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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원치 않던 조우
지친 듯 힘이 빠진 재윤의 답에 등을 두드리던 재하의 손이 멈췄다.
“지호 한 명 빠졌다고 이렇게 맛이 가서 온다고?”
지호는 다양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만, 사람 한 명 빠졌다고 재윤이 이렇게 파김치가 돼서 돌아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B급 게이트 두 곳을 처리해야 했거든. 하필 하나가 지방 쪽이라 전력 나누기가 애매했고.”
협회장이 욕심을 내는 바람에 무리하게 잡아 둔 게이트였다. 오늘까지 처리하지 않으면 신생 길드에게 권한이 넘어갈 걸 우려한 권해성은 견지호의 부재에도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둘 다 오늘 해결해야 하는데 견지호가 없어서 이동이 안 되니 전력을 나눠 쓰는 수밖에 없었어.”
“그럼 너 혼자 게이트에 간 거야?”
“혼자는 아니고. 다른 에스퍼도 있었어.”
애매하게 답하는 걸 보아 그다지 전력도 되지 않는 신입 에스퍼들이 들러리처럼 따라붙었을 게 뻔했다. 재하의 표정이 굳는 걸 본 재윤은 지친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으며 변명했다.
“게이트에 대한 정보는 내가 잘 아니까 인원을 나누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어. 위험한 건 아니었으니까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막 몸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고생한 게 보이는데.”
“아, 이건…… 게이트랑 별개였어.”
무리해서 반나절 만에 게이트를 닫고 나온 재윤을 쉬게 하지는 못할망정, 협회장은 기어코 만찬 자리에까지 그를 불러들여 시현을 하게 했다. 마수 체액으로 더러워진 차림으로 나타났는데도 용맹하다며, 어떻게 잡았는지 보여 달라는 속없는 요청에 기가 찰 지경이었지만, 이런 협조 하나하나가 협회장과의 거래이기에 재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냈다.
은근히 가이드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며 탐욕스럽게 빛을 내던 권력자의 눈을 떠올리면 치가 떨렸다. 에스퍼의 여벌 목숨과 같은 가이드를 무슨 몸보신 거리라도 되는 양 탐내는 저속함은 변하지 않았다.
협회장이 국가 안보를 위해 애쓰는 청년들을 응원해 달라며 말을 돌리고 나서야 저마다 공치사나 해 대던 자리였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필요하지 않다면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광대 짓은 슬슬 그만해도 될 줄 알았는데. 피곤하다, 진짜.”
“힘들었겠네. 오늘은 푹 쉬어.”
재하의 말대로 쉴 수는 없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부산물과 아이템을 먼저 점검하려고 연구를 핑계로 선점하기 위해 로비까지 하고 온 상황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아이템 확인하러 가야 해. 견지호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으니 내일이라도 찾아가서 끌고 와야지.”
“음…… 지호가 진짜로 잠수 탄 건 맞냐?”
재하는 재윤이 힘들었을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호가 잠수를 탔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벼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지호는 꽤 성실했다. 남들과 달리 대충 하는 경우도 없이 성실했으나 동기들 사이에선 친구가 없어 그런 거라며 씹어 대곤 했다.
마나 파동이 꽤 안정된 재윤이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들었다.
“휴가를 안 주니까 잠수 탄 거 같아. 예전 여친이랑 여행 간 모양이던데.”
“그럴 리 없는데. 걘 한번 헤어진 상대랑 다시 안 만나.”
“어?”
“헤어지기 싫다며 강의실까지 쫓아온 여자애가 울다가 나간 적도 있는걸.”
마침 현장을 지나던 길에 목격한 거라 생생했다. 눈이 저절로 휙 돌아갈 만큼 예쁜 여자가 울먹이며 매달리는데도 웃는 얼굴로 거절하던 견지호의 단호함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랬기에 헤어진 여친과 여행을 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재하가 믿지 못하자 재윤이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형이랑 권해일이 데이트하고 나서 많이 상심한 거 같아. 정리했던 여친을 다시 만나는 걸 보면.”
“그건 아닐걸.”
“견지호가 원래 좀 가볍게 사람을 만나잖아. 형한테만 유달리 진심인 것처럼 굴었지만, 기회가 없다고 느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어.”
재윤의 변명 같은 설명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견지호의 부재가 재하 탓인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말을 계속 얹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들은 재하야말로 곤란해하며 헛기침까지 했다.
“그, 흠. 그런 거라면 정말 아니야.”
“응? 뭐가 아닌데?”
“해일 형이랑 데이트한 거로 걔가 날 포기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라고.”
이번엔 재윤이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기울이자 재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데이트하고 돌아온 날, 지호랑…… 2차 가이딩 했거든.”
지호의 최근 일정을 떠올리면 2차 가이딩까지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지호와 2차 가이딩을 했다는 건, 결국 스킨십의 영역이었다. 재윤은 제 형이 권해일과 데이트한 후 견지호와 키스를 할 수 있을 만큼 가이딩에 익숙해졌다는 게 놀랍고 또 새삼스러웠다.
재윤이 빤히 쳐다보자 재하는 서둘러 지호가 그럴 리 없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나 때문에 지 과거가 후회된다더라. 포기 안 할 거라고 했어.”
