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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온 재하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지호를 발견하고 유독 긴 하루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가이딩 때문에 기다린 거야? 연락하지.”
“데이트하러 가셨는데 먼저 연락할 수는 없죠.”
지호의 배려에 재하는 빠르게 숙소 문을 열었다. 뒤따라 들어온 지호는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재하를 끌어안아 왔다.
“선배, 2차 가이딩 해 주세요.”
목과 뺨에 맞닿은 피부를 통해 은은하게 이어진 가이딩으로 인해 지호의 마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 지금 상태면 가이딩 안 해도 되잖냐.”
“하지만 키스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해 주실 거잖아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2차 가이딩 해 주세요.”
태연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재하가 멈추어 섰다. 평소 이런 대화 흐름에 질색하며 밀어내거나 적당히 하라며 진심을 담은 짜증을 냈던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며 어깨에 지호를 매단 채 냉장고로 향하는 상황이 어이없었다. 이제 남자가 치근대는 게 일상이 돼 버린 것처럼 익숙하고 기분조차 나빠지기보다 귀찮은 정도였다.
“야, 너.”
“선배, 제가 얼마나 선배를 좋아하는지 모르죠?”
지호는 재하가 밀어낼까 싶어 재빨리 먼저 말을 꺼냈다. 장난기를 섞어 치근덕거리는 대신 끌어안은 그대로 속삭이듯 뱉어진 지호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저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한 게 처음인데, 선배가 알 리 없겠죠.”
“가이딩 해 달라더니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데.”
개호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수많은 연애를 동시에 해 왔던 지호가 진지하게 말한다 한들 재하에게 먹힐 리 없었다.
“매일 선배만 생각해요. 어떻게든 선배에게 한 번 더 닿고 싶어서. 선배의 손을 잡을 때마다 놓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미움받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귓가에서 전해지는 진지한 목소리는 무작정 외면하기 힘들었다.
“선배가 권해일이랑 데이트하는 동안 얼마나 참은 줄 알아요? 내일 데이트할 생각으로 열심히 참았는데 전 휴가도 없대요. 억울해서 못 살겠어요.”
휴가도 없다는 말에 지호의 칭얼거림이 진심으로 안쓰럽게 들려왔다.
“그런 게 어딨냐? 내가 같이 가서 싸워 줄게. 휴일 보장도 안 해 주면서 너만 휴가를 안 주는 건 말도 안 되지.”
재하가 편을 들어 주자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지호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선배는 정말 쉬우면서도 어려워요.”
“뭐라는 건데. 좀 놔 봐.”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지호의 손이 내려와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다른 한 손은 재하와 손을 겹쳐 붙잡아 왔다. 연신 어깨와 목을 비벼 대는 지호의 가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재하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뺨을 붙여 왔다.
“저요, 선배랑 데이트도 못 하고 오늘 방해도 안 했잖아요. 착하게 굴었으니까 상 주세요.”
“그게 무슨 착하게 군 거냐? 사람이면 당연한 도리지.”
재하의 핀잔에 등 뒤에 매달리듯 붙어 있던 지호가 마주 보는 자세로 바꿔 섰다. 여전히 허리와 손을 잡힌 채라 바싹 붙은 몸이 거슬려 재하가 뒤로 물러서려는데 지호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2차 가이딩 해 주세요. 아니면 정말 진한 키스 해 버릴 테니까.”
“너, 오늘따라 선 넘는다?”
“선배가 불공평하게 구니까 그렇죠.”
“뭔 소린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재하의 반응에 지호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 주었다.
핸드폰 화면에 비친 익숙한 스포츠카와 조수석 쪽으로 보이는 해일의 뒷모습 섬네일을 보아 영상은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게시자 이름을 보고 ‘강광 개새끼’ 소리가 절로 입 안에서 튀어 나가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이 새끼는 진짜 이능이라도 있는 거 아냐? 에스퍼 탐지라든가. 게이트에 들렀던 시간 되게 짧았는데 어떻게 이걸 찍냐.”
이전에도 한바탕 재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강광이 아예 파파라치로 생업을 바꾼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재하의 짜증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지호는 다시 손을 잡아 오며 서운함을 토해 냈다.
“남자는 다 늑대니까 첫 데이트부터 키스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선배가 밀어내지 않았잖아요.”
“그거까지 다 찍혔다고? 이거, 초상권 침해로 어떻게 못 내리냐?”
“……진짜로 키스했어요?”
“어? 영상에 찍힌 거 아냐?”
“저게 어그로의 전부였어요. 그래도 충분히 전후 사정은 예상할 수 있지만요.”
화면에 비쳤던 그게 전부였다면 안전띠를 매 주는 것 정도로 보일 수 있었다. 만천하에 키스하는 걸 알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자신을 떠본 지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일 형이랑 그걸 했다고 너랑 2차 가이딩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아니죠. 당연히 공평하게 기회를 주셔야죠.”
“이런 거에 무슨 공평이야.”
“한 사람하고만 친밀한 시간을 보내면 당연히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잖아요. 권해일과 페어를 맺을 게 아니라면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데이트는 나중에 하더라도 최소한 2차 가이딩이라도 공평하게.”
지호는 재하의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키스 대신 가이딩이라는 말로 계속해서 설득해 왔다. 전직 바람둥이가 하는 말이라 그런지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했다.
