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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안이 간질거리는 감동 같은 게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련의 흐름이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또 몰래카메라인 건 아니겠죠?”
“휴가 첫날부터 장난으로 호출했다면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해일의 눈빛이 진지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통신기를 재확인한 해일의 표정이 찌푸려지며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C급 추정 게이트가 곧 열릴 거라고 하네요.”
“많이 위험해요?”
“아뇨, 이 정도는 2세대 1차 에스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저까지 호출한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통신기를 통한 호출은 인근 10㎞ 이내의 에스퍼에게 보내진 긴급 알림이었다.
“그럼 안 가도 되는 건가요?”
“음…… 아무래도 주도준 에스퍼가 없으면 방어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화력 쪽이라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상당수의 각성자가 협회 소속이 됐지만, 아직 보호 없이 정식으로 활동하기에는 일렀다. 주도준과 견지호는 방어와 이동 특성상 바로 실전 투입이 되었어도 위험하지 않았지만, 해일이나 재윤처럼 전투에 특화된 각성자가 대부분이라 초반에는 방어 능력자의 존재가 필수였다.
해일이 계속 망설이자 재하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일단 가죠. 가서 해일 형이 필요 없겠다 싶으면 다시 밥 먹으러 와요. 해일 형이 필요한 상황이다 싶으면 전 어디든 안전한 데 가서 숨어 있을게요.”
해일은 재하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준 후 혼자 이동하려고 했었다. 그런 해일을 알기에 재하는 합리적인 제안을 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방어 슈트를 머리까지 꽁꽁 싸맨 재하의 모습에 해일은 아주 잠깐 고민하다 핸들을 잡았다.
“가는 동안 상황을 파악한 후 결정하겠습니다.”
“네, 저도 고집부릴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저도 게이트 다녀왔던 거, 기억하시죠?”
팔꿈치를 들어 힘차게 휘둘러 보이는 재하의 행동에 해일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해일은 재하가 위험을 몰라서 이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하는 항상 에스퍼의 일을 궁금해했다. 매일 가이딩을 하면서 재하는 많은 걸 물어 왔고, 진지하게 들어 왔다. 게이트 공략에 함께한 이후 재하가 정식으로 가이드 수업을 듣겠다고 하자 해일은 그간 그가 해 왔던 질문들이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해일은 재하를 지켜 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눈과 귀를 닫아 놓을 수는 없었다. 안전을 이유로 무조건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호출받은 장소는 꽤 가까운 거리인 데다 퇴근길 정체로 꽉 막힌 도로의 반대편인 도로를 탄 덕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은 협회 차량과 통제를 위한 인원들까지 더해져 상당수인 게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선명하게 드러난 게이트를 본 재하가 감탄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라니. 인정사정없네요, 진짜.”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
“어? 잠깐만요, 저기 재윤이가 있는데요?”
허공이 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게이트는 아직 반투명했다. 그러나 그 앞에 검은 슈트 차림으로 서 있는 재윤을 발견한 재하는 얌전히 차 안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렇군요. 함께 가겠습니까?”
“넵, 갈게요.”
해일 역시 C급 게이트에 재윤이 나와 있음에도 자신을 호출했다는 것에 의문과 걱정을 품고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때라면 재하를 차에 두고 갔겠지만, 여차하면 지호를 불러 공간 이동을 부탁할 생각으로 함께 움직였다.
재윤은 해일과 재하가 함께 오는 걸 보고 걱정하기보다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호출해서 미안해요, 권해일 에스퍼. 미안해, 형.”
“아냐, 난 괜찮아.”
재윤의 평온한 반응에 안심한 재하가 가볍게 답하자 해일이 질문했다.
“C급 게이트라고 연락받았는데 다른 게 있는 겁니까?”
“등급은 오히려 더 낮게 봐도 될 정도예요. 다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놓치게 되면 일이 커질 거라서요.”
“어떤 마수입니까?”
“메뚜기 같은 거예요. 밖으로 나오면 보이는 건 다 먹어 치워서 골치 아파지거든요.”
재윤은 회귀 전 방송을 통해 보았던 처참한 학교 전경을 굳이 해일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이 정도만 알려 줘도 해일의 눈빛은 단단하게 각오를 다졌다.
“전부 태웁니까?”
“네, 보이는 건 다 태워 버리세요.”
어딘지 모르게 악동 같은 웃음을 지은 재윤이 힐끗 재하를 보고는 해일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얼마 안 걸릴 테니 끝나고 다시 데이트하러 가시면 돼요.”
“서재윤 씨가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는군요.”
“곧 열릴 테니 전신 슈트로 갈아입으세요.”
해일이 슈트 착용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재윤이 재하를 챙겼다.
“형, 나랑 권해일 에스퍼가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동안 차에 가 있어. 문은 잠그고.”
예상보다 덤덤한 반응에 재하가 의아해했다.
“위험한데 왜 왔냐고 할 줄 알았는데.”
“방어 슈트 입고 있잖아. 설령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게 있더라도 쇳덩이까지는 안 씹어 먹거든.”
재윤은 재하의 손목을 붙잡아 통신기를 확인하곤 견지호 호출을 일 순위로 올려 두었다.
“게이트에서 개미 한 마리라도 튀어나오면 견지호 불러.”
과보호였지만, 재윤이 재하의 안전을 두고 이 정도나 타협을 한 건 상당히 양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재하는 위기 상황에 재윤을 두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네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견지호를 내 멋대로 쓸 생각 없어. 차에 있는 게 안전하다면 지금부터 가 있으면 돼.”
