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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달라진 해일의 태도에 재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새로 제작된 방어 슈트도 재하가 입으니 무척 귀여워. 자꾸만 보게 되는군.”
해일은 나른한 목소리로 재하를 귀여워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이에 견디지 못한 재하가 손을 들었다.
“해일 형,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평소처럼 해 주세요.”
“하지만 재하 반응이 너무 귀여운데.”
“살려 주세요, 길마님.”
“하하.”
숨을 뱉듯 목 안에서 터진 장난기 가득한 웃음에 재하가 째려보자 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재하.”
“하아…… 감사해요.”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해일의 모습에 거리감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안도할 수 있었다. 재하가 편히 등을 기대는 것과 동시에 해일의 웃음기 섞인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재하가 귀엽다는 건 사실입니다.”
“악, 해일 형!”
“이건 양보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니까요.”
“우와, 진짜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다니. 해일 형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장난처럼 이어진 해일의 칭찬 세례에 재하가 질색팔색하는 동안 어느새 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르기는 하지만, 식사부터 할까요?”
“예약 시간 안 되지 않았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일이 변장할 생각도 없이 바로 차에서 내리자 재하가 급히 뒤를 따랐다.
“형, 얼굴 가려야 하지 않아요?”
레스토랑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해일은 불안해하는 재하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는 연예인이나 고위 관계자도 많이 오는 곳이라 손님들이 서로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런 곳이면 되게 고급스러울 것 같은데…… 이러고 가도 되나요?”
재하는 자신이 입은 점프 슈트 같은 방어복을 내려다보며 뻘쭘해했다. 그런 재하에게 해일이 가까이 다가서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잘 어울립니다.”
어울리느냐 물은 건 아니었지만, 해일의 장담에 재하는 어색해하는 대신 어깨를 폈다. 옷차림 때문에 쫓겨나면 다른 데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재하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직원의 정중한 안내가 이어졌다. 오히려 직원이 손님으로 보일 만큼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어 재하는 옷을 골라 준 동생이 살짝 원망스러워졌다.
안내받은 창가 자리에 앉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눈이 다 시원했다. 원래 예약한 시간에 왔다면 야경을 볼 수 있었겠지만, 노을이 지는 풍경도 충분히 보기 좋았다.
재하가 창밖을 보며 집중하는 모습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해일은 문득 떠오른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찰칵.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다 보니 기본 카메라 소리가 났고, 그에 재하가 돌아보자 그 모습까지 연달아 찍혔다.
“아, 노을을 찍으시려고요?”
재하가 몸을 뒤로 젖히며 창문에서 떨어지려 하자 해일이 핸드폰을 보며 웃었다.
“아닙니다. 서재윤 씨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요.”
그와 동시에 단톡방 알람이 울리며 사진이 떴다. 뭔가 싶어 열어 보니 해일이 보낸 자신의 얼굴 사진이었다. 노을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분위기 덕인지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어? 예약 잡기 힘든 데잖아요.
여길 첫 데이트에 데려간다고?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한 건 견지호였다. 둘이 합의했다더니, 카톡인데도 짜증 난 게 보일 정도로 연달아 톡이 올라왔다. 무엇보다 엄청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인데도 사진 한 장에 알아보는 지호의 눈썰미에 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이 떠올랐다.
형은 반대쪽 얼굴이 더 잘 받는데.
이어 날아든 재윤의 톡은 자기가 더 형을 잘 안다는 듯 어필하는 반응이라 수상했다. 데이트 때 입을 옷을 골라 주던 모습과 겹치며 역시 이 방어 슈트는 심술이었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했다.
그래도 이런 애매한 옷을 입고도 장소와 노을 버프로 볼만하게 나온 사진은 마음에 들었다. 아주 잠깐 나도 한 인물 하는 거 같은데? 라고 착각할 뻔했지만, 정면에 앉은 해일을 보니 사진 속 제 모습은 노을에 걸린 오징어처럼 느껴졌다.
“진짜 불공평하다니까…….”
레스토랑의 은은한 조명보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노을이 더 짙어 해일의 얼굴에 그림 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노을보다 더 눈길을 끄는 해일의 모습에 재하 역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무음으로 쉼 없이 담아낸 해일의 사진은 고르기 어려울 만큼 한 장 한 장이 화보였다.
단톡방에 해일의 사진을 올리자 다들 확인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물론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해일이 올린 자신의 사진에 즉각 반응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고서야 이런 화보 같은 사진을 보고 아무 반응이 없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방금 찍은 해일의 사진을 보자 연예인과 일반인의 격차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재하의 눈에는 제가 이렇게 보이는군요.”
“예?”
“이렇게나 멋있는 사람으로 봐 준다니, 기쁩니다.”
