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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픈 중인 아이템 백화점은 한산했다. 초대된 손님이 아니면 출입이 제한된 상황에 바깥은 부산스러워도 건물 내부로 통하는 주차장 입구는 한산했다.
“가오픈이면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 않나요?”
“실은 휴가 신청으로 갑자기 취소하긴 했지만, 원래 일정이기도 해서 문제 되지 않습니다.”
해일의 장담대로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막아선 가드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도 절차라면서 마나 파동 측정기를 통해 각성자 여부를 확인하는 모습은 안전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주차 후 건물에 들어가기 전, 가드로 보이는 이에게 신분을 확인받고, 동행인 여부까지 알린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와, 여러 번 확인하네요.”
“아무래도 시중에 풀리지 않은 아이템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기도 하고, 에스퍼가 직접 방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좀 번거로운 거 같긴 해요. 불편하지 않으세요?”
백화점이라는 이름 탓인지, 쇼핑하러 온 고객으로서 두세 번씩 검사받고 지체될 시간을 생각하면 항의하는 고객이 생길 수도 있었다.
“혹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어떤 에스퍼가 방문했는지 확인하는 건 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불평하는 에스퍼는 이용하지 않으면 됩니다.”
단호한 해일의 태도에 재하 역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하긴, 아이템을 독식하지 않고 판매 루트를 만들어 놓았는데 깽판 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여기에도 가드가 있었다. 각성자끼리 부딪칠 수 있는 때를 대비해 여기저기 가드를 배치하고, 유지비가 상당한 마나 제어기까지 작동 중이었다.
“가드가 많네요?”
“네, 각성 테스트 신청이 밀려들어서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인력이 충분한 덕에 가드로 취업하는 이들도 늘어 보안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해일에게 설명을 들은 재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각종 무구에 입이 떡 벌어졌다.
방문 일정을 취소했던 해일의 등장에 직원 몇 명이 달려와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권해일 에스퍼님.”
“서재하 가이드님도 환영합니다.”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공부 겸 구경하러 온 재하는 여러 직원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자 당황했다. 이에 해일이 나서 정중히 거절의 말을 건넸다.
“환대에 감사하나 비공식 일정으로 들른 거니 저희끼리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그럼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직원들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가자 해일이 재하를 안으로 이끌었다. 해일이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선 재하는 안 그래도 번쩍이던 내부의 다양한 아이템이 배치된 쇼케이스를 보고 눈이 바삐 움직였다.
협회 로비도 화려한 아이템으로 꾸며졌으나 이곳은 애초에 전시를 위해 꾸며진 공간이라 주목도가 남달랐다.
“와아, 게임 속 아이템 상점이 현실에 구현된 것 같아요.”
“로비에는 화려한 아이템이 전시되어 있고, 위층에서는 대성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일반인의 출입은 당분간 거기까지만 할 수 있으니 공개 후에도 복잡하지 않게 쇼핑할 수 있습니다.”
가오픈 중이라 손님이라고는 몇몇 에스퍼와 관계자뿐이었다. 대부분 해일을 알아보고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었으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3층부터는 뭐가 있는데요?”
“소모성 아이템 위주로, 포션이나 단발성 아이템이 있습니다. 공급이 원활해지면 일반인 중 회원권을 가진 이들의 출입이 가능해지고, 그 위에는…….”
“설명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해일과 재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거절했음에도 적정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직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백화점 설명은 직원에게 듣는 게 더 좋지 않나 싶어 재하가 쳐다보는데 해일 쪽에서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공부 중이라서요.”
“앗, 실례했습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직원이 물러나고 해일이 아이템에 관해 설명하려는데 재하는 들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분명 공부하려고 온 건 맞지만, 상당히 들떴던 자신에 비해 차분한 해일의 모습이 살짝 서운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서운한 건지 고민하던 재하는 이게 다 데이트라는 미션 때문임을 깨달았다.
‘아오, 내가 미쳤구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뇨! 저희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화장실을 손잡고 가요?”
“손은 안 잡겠습니다.”
시종일관 진지한 해일의 답에 재하는 뒷걸음질로 멀어지며 손을 내저었다.
“금방 갔다 올게요. 여기 계세요, 좀.”
허둥지둥 밀어내는 재하의 행동에 해일은 몇 걸음 따라오다 말고 멈추어 섰다.
안내 표시를 따라 꽤 많이 걸어 화장실인지 응접실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쾌적한 공간에 들어선 재하는 세수부터 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데이트에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이어진 재윤의 진지한 충고는 자신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아무리 짧은 시간 동안 남자끼리의 스킨십에 꽤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2차 가이딩은 인공호흡 수준으로, 긴박한 상황에서나 할 수 있었다. 최근 공간 이동 중 지호가 발을 헛디뎌 입술이 부딪치기는 했지만, 그 역시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2차 가이딩을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에스퍼는 결국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했지.’
