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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에스퍼와 달리 각성하거나 이능을 발현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협회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축하해요, 누나. 등급은 잘 나왔어요?”
― 드, 등급? 그런 것도 있어?
가이드 검사를 통해 알게 된 거라면 이런 애매한 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갑자기 가이드가 된 거라면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갔기에 지호는 조금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검사받아서 안 건 아닌가 봐요?”
― 으응…….
“그럼 협회에 가이드 검사 신청해서 제대로 검사받아 보세요. 정식으로 등록하면 혜택도 받을 수 있어요.”
― 지호 네가 와 주면 안 될까?
“제가 에스퍼라서 가이드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요. 필요하면 가이드 관련 부서와 연결해 줄게요.”
― 에스퍼는 가이드랑 악수해 보면 안다며. 잠깐만 시간 내 주면 돼.
한때 연인이었고, 선을 지킬 줄 알던 이의 고집에 지호는 잠시 망설였다. 다른 때라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에게 흥미가 떨어져야 했는데 가이드란 말이 신경 쓰였다.
에스퍼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됐다면 가이드는 그 힘을 끊임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였다. 가이드는 에스퍼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 살기 위해선 이능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번 이능을 사용해 본 에스퍼가 힘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호의는 당연했고, 지호에겐 쉬운 배려였다.
게다가 가이드가 늘어나면 재하의 부담이 줄어들 확률이 올라갔다. 어쩌면 새로운 가이드가 다른 이의 페어가 되어 경쟁자를 줄여 줄 수도 있었다.
“이번 한 번만이에요.”
― 응, 한 번만. 지호야, 정말 고마워.
지나치게 고마워하는 상대의 반응에 헤어짐이 쉬웠던 건 자신뿐이었나 싶기도 했다. 지호는 아직 열려 있는 문을 조용히 닫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협회 건물 밖으로 나가야 공간 이동이 가능했기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밖으로 나가면 구 여친의 곁으로 공간 이동 하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로비에서 마주친 직원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바깥으로 향하며 상대를 떠올렸다.
긴 생머리에 연상의 여유로움이 편안했던 연인은 헤어질 때도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선을 지킬 줄 알기에 가이드가 되어 앞으로 자주 마주치더라도 거리감만 지켜 준다면 친구처럼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구 여친과 친구로 지내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묘하게 거슬렸다. 이 불편한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신경 쓰였다.
건물 밖으로 나온 지호는 이동하기 전 현 상황을 곱씹어 봤다.
지호에게 여자 친구가 많았던 건 누구도 특별하지 않아서였다. 재하와 친밀해지고 가이딩이라는 걸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감정이 요동치는 경험을 했다. 지호는 그걸 사랑이라고 여겼지만, 후유증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가이드와 가이딩을 하면서도 그 후유증을 경험하긴 했지만, 재하와 더 친밀해지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지호는 계속 거슬렸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특별한 사람이 생겨 여친들을 정리할 정도의 매너는 보였지만, 아직 자신의 사고방식은 예전과 같았다. 진심이 돼 버린 감정 사이에서 이질감을 불러왔다.
재하를 향한 진심이 습관으로 인해 퇴색된 것 같아 불쾌감이 들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지호는 손목을 들어 눈앞으로 올렸다. 목에 걸기 귀찮아 손목에 감아 둔 목걸이 장식이 흔들렸다.
“재하 선배가 좋아.”
목걸이가 반짝, 빛을 냈다.
“누구보다도 재하 선배가 우선이야.”
다시금 반짝이는 장식을 보며 지호는 불쾌감을 지웠다. 아이템이 자신의 진심을 확인해 주자 불편함이 가시고 안도감이 들었다.
미궁 던전에서 얻은 판별 아이템은 거짓말 탐지기 같은 거였다. 수없이 질문하더니 거짓을 말하지 않는 지호의 진심에 감탄하던 목소리가 내준 아이템이었다.
2차 가이딩을 핑계로 재하와 좋은 분위기를 만들 때 자신의 진심을 알리며 증거로 건네주려 했었다. 가벼운 태도 탓에 장난으로 넘기던 재하를 설득하기에 적절한 아이템이었다.
재하는 자신과 이전보다 친밀한 접촉은 허용하면서 감정적으로는 별다른 진전을 보여 주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증명할 단계조차 되지 못해 내밀지 못한 아이템이었다.
재하의 마음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여지를 줘야 감정을 전할 텐데 타이밍이 영 오질 않았다. 그러면서 해일과는 데이트하고, 친구였던 도준에게는 지나치게 곁을 내주었다.
‘아무래도 재하 선배는 착하고 진중한 남자가 취향인 거 같단 말이지.’
자신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도 가벼운 태도 탓에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를 위한 아이템이었지만, 일단 그 전에 재하의 테두리 안에 들어야 했다. 곁을 쉽게 내주는 것에 비해 테두리 안에 넣어 주지는 않아 애가 탔다.