재하에게 찰싹 붙어 선 지호가 답을 기다리듯 눈을 맞춰 왔다. 다른 때라면 얼굴 치우라며 밀어냈을 재하는 진지한 지호의 얼굴을 보며 새삼 낯설다고 생각했다.
각성할 때쯤만 해도 지호는 항상 자신에게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동생의 권유로 친해지고자 반찬 통을 들고 집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지호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자신에게 플러팅을 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람둥이 특유의 느긋함과 자연스러운 꼬드김을 보이는 대신 초조함을 누르며 달라붙었다.
나눌 수 없는 감정과 시간을 공평하게 달라며 자신에게 매달려 왔다. 자신이 알던 지호에게서 볼 수 없었던 간절함이 안타까우면서도 씁쓸함을 불러왔다.
“……앞으로 데이트는 다 거절해야겠네. 무서워서 뭘 할 수가 있나.”
차라리 이번 데이트의 목적이 사귀는 거였다면 일이 쉽지 않았을까 싶었다. 여러 사람을 만날 이유도 없고, 애초에 데이트가 성립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재하의 한숨 섞인 투덜거림에 지호의 웃음이 흐려졌다. 재하가 진심으로 피곤해함을 알아챈 지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런 지호의 손을 이번엔 재하 쪽에서 잡아 왔다.
“너, 지금 억지 부리는 거 알지?”
“선배가 그렇게 느꼈다면 죄송해요.”
사과하면서도 지호의 얼굴엔 억울함이 비쳤다. 재하가 피곤한 건 지호의 억지 때문이 아니라, 변해 버릴 만큼 간절해진 지호의 상황이 안타까워서였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냐고…….”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가 매번 이런 식이라면 자신 쪽에서도 한발 양보하면서 맞춰 가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자. 2차 가이딩.”
각오나 비장함은 없이 가볍게 뱉어진 말에 재하는 스스로도 조금 놀랐지만, 자신보다 더 놀랐는지 생글거리며 웃던 모습 그대로 눈을 크게 뜨는 지호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꺼낸 말을 물릴 생각은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나, 라면이랑 이것저것 먹고 와서 양치 좀…….”
멈춰 버린 줄 알았던 지호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재하의 입에 민트 캔디를 밀어 넣었다.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구나 싶으면서도 손가락과 함께 들어온 민트 캔디의 화한 맛에 이를 세웠다.
“윽, 선배.”
“그걸 왜 안 빼고 버텨?”
잇자국이 난 손가락을 빼낸 지호가 황당해하며 재하를 쳐다봤지만, 이쪽은 당당하게 민트 캔디를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성질 급한 한국인에게 녹여 먹는 건 사치였다.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이 캔디를 씹어 대는 재하의 모습에 지호는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웃으며 달라붙어 왔다.
“선배, 그렇게 빨리 저랑 가이딩 하고 싶으셨어요? 빨아 먹을 틈도 없이 씹어 드실 만큼.”
“어, 그래. 후딱 해치운 다음 발 닦고 잠이나 자려고.”
태연하다 못해 긴장조차 없는 재하의 반응에도 지호는 굴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죠, 선배.”
“그냥 서서 해.”
손으로 하는 가이딩도 편안하게 앉아 진행하고는 했다. 그러나 지호와 소파에서 달라붙는 건 괜한 분위기를 탈 수 있어 재하는 서 있는 채로 진행하려 했다. 차렷 자세로 뻣뻣하게 선 재하의 모습에도 지호는 웃으며 다가왔다.
곧바로 얼굴부터 들이대리란 예상과 달리 지호는 손을 뻗어 가볍게 턱을 쥐듯이 매만져 왔다. 징그럽다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엄지손가락이 입술 위를 쓸어 만졌다. 턱을 쥔 손이 부드럽게 쓸어 올리자 고개가 들리고,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끌어 내리는 엄지손가락을 따라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졌다.
한 번의 손길에 키스하기 딱 좋은 자세가 됐음을 알아채자 태연하게 굴던 재하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잠깐이라도 안타까움을 느끼고 한발 물러선 게 억울할 만큼 지호는 능숙하게 흐름을 이끌었다.
“이건 가이딩이야. 2차 가이딩.”
다짐을 받겠다는 듯 빠르게 강조하는 재하의 말에 지호는 눈물점이 살짝 휘어질 만큼 진한 웃음을 보였다.
“물론이죠. 효율적인 가이딩을 위해 힘낼게요, 선배.”
“아니, 힘내지는 말…….”
입술 위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떨어지며 지호의 얼굴이 다가왔다.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 사내놈 얼굴이 가까워지는 걸 보고 있자니 1초도 못 참을 것 같아 재하가 눈을 감고 뒷걸음질 쳤으나 지호가 닿는 게 더 빨랐다.
톡.
입술이 아닌 코가 두드리듯 톡톡 건드리자 질끈 감겼던 재하의 눈이 조심스럽게 떠졌다. 뭔가 싶어 가늘게 뜬 눈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장난스럽게 휘어진 지호의 눈이 보였다.
“너, 뭔데엡…….”
턱을 감싸고 있던 지호의 손이 다시금 부드럽게 쥐며 입술을 벌렸다. 말을 하다 말고 겹친 입술에 떠올린 건 ‘이 새끼 이거, 역시 선수였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