“……다들 단체로 안경 맞춰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반응 없는 애들은 물론, 앉아만 있어도 화보인 남자가 적당히 찍은 사진을 보고 감동하는 게 어이없었다. 레스토랑에 있는 사람들만 봐도 이쪽을 힐끗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일의 말대로 수군거리거나 다가오는 이는 없어도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아.”
“와아…….”
갑자기 사방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모두의 시선이 해일이 아닌 그 너머 창문으로 향했기에 재하 역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노을을 배경 삼아 비스듬하게 보이는 빌딩 상단의 옥외 광고판에 해일이 불꽃을 흩날리며 등장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반사되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격렬함과 화려함이 더해졌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며 재가 된 무언가가 해일의 발밑에서 부서졌다. 이어 차가우면서도 단정한 해일의 옆모습에서 정면으로 바뀌자 신뢰감 넘치는 미소가 눈부셨다. 그 아래 너무도 정직한 폰트로 ‘각성자 신고는 xxx-xxxx로’라는 공익 광고다운 문구가 떠올랐음에도 영화 예고편이라고 해도 믿겠다 싶을 만큼 해일의 존재만으로도 영상의 완성도가 올라갔다.
“와, 역시 대기업이라 그런지 광고에 돈을 엄청 들였…… 아, 아니지. CG도 아니고 해일 형 얼굴이 다 한 건데 돈은 별로 안 들었겠어요.”
건물 상단에 설치된 3D 광고는 TV로 볼 때보다 현실감이 넘쳤다. 해일을 돌아보자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해일 형?”
“여기서 광고가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라고 추천받아서 온 거였는데…….”
의도치 않았던 건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해일의 반응에 재하는 차 안에서 귀엽다며 놀림받은 걸 되갚을 기회임을 알아채고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괜찮아요. 저렇게 멋있는데 자랑해도 돼요. 멋있기도 하고요.”
“흠, 재하.”
“형, 불꽃 다루는 거 완전 멋있어요. 아까 형 주변으로 막 불길 타오를 때는 정말 히어로 같았다니까요.”
“재하…….”
“여기 사람들도 다 형만 보는 거 아세요? 다른 레스토랑이었으면 지금 다들 달려들었을걸요.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랑 밥을 먹다니, 영광이에요.”
진심을 담은 재하의 장난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해일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여전히 목이며 얼굴이 붉은 것처럼 보였지만, 곤란한 듯 굳어 버린 해일의 표정에 재하는 조금 심했나 싶어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만할게요. 진짜로 멋져서 하는 말이었어요. 화……나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아니라고 답하는 해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재하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재하가 빠르게 사과했다.
“엇, 죄송해요. 그, 제가 장난친 건 맞는데요, 진짜 진짜로 형이 멋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평소의 해일 형도 멋지지만, 못 보던 모습도 영상으로 막 보여 주니까…….”
칭찬할수록 부끄러워하는 해일을 보는 게 즐거워서 더욱 칭찬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정색할 줄은 몰랐기에 재하의 변명이 길어졌다. 안절부절못하던 재하가 테이블 위를 연신 긁는 것에 해일의 손이 다가와 겹쳤다.
“재하야.”
“네, 넵?”
갑자기 말을 또 편하게 해 버리는 해일의 태도에 재하는 바싹 긴장했다.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해일의 목소리에 절로 집중하게 됐다.
“아직 데이트다운 건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계속 칭찬만 하면 오해하게 돼.”
“무슨 오해인지 대화로 풀어 보죠.”
어쩐지 이 오해는 확실히 풀어야 뒤탈이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재하의 단호한 반응에 해일이 웃는 얼굴로 말을 하려는데 통신기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빠르게 연달아 나는 소리에 해일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습니다.”
“가 보셔야 하는 거면 먼저 가세요. 전 알아서 돌아갈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일단…… 같이 내려가도록 하죠.”
아직 애피타이저도 나오기 전이었지만, 해일은 카드를 꺼내 카운터로 향했다. 재하도 뒤를 쫓는데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둘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박수를 쳐 왔다.
“권해일 에스퍼, 힘내세요.”
“지켜 주셔서 고마워요.”
“가이드님도 파이팅!”
다들 아닌 척 이쪽에 신경 쓰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끝까지 모른 척했겠지만, 호출을 받자마자 주저 없이 일어서는 해일의 반응과 식사도 못 할 만큼 바쁜 에스퍼의 일상을 엿본 사람들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들의 박수와 응원에 해일은 가볍게 인사하며 웃음으로 답했다.
매니저 역시 해일이 내민 카드를 극구 사양하며 정중하게 부탁해 왔다.
“계산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약석은 비워 둘 테니 언제든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해일은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 다음을 기약하고 재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짧은 시간마저 사람들의 시선은 해일과 재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호기심뿐이던 시선에 호의가 가득했다.
해일에게는 익숙할지 몰라도 재하는 그들이 보내는 호의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