“은근 철벽이란 말이지.”
쉬울 것 같던 재하와의 관계 진전이 이토록 어려운 건 경쟁자가 많아서였다. 공평함을 핑계로 재하에게 달라붙어서야 간신히 현상 유지를 하는 정도였다.
“반나절 데이트라도 해서 만회해야지.”
이번에 다녀오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 싶었다. 아이템도 사용하면 믿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된 지호가 구 여친을 만나기 위해 상대를 떠올리며 눈을 감고 집중하길 잠시.
훅 들어오는 짠 기 가득한 공기와 세팅해 둔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만큼 강한 바람에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은 몇 번이나 반복해도 새로웠다.
바다와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백사장은 아담하면서도 폐쇄적인 분위기였다. 연인과 함께라면 무척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조만간 재하를 데리고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호야.”
지척에서 들린 구 여친, 이희진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지호는 바다를 향했던 시선을 돌려 웃는 얼굴로 바라봤다.
“누나, 여행 왔나 봐요.”
“어? 어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이희진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희진은 대체로 어른스러웠지만, 뭔가 감추는 일에는 서툴렀다. 자신을 위해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를 준비했을 때도 지금처럼 긴장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만 지금 보이는 불안감은 정도가 지나쳤다.
“미안해, 지호야.”
설마 거짓말로 불러낸 건가 싶어 조금 불쾌해진 지호는 돌아가면 차단하자 생각하며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괜찮아요. 손잡죠.”
그래도 오죽하면 거짓말까지 해서 자신을 불러냈을까 싶었다. 가이딩 검사를 위해 내민 손을 이희진은 덜덜 떨며 붙잡았다. 예상대로 붙잡은 손을 통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느낌도 안 나요. 누나는 가이드가 아니야.”
지호가 바로 손을 놓으려 하자 이희진이 다급히 붙잡아 왔다.
“조금만 더 잡아 봐. 몇 초도 안 됐잖아.”
긴장한 데다 떨기까지 하는 이희진의 간절함에 지호는 조금 망설였다. 여지를 줘 봤자 끝난 인연이었다. 그런 지호의 마음을 알아챈 이희진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줘.”
“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협회에서 정식으로 검사를 받아 봐요.”
“그런 건 관심 없어. 난 지금 너랑 이렇게 있는 게 중요해.”
마침 붙잡힌 손 아래로 흘러내린 목걸이 장식이 반짝였다. 시도 때도 없이 반짝거려 옷소매 안에 넣어 둔 게 결국 또 진실을 확인해 주었다.
“눈 감고 나한테 집중해 줘.”
“후…… 알았어요. 딱 1분만 더 해 볼게요.”
지호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감자마자 이희진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덜덜 떠는 손이 목을 감싸 오기에 공간 이동을 해서 피해 버릴까 망설이는 찰나, 따끔하니 찔러 오는 감각에 감았던 눈을 떴다.
“뭐예요?”
목을 만지는데 반창고 같은 게 붙어 있어 떼려고 하는 순간 속이 뒤집혔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휘청이며 무너지는데 이희진이 다가오려 했다. 상대를 경계하며 이능을 사용하자 고작 몇 미터밖에 이동하지 못하고 눈이 빠질 것처럼 엄청난 두통이 엄습했다.
“으윽!”
“지호야, 괜찮아?!”
“오지 마!”
이희진이 무언가를 했다는 건 알겠는데 정작 해코지한 당사자가 더 놀라서 달려오려 했다. 위험을 피하려고 다시 이능을 사용하려 하자 이번엔 목 안에 쇠 비린내가 진동했다.
“우욱!”
“지호야!”
속이 진탕이 된 건지 토해 낸 건 한 움큼의 피였다. 이능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갖가지 통증과 증상에 지호는 일단 진정하려 했다.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엄습해 주저앉아 숨을 고르자 울렁임과 두통이 조금이나마 잦아들었다.
몇 미터 앞까지 달려와 더 다가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이희진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누나, 이거 뭐 한 거예요?”
“대답하기 전에 핸드폰이랑 통신기 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피를 토했음에도 불안하기보다 이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게 신경 쓰였다.
이희진은 분명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덜덜 떨며 눈도 못 마주치고 죄책감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협회와의 연락 수단을 없애기 위해 다가왔다.
이희진이 더 다가오기 전에 목에 붙은 패치를 떼려 하자 다급히 말려 왔다.
“그거 떼면 안 돼!”
“왜?”
“약이 한 번에 터져서 더 힘들어질 거랬어.”
“누가?”
“일단 핸드폰이랑 통신기부터 줘. 그래야 말할 수 있어.”
역시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건 이희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다기엔 지나치게 두려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