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99화 (9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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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급 에스퍼 앞에서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야, 너, 목칼 탄다?”

“아, 뜨뜨!”

“형님 건 불 몽둥이 됐어요!”

위협해 오던 남자들은 위험해 보이기는커녕, 어리숙하게만 보였다.

마나 제어기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해일은 이번에 얻은 아이템 효과로 이 정도 불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해일의 손짓 한 번에 목검이 불 검이 되거나 쇠 파이프가 벌겋게 달아올라 놓친 이들이 손을 덴 것에 호들갑을 떨었다.

재하 역시 위기감 없이 지켜보는데 엉덩이에 붙은 불을 호들갑스럽게 두드려 끈 남자가 해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국민을 위한다더니, 제 권리 찾으러 온 시민한테 이래도 되나? 민간인한테 불질이나 하고 말이야.”

“필요한 물건이 뭡니까?”

“오, 역시 사람이 꼭 이렇게 폭력을 써야 말을 듣는다니까.”

힘을 쓴 건 해일 쪽인 것 같지만, 그을린 옷자락을 툭툭 털며 센 척하는 남자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포션이라는 게 있다며? 사람 낫게 하는 거랑 기력 올리는 거. 일단 그것들 가격 좀 알아보고 웬만하면 종류별로 다 살까 하는데.”

“우리 형님이 모아 놓은 돈이 좀 있으시거든. 앞으로 VIP가 되실 분이니 친하게 지내라고.”

해일의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이들은 어설픈 건달 같아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재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해일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신고해야 하나 망설이는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포션은 얼마나 준비됐습니까?”

“방금 고객님께서 언급하신 포션은 체력, 기력, 해독 포션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각각 100개씩 준비되어 있으며 가격은 등급에 따라 50만 원에서 200만 원까지 책정되어 있습니다. 에스퍼 방문 시 특별히 30% 할인 가능합니다.”

“막내야, 지갑 가져와라!”

직원의 말에 남자가 이번에 각성한 막내를 찾으며 분주해진 것도 잠시, 해일이 각성자 카드를 직원에게 건넸다.

“전부 계산하겠습니다.”

“예?”

“재입고는 언제인가요?”

“아, 아마 다음 주일 겁니다.”

“그럼 그때도 제가 구매하겠습니다.”

당황한 직원과 담담하면서도 당당한 해일의 태도에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남자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이쯤은 돼야 당신들이 말한 불공평 아닙니까?”

“시발, 나도 돈 있어! 지금 돈 자랑 하는 거야?”

“아뇨, 당신들이 말한 에스퍼가 전부 쓸어 갈 경우 일어날 피해를 현실로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혹시 다른 건 필요 없으십니까? 체력을 올려 주는 아이템이라든가. 물론, 필요하다고 하시면 제가 구매하겠습니다.”

힐끗 곁눈질로 본 장갑 한 짝에 붙은 금액만 해도 수천만 원에 육박했다. 애초에 사들일 수도 없는 가격에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상대로 어설픈 진상이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무례를 직원에게 사과한다면, 사전 구매가 가능한 제가 포션을 한 병씩 선물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해일의 제안에 남자들의 눈이 흔들렸다. 해일은 전시용으로 비치된 포션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움직임에 따라 조명이 반사되는 크리스털 병은 값어치가 높은 포션처럼 보였다. 포션을 남자들 쪽으로 내미는 해일의 행동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정말 이거 몰카 아닐까. 진상을 상대로 하는 몰카. 그렇게 보일 만큼 해일의 여유로운 표정과 우아한 몸짓 하나하나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도발이었다.

“사과, 하시겠습니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직원들마저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을 하는 마당에 무례한 이들의 반응 역시 우왕좌왕했다.

“정말, 준다고?”

“공짜로? 우리한테 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이들이 급 공손해진 태도로 바닥에 쓰러진 직원을 직접 일으키며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네요. 개인적인 감정은 없는 거 알죠?”

“예, 고객님.”

사과라기엔 애매했지만, 직원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직원들이 물러서자 해일은 다른 직원이 그새 위층에서 가져온 포션을 건네주려 했다.

불의가 이기는 현장처럼 보여 재하는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나 고민했다. 그 순간, 기둥 뒤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권해일 에스퍼.”

“저희는 위기 대응 반의 의뢰를 받은 촬영 팀입니다.”

“직원과 가드의 위기 대응 능력을 촬영하러 왔다가 권해일 에스퍼의 남다른 대응 방식, 잘 보았습니다.”

같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해일에게 다가가자 방금까지 무게를 잡고 있던 무뢰배들이 순한 웃음을 지으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중 가장 앞에서 거친 말을 해 대던 남자가 넘어졌던 직원을 향해 달려가 연신 굽신거리며 사과했다.

‘뭐야, 진짜 몰카였어?’

정확하게는 돌발 상황에 대한 백화점 직원과 가드의 반응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섭외한 배우와 촬영 팀이었다. 마침 권해일의 방문도 취소된 상황이라 평범한 대응을 촬영할 줄 알았던 팀은 좋은 걸 찍었다며 흥분했다.

해일은 그들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다 대외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슬아슬했습니다.”

“네? 아주 훌륭하게 처리하셨는데요? 자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방법이었지만요.”

