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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으로 돌아와 빠르게 차에 올라탄 후 해일이 먼저 사과했다.
“예매 시간에 맞춰 조용히 들어갔어야 했는데, 준비가 미흡했습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진지한 해일의 모습을 보니 다시 약속을 잡게 된다면 전체 시간을 죄다 예매해 둘 것 같았다.
“아뇨, 애초에 늦게 움직인 저 때문이죠. 그리고…… 해일 형은 오히려 너무 완벽하게 준비해서 문제인 것 같은데요.”
해일이 의아해하자 재하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조여 맨 후드를 톡톡 건드리며 제안했다.
“변장할까요?”
“변장…….”
겨울이라면 목도리나 마스크로 가릴 수 있겠지만, 상당히 더워진 날씨에 그 방법은 무리였다.
이미 해일의 롱 코트 차림이나 머리까지 뒤집어쓴 후드에 점프 슈트까지 입은 재하의 옷차림 모두 계절과 어긋나 있었다. 딱히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 재하였지만, 이런 날씨에 긴팔에 겹겹이 입었는데도 덥지 않은 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방어 슈트에 냉온 기능도 있나 봐요.”
“외부 영향을 받지 않아 쾌적함이 유지될 겁니다.”
“오~ 해일 형이 입은 그 간지 나는 코트도 방어 슈트예요?”
“이건 평범한 옷이고, 전 원래 더위를 안 탑니다.”
어마어마한 불을 뿜어내면서도 뜨거워하지 않던 해일이었다.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재하는 손이 닿는 곳을 뒤적이며 선글라스와 융 천 같은 걸 찾아냈다.
“일단 이거라도 써 보실래요?”
아무리 봐도 선글라스는 멋짐만 더 증가시킬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건네 봤다가 눈만 더 부셨다. 해일의 눈은 보호할지 몰라도 보는 사람 눈은 번쩍이는 미모가 황송스러워 눈이 가늘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저 머리에 융 천을 뒤집어씌워도 멋있을 것 같아 시도도 하지 않고 선글라스를 벗겼다. 눈이 보이는 편이 더 멋있는 것 같아 고민하던 재하는 빠르게 포기를 선언했다.
“해일 형은 인형 탈을 쓰지 않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거 같아요.”
“인형 탈을 구해 보겠습니다.”
“에이, 이렇게 멋지게 꾸몄는데 아깝잖아요.”
재하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굳어 있던 해일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제가 멋있습니까?”
“와, 기만자의 발언……. 매일 거울 보실 텐데 모른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깔끔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는 합니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날이 갈수록 더 멋져지신 거구나.”
해일의 미모는 오늘 정점을 찍었다.
관리 팀까지 붙어 있으니 안 그래도 배우 같던 얼굴이 이제 어디에 내놔도 잘나가는 배우님 그 자체였다.
재하의 칭찬에 해일은 웃을 뿐이었다. 재하가 보이는 호의는 무엇 때문이건 기꺼웠다. 자기 외모 때문에 재하가 선택의 순간에 조금이라도 제게 마음이 기운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생각이 있었다. 다만, 해일은 자신의 단정한 얼굴보다 견지호의 화려한 외모 쪽이 재하의 나이 또래에게는 먹히지 않나 싶어 자기 외모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기 힘들었다.
해일은 어째서 수컷 공작이 화려한 깃을 펼치며 암컷을 유혹하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더 노력할 테니 자주 봐 주셨으면 합니다.”
“윽, 그만 노력하세요. 주변을 수산물 시장으로 만드실 생각이냐고요.”
안 그래도 백미러에 비친 얼굴이 후드까지 쓰고 있어 동그란 알 주꾸미처럼 보여 우울해지려던 차였다. 카톡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자 익숙한 동생의 톡이 보였다.
영화관 간 거 떴어.
“엥?”
바로 인터넷 앱을 켜니 실시간 기사로 ‘에스퍼의 일상’ 같은 평범한 힐링 재질 제목부터 시작해 ‘불꽃 남자 권해일, 앗, 뜨거’, ‘올여름을 강타할 에스퍼 픽!’, ‘에스퍼, 대낮 데이트’처럼 광고나 어그로성 제목도 우수수 쏟아졌다.
기사를 클릭하니 결국 어떤 영화를 골랐다거나 관계자와 함께 방문했다는 식의 영양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 와중에 누가 찍었는지 그림 같은 해일의 사진이 보여 눌러 보자 그 옆에 초점도 안 맞는 알 주꾸미 하나가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방금 미러로 확인했던 모습 그대로라 딱히 못 찍혔다고 반박하기도 힘들었다.
