하자마자 손목을 붙게 만드는 족쇄는 마나의 흐름을 멈추게 하더니, 포털과 연결해 둔 방은 마나를 빼앗아 사용하기 힘들게 만드는 벽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모로 보나 에스퍼의 감옥과 같았다.
애초에 에스퍼를 납치할 계획이었기에 이런 방에 포털을 설치해 두었던 걸까. 아니면 따라올지 모를 에스퍼를 대비해 둔 걸지도 모르겠다.
빌런 조직의 규모까지는 파악했지만, 내부에 들어온 적 없었던 도준은 기억 덕에 새로운 장소가 흥미로웠다. 마치 재하를 위해 붙잡혀 온 것처럼 위장했지만, 위기감이나 걱정 따위 조금도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숨도 쉬고 있고 체온도 정상인데…… 왜 정신을 못 차리니. 눈 떠 봐, 재하야.”
도준이 눈과 몸으로 장소를 파악하는 동안에도 영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바닥에 눕힌 재하에게 집중했다.
애초에 마나로 이루어진 포털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가이드가 이용했으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잠시 의식을 잃는 반응은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차단하는 것과 같아 다른 부작용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아직 포털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는 걸 보니 미숙해 보이면서도, 족쇄 형태의 마나 구속구가 이 정도로 구현돼 있는 걸 보면 상당히 빠른 진행이었다.
‘미치광이 의사 같던 이영우가 엉뚱한 쪽으로 창작열을 불태웠나 보군.’
미래엔 협회를 위한 실험이라며 가이드인 재하에게 열중하던 영우는 이곳에선 빌런이 되어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재하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납치해 왔으니 내장까지 헤집어 가며 모든 걸 알아내려고 하지 않을까 짐작하며 지켜보는데 영우의 행동이 예상보다 다정했다.
“재하야, 눈 떠야지. 어서 날 보고 손잡아 줘.”
여전히 의식이 없는 재하에게 영우는 계속해서 눈을 뜨고 손잡아 달라며 흔들어 댔다. 주인의 사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고양이 같다고 도준은 생각했다.
도준이 이토록 느긋할 수 있는 건, 마나 제어 기능이 있는 구속구를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이었다. A급 에스퍼조차도 일단 차면 체력만 남다른 일반인이 돼 버릴 정도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구속구는, 연구소에서 만든 아이템 중 가장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협회에서도 아직 드러내지 않은 물건을 빌런 조직 쪽에서는 당연히 써먹을 줄 알았기에 언급했고, 자신의 손목에 채웠다.
‘언제든 풀어 낼 수 있으니 상대를 방심시키기에 좋지.’
구속구의 파쇄법은 순환하는 마나를 강제로 멈출 수 없을 만큼 과다하게 힘을 먹이면 되는 단순 무식한 방법이었다. 다만 그러려면 가진 마나의 양이 상당해야 했는데 A급 중에는 거의 없었고, S급인 도준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영우의 등급은 특이성 덕에 S급이었지만, 마나의 양은 도준에 비해 한참 부족했다. 그렇기에 구속구의 실험은 A급까지밖에 못 해 봤을 터. 의심 없이 S급도 구속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상대방을 향해 순순히 저를 데려가라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구나. 일단 더러운 것부터 씻겨 줘야겠어.”
마치 핑계를 대듯 혼잣말처럼 속삭인 영우가 재하를 안아 들었다. 지금까지 방관하는 척 상황을 살피던 도준이 걱정하는 표정을 만들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재하를 어디에 데려가는 건가요?”
“어디긴. 씻기려면 욕실로 가야지.”
“저도 도울게요.”
도준은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영우와 재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도준을 영우는 지그시 바라봤다.
도준이 손목에 찬 구속구가 서로 달라붙은 건 순환해야 하는 마나를 양쪽에서 붙잡아 흐름을 끊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묶인 마나로 인해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에스퍼는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주고 실험에 참여시켰어도 당황했다.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며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재하를 위한다며 스스로 손목에 족쇄를 차고 따라온 도준은 족쇄를 찬 순간을 제외하곤 평온하기만 했다.
영우가 보란 듯이 피에 젖은 재하의 옷을 벗겨 내는데도 경계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돕겠다며 다가오는 행동은 수상하진 않아도 꺼림칙했다.
“거기 있으렴.”
미약하긴 해도 영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저지하자 도준은 재깍 자리에 멈추어 섰다. 순순한 인질의 태도에도 영우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여간해선 타인에 대해 이렇다 할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는 영우였기에 도준으로 인해 생겨난 감정이 거슬렸다.
“밖의 두 명만 들어오세요.”
“네, 들어가겠습니다.”
“오~ 두 명이면 돼?”
긴장으로 굳은 유순한 외형의 남자와 껄렁거리는 키 큰 남자에게 영우는 턱짓으로 도준을 가리켰다.
“감시하세요.”
“얘도 가이드야? 이런 타입은 별로 안 땡기는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어? 수, 수호자 아닙니까?”