점점 기어들어 가는 재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재윤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둥켜안고 가이딩을 한 덕에 날뛰던 파동이 제법 가라앉은 터라 재하도 순순히 놓아주었지만, 갑자기 밖으로 향하는 재윤을 따라 움직였다.
“갑자기 어디 가?”
“견지호가 갔다는 무인도. 지금 당장 가 봐야겠어.”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 형은 여기 있어 줘.”
“너 힘 쓸 일 생기면 어쩌려고? 파동도 이제 간신히 안정됐는데.”
“올 거라면 권해일이랑 주도준이 오면 그때 같이 와. 가이딩도 해 주고.”
재윤은 방어 능력자 없이 재하를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 재윤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왜 매번 재윤이 먼저 나서야 하는지 재하는 답답했다. 따라나서던 재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멈춰 서자 재윤이 웃어 보였다.
“별일 없을 거야. 견지호가 형에게 거짓말한 거면 용서 안 할 거지만.”
“진짜로 여친이랑 놀고 있는 거면 죽~ 거기서 살라고 해라.”
“응, 그럴게.”
재하 나름대로 긴장을 풀기 위해 장난스럽게 한 말에 재윤은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답했다. 재윤이 빠르게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재하는 불안함을 떨치기 힘들었다.
지호가 단순히 놀러 나간 거라면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까지 능글맞게 굴면서도 간절한 속내를 비치던 지호를 떠올리면 이런 식으로 갑자기 다른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천오의 진지한 얼굴에 재하는 빠르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그럼요. 저야 항상 괜찮죠.”
해일과 도준이 돌아오면 재윤을 쫓아가야 했기에 미리 준비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게이트에 갈 때처럼 이것저것 가방에 챙긴 후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곧 도착할 겁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라 초조할 뻔했는데 다행히 해일의 톡이 도착했다. 방어 슈트를 챙겨 입는 재하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가방을 들고 나가자 낯선 가드들이 서 있었다.
“서재하 가이드님, 모시러 왔습니다.”
“앗, 감사해요.”
아무래도 해일과 도준이 도착할 때가 돼서 가드가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재하가 빠르게 백팩을 메고 나서자 가드들이 앞서고 이천오가 뒤를 따랐다. 온종일 문 앞을 지키는 이천오에게 항상 미안했던 재하는 앞에 선 가드들을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저분들이 데려다주실 거니까 이천오 씨는 돌아가서 쉬세요.”
“차량에 탑승하시는 것까지만 보고 가겠습니다.”
어차피 함께 내려가는 거니까 상관없겠다 싶어 재하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해 재하는 적당히 말을 걸었다.
“다들 늦은 시간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괜찮습니다.”
“가드분들이 너무 고생하시는 거 같아요. 숙소는 안전하니까 각자 훈련도 하고 개인 시간도 가지면 좋을 텐데 쉬지도 못하시고.”
재하는 가드에 관련된 주제를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 가려 했지만, 가드들에게선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 어색해진 재하는 앞서가는 가드의 발뒤꿈치만 보고 쫓다 이상함을 느꼈다. 언젠가 이천오의 불편해 보이는 차림에 대해 물었던 기억이 떠올라 돌아보니 그는 지정 제복에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앞선 가드들의 신발은 가지각색이었다. 고작 이걸로 의심하는 건 미안했지만, 재하는 질문 하나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 슬쩍 미끼를 던졌다.
“재윤이가 어디로 데려오라고 했어요?”
“장소는 기밀이라고 하셨습니다.”
즉각 돌아오는 답에 이천오의 얼굴이 굳었다. 당연히 해일과 도준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줄 알고 쫓아 나왔던 재하가 부러 재윤을 언급한 걸 알아챈 이천오는 재하의 앞으로 이동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앞서 들어가던 가드를 향해 이천오가 망설임 없이 발을 휘둘렀다.
“으악!”
“컥!”
육체 강화계로 각성한 이천오의 쇳덩이 같은 발 차기에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날아가듯 처박힌 가드들은 잠시나마 정신을 못 차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재하를 그대로 둘러멘 이천오는 바로 옆 비상계단으로 뛰어들었다.
“꽉 잡으십시오.”
“네, 넵!”
쿵 소리를 내며 묵직하게 닫힌 비상구 문을 찌그러트려 열기 힘들게 만들고 그대로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수십 계단을 연달아 뛰어내리는 동안 머리 위에서 쿵쿵거리더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금방 따라잡힐 거 같아요.”
“로비까지만 가면 다른 가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혹 따라잡혀 대치 상태가 된다 해도 여차하면 재하를 외부 개입이 힘든 훈련실에 데려다 놓고 다른 에스퍼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이천오는 재하가 끌어안은 목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가이딩으로 충분히 육체 강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눈 감고 계십시오.”
“아, 넵.”
1층에 도착하자마자 힘껏 바닥을 박차고 로비로 나선 이천오는 바닥에 새까맣게 깔린 검은 구슬에 그대로 멈췄다.
바람처럼 달려 나갈 것 같던 이천오가 멈춰 서자 눈을 꼭 감고 있던 재하 역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을 뜬 재하의 앞에는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잔뜩 보였다.
긴장한 얼굴로 벽에 붙어 서 있는 직원과 쓰러진 몇몇 가드들, 바닥에 깔린 검은 구슬.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내미는 익숙한 얼굴.
“데리러 왔어, 재하야.”
이영우의 웃음에 재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