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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 가드 팀장이 됐을 때만 해도 김병태는 드디어 세상에 드러날 기회라 믿었다. 자신 역시 에스퍼임을 만천하에 떠벌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대성의 강압적인 비밀 엄수 조항 탓에 일반인과 다른 힘이 있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지내던 시절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달라진 세상은 고등급 에스퍼만을 집중 조명 했다. 에스퍼 자체가 아닌 S, A급 에스퍼에게만 열광했다. 그들 곁에 나란히 설 수 있을 줄 알았던 김병태는 각성 직후의 각성자를 협회로 이송해 온 것이 임무의 전부임을 알게 됐다.
“따까리나 하려고 대기업 꽁무니에 붙어 있었던 게 아니라고.”
수많은 각성자를 배출한 협회에서 고작 E, F급의 에스퍼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가드뿐이었다. 가드가 하는 일은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려고 협회 소속 가드가 된 게 아니었다.
이미 협회에 소속된 수많은 각성자로 인해 애매한 등급의 각성자들은 다른 길드를 찾아가기도 했다. 김병태 역시 발 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으나 고작 F급에 이능조차 없는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시발, 몇 년이나 부려 먹고 짐짝 취급이냐고.”
처음의 기대와 다른 하루하루는 가시밭 같았다. 김병태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 갔다.
팀장이 되자마자 담당했던 첫 에스퍼인 이영우가 빌런 측에 붙어 버린 일은 뼈아팠다. 이후 가드 대부분이 딱히 에스퍼와 친분을 맺지 못한 걸 알면서도 김병태는 그를 놓친 게 아쉬워 미칠 것 같았다.
나날이 괴로움이 깊어지던 때, 이영우가 다시 나타난 건 김병태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행운이었다. 이영우가 속한 곳이 빌런 조직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신사 권해일이니 수호자 주도준이니 하며 히어로 노릇 하는 위선자들보다 에스퍼의 힘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 없는 이영우가 자신이 추구하던 모습이었다.
“협회 따위 망해 버리라지.”
이영우는 김병태에게 먼저 제안했다. 쓸 만한 정보를 주거나 협력한다면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성의를 보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협회의 대외적 이념인 국민을 위한 행보에 김병태는 불만만 쌓이던 차였다. 기꺼이 협회의 정보를 물어다 날랐다.
이영우는 몇 번이고 정보를 빼내는 걸 비롯해 F급 에스퍼가 하기 힘든 요구를 해 왔다. 다행히 홍보 팀 관리직인 친척, 김만태를 통해 이영우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다. 설마 그게 도심지에 게이트를 열고 협회 에스퍼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협조하는 일일 줄은 몰랐지만, 김병태는 이 정도 도왔으면 충분히 빌런 조직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영우는 A급 에스퍼와 가이드 몇을 데리고 가더니 연락이 두절되었다. 초조해진 김병태는 분노로 눈이 돌아가 가드들을 쥐어팬 탓에 팀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깟 가드 팀장 따위 이제 미련도 없지만, 이영우와 닿았던 줄이 사라진 것에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영우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타났다. 협회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줄 계획과 함께 김병태에게 마지막 제안을 해 왔다. 김병태는 기꺼이 그 손을 다시 잡았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협회에 꽤 큰 손실을 줄 수 있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빌런 조직에서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으리란 기대에 김병태는 모두가 잠든 시간,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견지호는 재하의 숙소에 올 때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평온함을 느꼈다.
숙소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점심 준비를 미리 해 두었는지 달짝지근한 데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더해져 없던 식욕이 솟았다.
눈에 보이는 숙소 내부 역시 자신이 머무는 곳과 같을 텐데도 분위기가 달랐다. 귀찮아서 내려 둔 두꺼운 커튼 탓에 차분한 분위기인 자신의 방과 달리, 얇은 커튼만 친 거실은 한낮의 햇살도 기분 좋은 따스함만을 비쳤다.
재하를 닮은 따스한 분위기에 평소라면 기분이 좋았을 지호는 불청객의 존재가 거슬렸다.
폭신한 소파에 찰싹 붙어 앉아 느린 가이딩을 이어 가는 도준과 재하의 모습은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다. 두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 것도 이해가 될 만큼 방 안 분위기는 나른했고, 온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지켜보자니 다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주도준이 달라졌어.’
도준은 자신의 견제 대상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최근 들어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간 자신은 재하와 가까운 곳에 머문 덕에 가이딩을 자주 하며 스킨십 횟수를 늘려 왔다. 처음에는 질색했던 재하가 익숙해지면서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 정도는 태연하게 받아 주기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 재하에게 다가간 자신과 달리 주도준은 오랜 인연 덕에 처음부터 친밀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재하의 사이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친구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간 보던 것과 달리 지나치게 달라붙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서로 머리를 기대고 있는 데다 도준은 한쪽 팔로 재하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가이딩을 위해 맞잡고 있었다. 팔과 손으로 재하를 끌어안다시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달라붙어 있게 되었다.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임에도 재하는 익숙한 일인 양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주도준은 매일 가이딩 하는 재하 선배에게 부담을 덜 주려고 거리를 두는 식이었는데.’
