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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의 시선이 끈질기게 다른 이에게 향하는 게 못마땅한 영우는 안고 있던 그의 허벅지를 조금 매섭게 두드렸다.
“윽!”
“재하 친구는 겁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나라면 절대 저걸 차고 적지에 들어서지 않을 텐데.”
“왜요? 도준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요?”
“재하야, 다른 사람 걱정하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면 내가 속상하잖니.”
조금 아프게 때린 허벅지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포털로 들어서는 영우의 거침없는 행동에 재하가 불편함을 언급하기도 전, 그의 시야가 흐려졌다. 포털 안으로 진입한 짧은 시간 동안 온몸이 허공을 날고 물속을 헤맨 것처럼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재하야?”
자신을 부르는 영우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 멀기만 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왠지 모르게 쇠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것 같아 어지러운 와중에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하야!”
도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도저히 어지러움을 버틸 수 없어 눈을 감아 버렸다.
같은 시각.
가이드가 모여 있던 강당은 어수선했다. 여러 곳에서 터진 폭탄과 실습을 위해 대기 중이던 에스퍼가 빌런과 대치하며 생긴 충돌로 인해 적들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권해일 에스퍼.”
갑작스럽게 폭파된 벽을 통해 나타난 권해일이 남아 있던 빌런들을 제압한 덕에 불안하긴 해도 공포는 없었다.
“으윽…… 다리가 부러진 거 같아요.”
“어떡해요, 제 친구를 데려갔어요.”
혼란스러운 와중에 빌런들이 가이드를 데리고 포털을 통해 사라지는 걸 목격한 이들도 있었다. 얼핏 봐도 가이드의 숫자가 부족했다.
“가이드는 이쪽으로 모이세요. 인원 파악이 급합니다.”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는 오른쪽으로, 다친 사람은 왼쪽 문으로 들어가서 치료받으세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교사들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처 포털이 닫히기 전 해일에게 붙잡힌 빌런들은 어떻게든 이능을 사용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때마침 제어 센터에 누군가 도착했는지 마나 제어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힘센 일반인 수준으로 변한 빌런들을 묶던 해일은 통신기 역시 정상으로 작동하는 걸 보고 안도했다. 빠르게 통신기를 눌러 도준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마나 제어기가 꺼진 정황과 빌런의 침입에 대해 조사를 시작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주도준이 로비로 향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초조해졌다. 그러나 통신기는 상대방이 수신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해일은 묶어 둔 빌런들을 가까이 있던 에스퍼에게 넘기고 급히 로비를 향해 달려갔다. 다들 강당의 소란을 듣고 달려오는 상황에 해일만 반대로 내달렸다.
‘재하가 무사해야 할 텐데.’
해일과 도준은 차를 타고 숙소에 다 왔을 때쯤 재윤의 연락을 받았다. ‘형 위험’이라는 짧은 메시지에 해일과 도준은 차에서 내려 길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작은 언덕을 뛰어넘어 보게 된 협회 한쪽은 실시간으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해일이 벽이 터져 나가는 강당 쪽으로 지체 없이 내달리려는데 도준의 행동은 달랐다.
“전 중앙 쪽으로 가 볼게요. 익숙한 마나가 느껴지네요.”
“알겠습니다.”
해일은 도준이 말하는 마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피해가 보이는 강당 쪽으로 향했다. 가이드가 대부분인 현장에 몇몇 에스퍼들만이 다수의 빌런을 상대하고 있었다. 폭발물이 있다는 정보에 조심하느라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가이드들 사이에 재하는 보이지 않았다. 도준이 향한 쪽에 무언가 일이 있으리란 불안감이 해일을 달리게 했다.
빠르게 도착한 로비는 검은 구슬투성이였다. 한쪽에는 웅크린 채 피 흘리며 쓰러진 남자가 보였다. 폭탄이란 생각에 본능적으로 멈칫했지만, 해일은 이곳에 굴러다니는 검은 구슬 중 어느 것에서도 마나가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가까워지자 피투성이인 남자가 익숙한 얼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천오 에스퍼?”
제복의 등이 다 찢어져 피를 흘려 내는데도 이런 상처를 입힌 도구는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이천오의 목에 손을 대자 다행히 맥박은 뛰고 있었다. 힐러가 이미 강당에 와 있는 데다 현장에는 이천오만큼 크게 다친 이가 없어 부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중앙 로비에 심각한 부상자 발생. 힐러 능력자 바로 보내 주십시오.”
통신기로 상황을 간단히 알린 해일은 제복을 벗어 이천오의 찢어진 제복 위에 덮었다. 이천오가 이 지경이 됐다면 재하의 안위를 따지기 힘들 것 같아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누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 길게 살필 것도 없이 한쪽으로 검은 구슬들이 없는 긴 길이 생겨 있었다. 그쪽으로 향했다는 걸 누가 봐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더미인 구슬들을 지나 안쪽으로 향하자 비품실임에도 텅 빈 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건…….”
고등급인 해일에게도 미약하게나마 마나의 잔재가 느껴졌다. 게다가 익숙한 마나의 형태였다. 조금 전 강당에서 사라졌던 포털이 남긴 것과 같아 헷갈릴 것도 없었다.
