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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달라지지 않은 것
도준의 방문을 재하는 기꺼이 반겼다.
“아직 휴가 중 아냐? 어서 들어와.”
자신을 보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안으로 이끄는 재하의 반응은 도준이 기억하기에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도림이랑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며? 혼자 데리고 다니려면 힘들었을 텐데 나도 부르지.”
당연하다는 듯 도림을 돌보려 드는 재하의 모습은 익숙했다. 언제나 재하는 자신과 도림을 이웃 이상으로 가깝게 여겨 주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어머니나 툭하면 외박하고 대화도 거의 하지 않는, 호적상 남이 된 동생의 존재와 비교해도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까지 함께 다니는 자신 쪽이 훨씬 더 자주 보고 친밀했다.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재하의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날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대로 재하의 이웃집 친구로,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너, 되게 피곤해 보인다? 멍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 보여?”
“어, 손 줘 봐.”
옆에 앉으라며 소파를 두드리는 재하의 가벼운 태도 하나하나가 새삼스러웠다. 예전에는, 아니 어쩌면 미래에는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 벌벌 떨며 불안해하던 재하였다.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부르고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신기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재하에게 붙잡힌 손을 통해 부드러운 가이딩이 흘러 들어왔다.
“휴가라더니 힘 쓰고 다녔냐? 파동이 좀 거치네.”
“손잡는 걸로 되겠어?”
“너까지 주둥이 들이대면 진짜 피곤해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까지 푹푹 쉬는 재하의 반응에 도준은 잡힌 손을 마주 잡아 끌어당겼다. 가볍게도 끌어당겨져 휘청인 재하가 간신히 허리를 세우며 투덜거렸다.
“야, 장난치지 마. 심심하면 TV나 틀든가.”
“재하 너, 가이드 등급 B 나왔다며?”
“갑자기 등급은 왜? 이제 와서 넌 S급 에스퍼라고 자랑하려고?”
장난스럽게 코웃음 치는 재하의 반응에 도준은 잡은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끌어당긴 거라 휘청이던 재하가 버티지 못하고 도준에게로 쓰러졌다.
“아오, 너까지 왜 이러냐?”
자꾸만 다른 이와의 접촉을 드러내는 재하의 말에 도준은 비틀리려는 웃음을 삼켰다.
“재하야, 등급을 올리고 싶지 않아?”
“올리면 뭐 좋냐?”
“가이딩이 더 빨라지겠지. 효율도 좋아지고.”
효율이라는 말에 재하는 고민하는지 눈을 굴렸다. 망설임을 본 도준은 달라붙은 몸을 뒤집어 자연스럽게 재하를 소파에 눕혔다.
“등급을 올리는 건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돼. 재하 동생이 그렇게 등급을 올렸잖아.”
도준이 기억하는 재하는 S급 가이드였다. 항상 한계까지 쥐어짜 내진 가이딩 탓인지 미루다 받은 재검에서 한계를 모를 효율을 보였다.
손을 붙잡은 채 얼굴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쉽게 입술이 닿을 수 있었다. 2차 가이딩을 핑계 삼아 접촉 범위를 늘리려는 도준의 시도에도 재하는 피하지 않았다. 친구였다면 힘들었을 단계인데도 재하는 태연했다. 어느새 이 정도는 익숙해졌나 싶어 불쾌하면서도 다시는 닿지 못할 줄 알았던 존재와의 접촉에 기대가 됐다.
“그러니 나랑 가이딩 연습하면…….”
“박치기당하기 싫으면 비켜라.”
태연하다 못해 귀찮아하는 재하의 태도에 도준은 황당했다. 가이드가 에스퍼한테 무력을 행사해 봤자 아픈 건 당사자였다. 그런데도 재하는 당연히 자신이 비켜 줄 거라 여기며 장난스러운 협박과 함께 붙잡힌 손끝을 까닥거렸다.
재하가 보이는 순수한 신뢰에 도준은 이제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곳에서의 재하는 오래전 기억 속 그대로였다. 아무 경계도 없이 이렇게나 자신을 믿는 친구 서재하의 모습에 도준은 웃음이 났다.
“그래, 원래는 이랬었지.”
“뭐가?”
“이것도 재하, 너다워서 좋긴 한데.”
툭.
도준의 손이 스치듯 지나간 것만으로도 쉽사리 풀린 단추에 재하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손목을 잡아당기고 몸으로 밀어붙여 소파에 눕히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던 재하였지만, 도준의 손이 풀어낸 셔츠가 흐트러지는 상황에서조차 태연할 수는 없었다.
“뭔데? 왜 이렇게 느끼하게 굴어? 너까지 개호한테 배웠냐?”
이제야 위기감을 느낀 건지 붙잡고 있던 재하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봤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도준이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오면?”
도준에게 통할 리 없는 협박은 귀엽기만 했기에 셔츠를 젖히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당황한 재하가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더니 싱크대를 보고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기, 김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덕분에 의아함을 느낀 도준의 손이 멈췄다.