참을성 강한 해일이 쓰러질 정도라고 했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걸 보아 미래에 있었던 일이겠지 싶었다. 그럼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데 나 말고도 가이드는 많잖아.”
하지만 에스퍼의 숫자가 더 많았다. 어쩌면 관계를 즐기는 가이드가 있을지도 모르나 당장 자신만 바라보는 에스퍼가 넷이었다. 일단 재윤은 다른 가이드를 찾아야겠지만.
“재윤이 가이드 찾는 게 더 급한 거 아닌가?”
페어를 맺어야 하는 이유를 들었을 때 재하는 재윤이 걱정됐다. 동생은 저와 손을 잡는 것만도 한참이나 걸렸다. 처음 보는 가이드와 손을 잡고 2차 가이딩을 하고 페어가 되어 마지막 단계까지 가는 일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으으, 그건 상상하기 싫다, 진짜.”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워 내자 남은 건 세 사람에 대한 걱정이었다.
차라리 못 하겠다고 말하고 자신이 페어를 맺지 않는다면 아마도 세 사람은 계속 기다릴 것이다. 신입 가이드들과 테스트하면서도 계속 자신에게 돌아와 가이딩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내다 누군가 고통에 쓰러지면, 자신은 분명 사람을 구하는 일에 뛰어들고 말 것이다. 넘어진 아이를 달래고 일으켜 주듯,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보면 못 지나치듯 남을 돕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아니, 이건 좀 다르지 않나? 다른 사람 돕는다고 내가 알던 상식이 파괴되는 건 아니잖아.”
필사적으로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자문자답을 해 봤지만, 자신은 스스로가 구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고 도망칠 수 없었다. 그래서 데이트를 미션 취급하며 따라 나왔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굴려고 했다.
나중에 때가 돼서 누군가 쓰러지면 그 사람과 페어를 맺는 건 어떨까 상상해 보다 동시에 둘이 아파 버리면 어쩌나 하는 끔찍한 가정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누가 아플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싶었다.
“머리 터지겠네.”
자신이 정해야 다른 두 사람도 제 페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누굴 고르자니 자신의 뇌가 거부했다. 친구에, 후배에, 게임 길마인 친숙한 세 사람과 지금보다 더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 어떤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오, 차라리 제비뽑기하는 게 낫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됐다.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미남자가 자신만을 위해 집중하고 배려하는 상황에서도 남자와 키스하는 자신의 모습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연기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엑스트라 알바 중이라고 생각하면, 또 못 할 건 없었다. 하지만 키스보다 더한 건 당연히 무리였다. 무리였지만, 그게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자신은 외면할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못 하겠다고 하자.”
재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망칠 수는 없어도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 도울 수는 있었다. 최대한 2차 가이딩까지는 하면서 시간을 벌어 주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돌아가면 확실히 말하자 결심한 재하는 한 번 더 세수하고 휴지로 물기를 닦아 낸 뒤 밖으로 향했다.
얼마 자리를 비운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리만치 안쪽이 소란스러웠다.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던 로비가 시장통이 된 양 시끌벅적했다. 설마 해일의 잘생김에 참지 못한 직원들이 모조리 나와 달라붙기라도 한 건가 싶어 서둘렀다.
가까워지자 유니폼을 입은 직원 몇몇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손에 무기를 든 사람들과 대치 중인 해일이 사람 하나를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목이 잡혀 버둥대는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드는 해일의 완력에 에스퍼의 체력적 우위를 엿볼 수 있었다.
남자가 캑캑거리자 해일이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의외의 박력 있는 모습에 놀라며 무슨 상황인가 싶어 급히 다가가는데 대치 중인 상대편에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우리도 돈 주고 회원권을 샀어. 당당한 구매자라고.”
“가오픈이라 아직 들어오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가오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회원권까지 비싸게 팔아먹더니 오픈 전엔 협회 소속 에스퍼만 불러서 좋은 건 죄다 쓸어 가겠다는 수작 아니냐고.”
상대의 불평이 명확해 재하 역시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불만이 있다면 협회에 문의하거나 신고했으면 될 일입니다. 무기까지 들고 무작정 쳐들어와 일반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상 회원권은 회수하겠습니다.”
“뭐? 네가 뭔데 내 회원권을 회수해?”
항의하던 상대가 슬그머니 회원권을 뒷주머니에 넣는 걸 본 해일이 손끝을 조금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뒷주머니가 불타올랐다.
“혀, 형님, 궁둥이 탑니다!”
“뭐? 미친, 권해일 이 시발 새끼야!”
일촉즉발 빌런과의 대립인가 싶었는데 양아치들 참교육 시간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