이곳에 포털이 있었으나 사라졌다. 처참하게 당한 이천오를 살필 때 등과 달리 배와 가슴 쪽에는 아무런 상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강당 쪽에서도 가이드가 납치되었다는 증언이 여럿 나왔다. 가이드 납치가 목적이었다면 재하를 노렸을 것이다.
이천오가 이렇게 될 때까지 재하를 지켜 냈다면, 납치된 지 얼마 안 됐으리라 여길 수 있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납치된 유마로와 가이드를 아직까지 되찾지 못했다는 걸 떠올리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견지호만 있었어도 숙소로 돌아오는 일이 훨씬 더 빨랐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빌런이 가이드를 납치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재하…….”
저절로 짓씹게 되는 입술이 터져 나가는데도 멈출 수 없을 만큼 초조해졌다.
그때, 쾅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간 문이 로비 한가운데를 굴렀다. 해일이 돌아보자 익숙한 마나가 금방이라도 폭주할 기세로 일렁였다.
이 상황에 누구보다도 분개할 서재윤의 등장에 해일은 그를 진정시키려 로비로 되돌아갔다.
“서재윤 에스퍼.”
다행히 재윤은 해일이 나타나자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오려던 마나를 빠르게 가라앉혔다. 언제 봐도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감탄이 나올 만큼 능숙했다.
“안쪽에서 포털이 있었던 흔적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재하는…….”
해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힐러가 붙어 치료하는 이천오를 확인했다. 재윤 역시 아직 의식이 없는 이천오를 확인하곤 해일을 바라봤다.
“형은 납치됐어요.”
“확신하는군요.”
“들었으니까요.”
재윤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여 주며 아이템을 통해 들을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천오가 시간을 끌어 주었지만, 저도, 당신도 늦었네요.”
“혹시 미래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로 해일이 물었으나 재윤은 손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이를 악물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마나를 불어 넣는데도 재하 쪽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템 주인이 의식이 없거나 미착용 상태라는 의미였다.
재윤의 기세가 말을 걸기 힘들 만큼 사나워졌지만, 해일은 지체할 수 없었다.
“납치된 가이드가 여럿입니다. 재하 역시 납치됐으니 아는 정보가 있다면 뭐든 공유 부탁드립니다.”
“그다지 위험한 거 없는, 이상만 거대한 빌런 조직이었어요. 돈은 넘쳐 나서 섬 하나를 통째로 기지화시키기까지 했지만, 그에 비해 하는 짓은 소소했거든요.”
떠올린 기억을 언급하는 건데도 빌런 조직에 대해 말할 때 재윤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거슬렸지만, 빠르게 털어 냈다.
“소소하다 해도 빌런이라 불릴 정도라면…….”
“물론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협회를 들쑤실 만큼 스케일이 크진 않았어요. 돈으로 가이드를 사면 샀지 이런 식으로 납치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네요.”
협회 소속이라고 해도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조건이나 돈으로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었다. 재하만큼은 그런 것에 넘어갈 리 없었고, 재윤이 그렇게 두지도 않았겠지만.
“제길, 이영우 하나 넘어간 걸로 제대로 빌런 짓을 해 버리네요.”
같은 편일 때도 쓰레기였던 이영우는 빌런 조직에 들어가자 날개라도 단 듯 활개를 펼치고 다녔다. 얼마나 내통자가 많은지 가드와 직원을 재배치하고 교육을 빙자한 경고를 했음에도 또다시 통신기가 먹통이 되고 마나 제어기는 풀려 버렸다. 안전해야 할 협회가 사각지대가 되고 무법천지로 변했다.
그로 인해 누구보다 지켜 냈어야 할 형을 잃었다.
이영우의 손에 서재하가 넘어가 버린 상황은 재윤에게 미칠 것 같은 초조함을 불러왔다. 해일이 곁에 있어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마나 제어기와 통신 설비의 권한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요.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 아니, 그냥 제어 센터 직원들은 전원 신문하고, 격리 센터 직원들에게 제어 센터를 맡겨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협회장이 자꾸 가이드에게 스폰을 붙이려고 하니까 못 하게 신경 좀 써 주세요. 당분간만 조심하면 에스퍼와 페어를 맺게 되면서 자연스레 제 가이드를 지킬 테니까 시간만 좀 끌어 주시면 돼요.”
협회장의 불법적인 행보를 전해 들은 해일의 표정이 굳었다. 해일에게 권해성은 어려운 상대였지만, 재윤의 조언이 더 우선이었다. 설령 권해성과 부딪쳐 불쾌한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가이드를 외부로 내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전 지금부터 형을 찾는 일에 집중할 겁니다.”
“방법이 있는 겁니까?”
“다행히 방향은 알 것 같아서요.”
반지에 마나를 불어 넣는 내내 미약하게나마 특정 방향에서의 이끌림이 전해져 왔다. 비록 소리나 상황은 알 수 없어도 한 쌍의 아이템이 이끌리는 성질은 그대로였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해일이 있다고 해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희미한 이끌림 하나로 참아 내는 중이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추적 능력자 한 명이랑 배 한 척만 있으면 돼요. 찾으면 연락할게요.”
방향을 특정한 재윤은 해일에게 뒤를 맡기고 주저 없이 밖으로 향했다. 함께 재하를 찾아 나서고 싶었으나 해일은 뒤숭숭한 협회 상황을 정리해야 함을 알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식을 찾지 못하는 이천오가 깨어나 어떤 정보라도 주길 바라며 해일은 바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