워낙 전파를 많이 탄 얼굴 중 하나였기에 금세 도준을 알아봤다. 도준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뭘 쪼개고 앉았냐?”
키가 크고 날카로운 인상 쪽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다가와 도준의 다리를 걷어찼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신음조차 없이 뒤로 물러서는 도준의 반응에 유순한 외모의 남자가 당황하며 키 큰 남자를 말렸다.
“혀, 형님, 수호자한테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니미, 수호자는 무슨. 이능도 못 쓰게 해 놨는데 뭘 그렇게 겁내냐?”
키 큰 남자가 다른 남자를 귀찮다는 듯 밀어내며 얌전히 쳐다보기만 하는 도준에게 다가섰다.
“밖에선 수호자라고 치켜세워 주니 좋았겠지. 쓸모없는 일반인 보호나 하니까 그것들이 에스퍼 무서운 줄 모르고 헛소리를 해 대고 말이야.”
키 큰 남자가 계속해서 도준에게 시비를 거는 동안 영우는 신경 쓰지 않고 재하를 안아 들었다. 영우의 행동에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재하에게로 향했다. 도준을 향해 이죽거리던 남자의 얼굴에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탐욕스러운 생기가 돌았다.
“영우야, 그건 뭐냐? 되게 맛있어 보이는데 혼자 먹으려고?”
평소라면 입이 거친 조직원들의 무의미한 음담패설에 반응하지 않던 영우가 멈추어 섰다. 정확히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간 영우가 남자를 돌아보자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그가 냉큼 다가갔다.
“그거, 가이드지? 여기까지 파동이 느껴지는 거 같은데. 너 다음에 나도…… 컥!”
키 큰 남자는 제 가슴에 박혀 있는 영우의 손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당황했다. 애초에 남자는 제게 다가오는 영우의 손을 보고 경계하지 않았다. 영우가 가진 이능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데다 이 방에선 사용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밖에 서 있는 영우는 영향권 밖이었다.
“여, 영우야, 왜, 왜 이러는데? 조직원끼리 이능 사용 금지인 거 알잖냐.”
당황한 남자가 더듬거리면서도 규칙을 언급했지만, 손의 절반이 보이지 않는 상태의 영우가 귀찮다는 듯 손목을 돌리려 하자 남자가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내가 잘못했다! 괜히 헛짓거릴 해서 언짢게 한 거 사과할게. 아니, 아예 입 꽉 닫고 있을 테니까 한 번만 봐주라. 얌전히 수호자 지키고 있을게.”
필사적인 남자의 부탁에 영우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에 안도한 남자의 시선이 유난히 매끈하게 빛나는 재하의 새하얀 등을 힐끗거렸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제 눈 하나 간수 못 한 남자의 탐욕을 목격한 영우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커억!”
격심한 고통에 남자의 신체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꺽꺽거리며 부들거리는 남자의 위로 영우의 손에 묻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 저도 사과할게요. 그쪽 눈 굴리는 게 기분 나빠서 손에 힘이 들어갔네요.”
툭툭 손을 털고 뒤돌아서려던 영우는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온순한 남자 외에도 많은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방 밖에 서 있던 여러 시선이 재하와 자신에게 향하는 걸 보고 더욱 불쾌해졌다.
눈이 마주치자 다들 시선을 돌려 딴청을 피웠지만, 도망치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두려움 속에 가득 담긴 탐욕은 빌런다운 이기심을 드러냈다.
영우는 다시 감옥으로 들어섰다. 이곳의 에스퍼들은 대부분 가이드에게 손을 댄 이들이었다. 저급한 시선에 재하가 노출되는 게 싫어 벗겨 둔 셔츠를 가지러 들어갔던 영우는 등 뒤에서 다가오는 거친 파동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영우, 네 이놈! 감히 내 집에서 동료를 해쳐?!”
감시라도 하고 있었는지 그새 달려온 백마혁의 노성에 영우는 재하를 눕히고 셔츠로 몸을 가렸다.
백마혁은 영우가 누군가를 챙기고 있는 모습에 그토록 요구해 왔던 서재하를 기어코 데려왔음을 알아챘다. 이번 일은 협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필요한 가이드를 납치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영우의 조력 덕에 성과는 좋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직에서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
백마혁은 본거지를 제집이라 말하고 부하와 다를 바 없는 조직원들을 동료라 부르며 애정을 드러낼 만큼 아끼는 한편, 양아치처럼 성질 급한 에스퍼가 가이드를 험하게 다룬 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에스퍼 지상주의인 백마혁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 가이드가 조직의 유망주가 입이 닳도록 찾아 대던 대상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컸다.
영우의 품에 안긴, 유달리 뽀얗고 말랑해 보이던 가이드가 더러운 셔츠에 가려질 때까지 주변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걸 백마혁 역시 목격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우의 불쾌함의 이유와 무슨 상황인지를 단번에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