더 이상의 보호는 필요 없음을 말하던 재하는 말끝을 흐렸다. 여차하면 안전한 곳으로 피하겠다며 해일을 따라왔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으로 흘러가자 괜히 고집부렸구나 싶어서였다.
게이트라고 해서 다 같은 게이트가 아니었다. 자신이 있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게이트가 곧 열릴 것 같습니다.”
재윤의 등 뒤로 빠르게 슈트를 착용한 해일이 걸어왔다. 검은 슈트는 전투에 특화되어서인지 군더더기 없이 몸에 붙는 형태였다.
“그럼 난 차에 가 있을게. 두 사람 다 파이팅!”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차에 올라탄 재하는 선팅이 진한 창에 이마를 대고 열을 식혔다.
또 홀로 남아 버렸다는 게 속상하고 답답했다.
‘왜 나만 가이드인 걸까.’
에스퍼였다면 저들이 위험에 뛰어들 때 항상 곁에 있을 수 있을 텐데. 친한 사람들은 죄다 에스퍼인데 왜 자신은 가이드가 돼서 저들을 항상 떠나보내야 하는지 답답했다.
숙소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동안, 그들이 더러워져서 나타나더라도 다친 곳 하나 없이 성한 모습에 안심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찢어진 제복에 먼지나 마수 체액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와서는 상처 하나 없던 모습이 의아했었다. 하지만 힐러의 존재를 직접 겪고 나니 그간 이상하게 여겼던 일들이 이해됐다.
‘분명히 다쳤던 거겠지. 옷이 그 꼴이 났는데 안 다쳤을 리가 없어.’
태평하게 가이딩을 해 달라며 매달리거나 담담한 웃음을 보였기에 막연하게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만 와도 분위기가 무거웠다. 재윤과 해일은 시종일관 자신에게 다정했고, 편안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주변 사람들은 긴장으로 신경이 곤두선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괜히 바쁜 에스퍼를 붙잡고 고집을 부렸구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뜨거워진 얼굴을 창에 대고 있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얼마나 창에 열기를 식히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재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벌써 끝났어요?”
창밖에 보인 해일의 모습에 곧바로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한바탕 이능을 사용하고 왔는지 담담하던 해일의 말투가 다소 흥분한 듯 평소보다 빨랐다.
“재하, 함께 가죠.”
“네? 어딜요?”
밖으로 나온 재하를 이끄는 해일의 손이 뜨거웠다. 그만큼 격양된 해일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다 쓸어버리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오, 해일 형의 멋진 모습을 어필하시겠다는 거네요?”
재하 딴에는 자신을 챙겨 주려 하는 게 고마워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정작 해일의 한 톤 올라갔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네. 그런 속셈도 있습니다.”
이미 열기로 꽤 붉어졌지만, 더욱 목 언저리가 붉어진 해일의 솔직함에 재하는 웃으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게이트 입구가 높아 재하 스스로 올라가기 힘들었지만 해일의 도움으로 쉽게 올라섰다.
“그럼 한 방에 쓸어버려요, 불의 지배자답게!”
“하하…… 재하도 그 이명을 알아 버렸군요.”
중2병스러운 이명은 차라리 신사 권해일이 나았겠다 싶을 만큼 당사자를 부끄럽게 했다. 하지만 해일의 반응에 재하는 즐거워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은 해일의 배려에 금세 활기를 띠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말 그대로 불바다였다. 타오르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발밑으로 보이는 땅에 있는 모든 게 불타고 있었다. 불길은 제법 뜨거웠지만, 방어 슈트의 성능은 대단했다. 더위보다는 연기가 두려울 지경이었으나 재윤이 무언가를 했는지 연기가 오지 않아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다시는 하기 힘들 최대 규모의 불멍 경험에 재하는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에스퍼는 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되는 걸까. 두려움조차 없이 모든 걸 불태우는 현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이트 안에 마수 반응이 전혀 없어. 곧 닫힐 거야.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형이랑 권해일 에스퍼는 데이트 마저 하러 가요.”
게이트 안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윤의 축객령에 곧장 밖으로 나와야 했다. 밖으로 나와서도 재하를 안고 차로 향하던 해일이 한풀 꺾인 기세로 아쉬워했다.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불길이 너무 셌나 봅니다.”
“게이트 안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고 얼마나 더 멋진 걸 보여 주시려고요?”
황당해하는 재하의 반응에 차에 도착한 해일이 웃는 얼굴로 물어 왔다.
“좀, 어필이 됐습니까?”
“해일 형, 완전 최고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게 불편할 수도 있는데 해일이 보이는 호의는 이상하게 편안했다. 갑작스럽게 진입한 게이트가 불타고 있는 현장을 본 탓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데도 이렇게나 편안할 수 있다니, 신기했다.
재하를 자리에 앉히던 해일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허리를 숙여 안전띠를 매어 주던 해일은 일어서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재하, 데이트에 응해 줬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네?”
“제가 한 발, 더 나아가도 되겠습니까?”
“어…… 네……?”
뜬금없는 타이밍에 들어온 질문이라 재하는 해일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 탓에 약간 느릿한 재하의 대답은 의문형이 되었지만, 해일에겐 긍정의 대답처럼 들려 버렸다. 약간의 오류는 열기를 품은 해일을 움직이게 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온 해일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재하는 상황을 인식하는 게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