지난주까지만 해도 도준은 적정선을 지킬 줄 알았다. 해일은 호감을 드러내면서도 허락 없이 다가서지 않았고, 재윤은 내내 피해 다닌 통에 먼저 가이딩을 요청하는 걸 어색해했다. 이들 중 가장 선을 넘으려 애쓰는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 선을 도준이 훌쩍 넘어 과시하듯 내보이고 있었다.
‘게이트 다녀온 후로 이상하긴 했어.’
일주일 전, 도림을 끌어안고 울던 도준을 보며 감성적이거나 감정 기복이 심한 타입이라고 짐작했건만, 나른하게 늘어지는 분위기 속에 재하를 끌어당겨 품에 안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몰라도 도준 역시 페어 쟁탈전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도준을 견제하며 더 애쓰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 저, 왔어요. 저도 가이딩 해 주세요.”
재하에게 밀당을 시도했다간 영영 밀려 나갈 수 있었기에 계속 당기는 수밖에 없었다. 지호의 밝은 목소리에 눈을 감고 졸던 재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라, 벌써 왔냐?”
“벌써라뇨. 점심시간 다 돼 가요. 점심때는 권해일 에스퍼 온다면서요.”
“어, 그렇지.”
“선배 독점하려고 새벽부터 일하고 서둘러 온 건데……. 친구분은 휴가를 너무 알차게 쓰시네요.”
지호는 자신은 하루도 받지 못한 휴가를 일주일째 즐기고 있는 도준을 향해 가볍게 불만을 드러냈다. 이전의 도준이라면 미안해하며 순서를 양보하는 식으로 배려심을 드러냈을 테지만, 오늘의 도준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양보할게.”
말로는 양보한다고 하면서도 미안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행동인데도 보이는 감정이 달랐다.
“하암…… 가이딩 하자.”
한창 졸고 있던 재하는 눈을 비비며 졸음을 털어 내려 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하품은 숨기지 못했다.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보고 있자니 다른 남자를 가이딩 하느라 피곤해하는 재하가 자신 때문에 피로해졌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와 동시에 배려하고 싶은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오늘따라 유독 피로해 보이는 재하를 보며 욕심보다는 배려를 택했다.
“선배, 피곤해 보이세요. 들어가서 제대로 주무세요.”
“오늘따라 너무 졸려……. 좀만 잘게.”
느릿하게 일어선 재하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지호의 손을 당연하다는 듯 붙잡았다.
“선배?”
“점심은 찜닭에 불려 둔 당면만 넣어서 먹으면 되니까…… 후암…… 이따 해일 형 오면 도준이랑 챙겨 먹어.”
발을 직직 끌며 느리게 걸어가는 재하를 따라 걷던 지호가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이쪽을 보고만 있는 도준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상대에게선 이렇다 할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재하를 품에 안고 있던 도준이 내보인 감정은 친구 이상이었건만, 지금 보이는 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지호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재하에게 약하게 붙잡힌 손이 풀어질까 싶어 마주 잡았다.
몇 걸음 따라가니 재하의 방이었다. 전에 커다란 재윤과 함께 누워 있을 때 비좁아 보였던 싱글 침대에 재하가 먼저 드러누웠다. 지호가 의자를 끌어와야 하나 망설이는데 재하가 몸을 굴려 벽 쪽으로 붙었다.
“하암……. 전에 보니까 내가 자고 있어도 가이딩은 되더라고. 어차피 잘 거면 손잡고 가이딩 하면서 자려고.”
효율만을 따지는 재하의 느린 말투에 지호는 망설였다. 다른 때라면 냉큼 누워 버렸을 지호였지만, 거의 잠들기 직전으로 보이는 재하의 권유는 나중에 멀쩡한 정신일 때 후폭풍이 걱정됐다. 무엇보다 재하가 왜 이렇게까지 무방비 상태가 된 건지 의심스러웠다.
주도준이 뭔가 한 게 아닐까 확인해 봐야 할지, 재하의 유혹 아닌 유혹에 따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지호의 망설임은 짧았고, 행동이 빠른 남자답게 침대 위의 좁은 공간에 몸을 뉘려 했다.
윙. 윙. 윙.
진동으로 해 둔 핸드폰이 눈치도 없이 울어 대지만 않았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년간 학습된 습관 탓에 지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헤어진 후에도 미련을 놓지 못하고 연락해 오거나 매달리던 이들을 차단하다 보니 남은 여성의 연락처가 얼마 없었다. 그중 헤어질 때도 담백했던 구 여친이 이별 후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에도 집요할 정도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재하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통화를 끝으로 차단하자 싶어 손을 놓고 밖으로 향했다.
복도에 나와 전화를 받자 항상 침착했던 연상 여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그를 불렀다.
― 지호야, 나…… 너밖에 생각이 안 나서…….
“누나, 우리 좋게 헤어지기로 한 거잖아요.”
냉정하게 내치진 않아도 반기는 기색 없이 담담한 지호의 반응은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때라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오늘은 상대가 더 간절했다.
― 그런 거 아니야, 지호야. 나…… 나, 그거 된 거 같아.
“그거요?”
― 나, 가이드 된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