“저녁에 김치말이국수 할 건데 네 건 김치 빼고 줄 거야.”
“……뭐?”
“달걀도 안 넣어 줘. 같이 먹을 만두도 도림이만 줄 거야.”
도준의 행동이 멈추자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재하의 협박이 점점 늘어났다. 유치한 협박에 황당하기도 했지만, 도림의 몫까지 착실히 챙기는 재하를 빤히 보던 도준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지금 협박하는 거야?”
“먹는 거라 치사하긴 해도 네가 먼저 이상한 짓 했잖아.”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는 재하에게서 보인 건 경계심이 아닌, 가벼운 민망함과 부끄러움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도준은 그대로 힘을 빼고 재하에게 몸을 기댔다.
“윽, 너, 왜 이렇게 무거워졌냐? 근육 늘었다는 걸 이런 식으로 자랑하는 거?”
묵직할 텐데도 피부가 맞닿자 자연스레 이어지는 가이딩을 재하는 끊지 않았다. 재하의 셔츠를 벗기려 했던 상황에서 포옹으로 변한 것뿐인데도 다소 민망해할 뿐, 피하지 않았다.
다정하고 친근한 이웃, 아무렇지 않게 가장 좋은 걸 나눠 주고 힘든 일도 함께 해 주던 재하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런 걸 바라 왔던 건가. 그래서 이렇게나 웃음이 나는 거겠지.’
한결같은 재하의 모습에 도준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너무 귀엽잖아, 재하, 너.”
“뭐래, 미친…… 흡!”
갑작스러운 도준의 뽀뽀에 재하는 숨을 삼켰다. 도준이 재하에게 입을 맞춘 건 지극히 습관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몸을 붙이고 끌어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였다.
장난스러운 분위기에서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당기는 도준의 행동에 재하의 반응이 늦었다. 항의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입을 움직여야 했고, 그랬다가는 다른 이들과 그랬듯 뽀뽀가 키스로 변할까 봐 입은 꾹 다문 채 콧김만 푹푹 뿜어 댔다. 다행히 이런 반응이 먹혔는지 맞붙은 도준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떨어졌다.
“여기선 뽀뽀도 아직인가 봐?”
“여기고 저기고 간에 친구끼리 뽀뽀하는 건 아니지.”
셔츠를 풀어낼 때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재하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건 짜증이었다. 두려움이나 공포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라기엔 방금 선을 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재하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맞닿은 몸이 지나치게 달라붙어 있는데도 불편해하면서 짜증을 낼지언정 재하의 눈에 비친 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아함뿐이었다.
“안 무서워?”
“고작 이런 걸로 내가 널 무서워한다고? 어림도 없지.”
툴툴대는 친구를 보며 도준은 재하와의 첫 키스를 떠올렸다. 도림을 잃고 자신보다 더 많이 울었던 재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했다. 재하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집착은 상대의 죄책감을 건드려 허락을 받아 냈다.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재하는 받아들였다. 그때 재하의 눈에 깃든 감정은 혼란과 두려움이었다. 지금처럼 장난스럽게 코웃음을 치는 가벼운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뽀뽀가 징그럽지, 무섭겠냐? 게다가 가이드가 됐으니 익숙해져야 하고. 인공호흡 하는 거랑 비슷한 거지, 뭐.”
마주한 재하의 눈은 여전히 또렷했고,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재하와 마주하고 있자니 도준은 편안해짐을 느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친숙함은 도준에게 여유를 불러와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게 했다.
“재하야, 나……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
“야, 속일 거면 좀 노력해 주지 않을래? 너, 진짜 거짓말 더럽게 못하거든.”
“아닌데. 정말 힘든 거 같아. 가이딩이 필요해.”
도준은 생글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곤 재하에게 기대 손 하나를 겹쳤다. 뻔뻔한 도준의 거짓말에 재하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가이딩을 이어 갔다.
‘생각보다 가이딩이 느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느렸다. 벌벌 떨던 재하의 몸을 억지로 열어 이어 가던 가이딩에 비해 느리고 온화했다. 자극도 없고 답답할 만큼 효율이 낮은데도 이상하리만치 만족스러웠다.
눈을 감자 다정하게 이어지는 가이딩이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도준이 이렇다 할 행동 없이 기대고 있자 재하는 무거울 텐데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가이딩을 이어 갔다.
이런 온건한 분위기라니. 영영 다시는 얻지 못할 안식이고 평화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벌어진 셔츠 사이로 비친 살결에 직접 닿고 싶었다.
여기서 재하를 밀어붙이는 건 쉬웠다. 재하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걸 도준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또다시 갈취할 것인가. 현상 유지를 할 것인가. 한번 취해 버리면 되돌릴 수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손에 넣는다면 도림과 재하가 함께 웃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당분간은 이대로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에 도준은 얌전히 손을 뗐다.
“왜? 아직 안 끝났어.”
그 손을 또 덥석 잡아 가이딩을 해 주는 재하가 마음에 들었다. 역시 지금의 선택이 맞았구나 싶어 도준은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