“아니요. 기둥 뒤에 숨어 계시기에 이분들 일행이라고 생각해 이능을 사용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 위로 가볍게 불길을 일으키는 해일의 행동에 신사적으로 굴고 있으나 화가 났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이고, 이런. 저희는 테스트 결과를 전하러 빨리 가 봐야겠습니다. 아마 이번 영상으로 인해 가드와 직원의 추가 고용이 있을 듯합니다.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권해일 에스퍼.”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 모든 게 대성의 뜻임을 빠르게 내비친 촬영 팀의 발언에 해일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선 그는 곧바로 재하에게 다가왔다. 뒤에도 눈이 달렸나 싶을 만큼 망설임 없이 다가온 해일이 재하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가오픈 전 에스퍼를 초대한 이유가 이런 일을 벌이기 위해서였나 봅니다. 아무래도 번잡스러울 것 같으니 다음에 방문하면 어떨까요?”

“아, 네. 전 상관없어요.”

재하는 해일과 함께 다시 차로 돌아가며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의문을 내뱉었다.

“그런데 해일 형, 왜 포션까지 주면서 사과시켰어요? 이미 형 능력으로 무기도 못 쓰게 무력화시켰으면서.”

촬영 팀이 나타났을 때, 역시 몰카가 맞았구나 하고 바로 수긍할 만큼 그들은 거친 행동과 말투에 비해 요구 사항이나 마무리가 어설펐다. 아이템 백화점에 나타난 소수의 불량배 컨셉은 지나치게 이질적이라 나중엔 코믹해 보일 정도였다.

해일은 그들을 이미 다 제압해 놓고도 굳이 재력을 과시했다. 정식 오픈 이후에도 그들이 구매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전부 사들일 거라는 걸 암시해 주었다. 한데 그렇게까지 몰아가 놓고 사과를 조건으로 선물까지 하겠다던 해일의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가가 있는 편이 조금이라도 진심을 담아 사과해 주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정말로 포션이 간절했다면, 사과에 진정성이 담길 테니까요.”

“어…… 별로 진정성이 없어 보였는데요?”

“부족하다면 특수 절도로 넘길 생각이었습니다. 거기에 게이트 물품이라는 특수성까지 더해지면 형이 무거워질 테고요.”

해일은 무엇보다 다친 직원들이 제대로 사과받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럴 수 없게 된다면 최대한 벌을 받게 하는 쪽으로. 해일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싶으면서도 포션 플렉스 현장은 소시민인 재하에겐 아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포션을 다 사실 생각이었어요?”

“아마도 매점매석이 되지 않도록 구매 제한이 있을 겁니다. 아직은 던전산 포션이 대부분이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연구소에서 만든 조합 포션의 대량 생산 전까지는 제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 그럼 그냥 위협하신 거네요?”

“네. 돈이 부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로비의 필요 없는 아이템을 전부 살 만큼은 못 됩니다.”

‘아니, 그러니까 비교 급이 너무 다르잖아요.’

차에 올라탄 재하는 어딘지 모르게 허탈해 보였다. 재하의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챈 해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피곤합니까, 재하?”

“그렇다기보다는, 하늘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어요.”

한숨을 푹 쉰 재하가 해일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불만이 있을 때 보이는 재하의 습관이었기에 해일은 조금 긴장했다.

“잘생기고, 돈 많고, 다친 사람의 정신 건강까지 챙겨 주는 섬세한 길마 형.”

“……뭔가 제가 실수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재하.”

해일의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진중한 음성에 재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상대가 허접한 악당처럼 보였다 한들, 해일을 혼자 내세워 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곳에 자신이 나서 봤자 괜히 방해가 될 거라는 걸 알기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봤지만, 비겁자가 된 것 같았다.

“해일 형은 자신에게 생긴 힘에서 도망치지 않죠. 거기에 힘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에도 약자의 마음까지 배려해서 움직이고요.”

자신은 화장실에서 에스퍼의 고통을 외면할 각오를 다지고 왔건만, 해일은 처음 보는 직원을 위해 무뢰배들을 가볍게 위협하고 설득했다. 에스퍼의 힘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선함을 잃지 않은 해일은 재하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진짜…… 영웅이네요.”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얻은 힘이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해일을 지켜보며 재하는 부끄러웠고, 부러웠다. 보면 볼수록 완벽한 해일이 고작 자신과 친밀해지기 위해 애쓰는 상황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말 좀 낮춰 주시면 안 돼요? 안 그래도 거리감 느껴지는데.”

트집이고 투정이었다.

해일이 저보다 나이가 많고 에스퍼라 강하며 길드에서 길마였다는 이유로 재하는 상대의 강함을 부러워함을 감추지 않았다.

“재하, 저는…….”

“재하야, 나는. 이렇게 편하게 말해도 되잖아요.”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대를 해 왔던 건데 불편하셨군요.”

해일이 곤란해하자 재하는 이 상황이 피로해졌다. 자신의 부족함을 투정으로 푸느라 해일을 괴롭히는 게 미안했다. 재하의 텐션이 떨어지는 걸 본 해일은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왜 심통이 났는지 모르겠군.”

혼잣말인가 싶을 만큼 나른하게 이어진 해일의 담담한 말투에 재하는 귀를 의심했다.

“귀여우니까 다음 장소에 갈 때까지는 풀어 주지 않을까 하는데.”

“해일 형?”

“별다른 노력도 안 했는데 풀어 주는 건가? 역시 귀엽군, 재하는.”

누구세요?

재하는 간신히 입 밖에 내지 않은 질문을 삼키며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워진 해일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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