“다행입니다, 재하가 노출되지 않아서. 후드 티를 착용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옆에서 함께 보고 있던 해일이 진심으로 칭찬했지만, 재하는 슬그머니 후드를 벗어 머리를 매만졌다. 최근 가이드로 외부 활동을 조금씩 하게 되면서 은연중에 꾸밈을 받고 찍혔던 사진들을 보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하고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던 차였다. 그 사진에 비하면 지나가던 주꾸미 4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냉정한 사진에 현실을 깨달았다.
후드에 눌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자 해일의 손이 가볍게 쓸어 주었다.
“귀엽습니다.”
“귀엽단 말, 들어서 별로 좋진 않거든요.”
그것도 엄청나게 멋진 남자한테 들어서는 더더욱. 툴툴거리려던 재하는 해일의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다.
“또 길마 형한테 어리광 부렸네요. 미안해요, 형.”
“아닙니다. 어리광이라고 하니 더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주변에 다 존잘뿐이라 마음이 좀 심란해서 잠깐 투정 부린 건데, 다 받아 주지 마세요.”
게임할 때도 종종 해일에게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고는 했다. 그때마다 해일은 묵묵히 들어 주고 한 번씩 묵직한 조언을 해 주고는 했었다. 그랬던 해일이 이번에도 가벼운 투정에 성실한 답을 내 주었다.
“재하는 멋있습니다.”
“으악, 위로 안 해 주셔도 돼요.”
“각성 후 유용한 이능을 얻었다 해도 마수를 실제로 접하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실수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재하는 각성자가 아닌데도 침착하게 마수의 약점을 공략했습니다.”
“그거야 속성이긴 해도 공부했으니까…….”
“에스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약식으로 적당히 배운 재하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훈련도 받지만, 실제 마수와 맞닥뜨리면 굳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발목이 너덜너덜해졌는걸요.”
“그래서 더 대단합니다. 고통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이겨 내고 승리하셨으니까요.”
해일의 인정에 재하는 목 안이 간질거렸다. 인정받은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기뻤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이후, 재윤의 성화에 에스퍼 병동에 들렀었다. 상시 대기 중이라는 힐러에게 발목을 치료받으러 갔다가 가이드가 다쳐 오는 경우가 어딨냐며 혼이 났다. 알아서 숨고 나대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었다.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냐며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힐러의 곁에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가이드가 보였다. 자신의 가이드를 바라보는 힐러의 눈길이 부드러웠다. 최근 가이드 환자가 늘었다는 퉁명스러운 말투에 깃든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가이드는 지켜져야만 하는 존재일까? 비상시에 에스퍼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숨어만 있어야 하는 걸까?
“저, 노력할 거예요. 체력도 올리고, 던전이나 마수에 관한 공부도 할 거예요. 이능 같은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쩔 받을 거면 최소한 공략은 알고 있어야죠.”
게임에서의 감각을 떠올리며 의욕을 올리는 재하의 모습에 해일이 시동을 걸었다.
“그렇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스파링 하러 가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쇼핑하러 갈 겁니다.”
공부하겠다고 하자마자 갑자기 쇼핑이라니. 해일의 알 수 없는 생각의 흐름에 재하가 당황한 사이, 조용히 출발한 차가 도로에 올라섰다. 빠르게 바뀌는 풍경에 재하는 조금 들떴다.
“뭐 사러 가는데요?”
“백화점에 갈 겁니다. 저와 가면 방해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와, 금수저 발언.”
재력을 과시하려는 기색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온 해일의 답에 재하가 장난스럽게 놀라워했다. 재하의 가벼워진 말투에 해일은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금수저인 건 아니지만, 재력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길마일 때부터 부자인 건 알았어요. 재벌 2세 아니냐고 길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잖아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거 압니다.”
재력에, 외모에, 에스퍼 협회의 대표인 해일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재하는 진지한 해일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어떻게 해야 재하가 저에게 매력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재하를 유혹하고 싶으니까요.”
“……혹시 오시기 전에 개호 만나고 오신 건 아니죠?”
닭살이 돋으려는 팔을 벅벅 문지르며 의심스럽게 던진 질문에 해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치가 워낙 빨라서 떼어 놓고 오느라 힘들었습니다. 견지호 에스퍼의 이능이라면 언제든 방해하러 올 수 있으니까요. 협약 비슷한 걸 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 협약이 뭔데요?”
재하의 질문에 해일이 잠시 머뭇거리다 느릿하게 답했다.
“……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지키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뭘까. 무슨 약속을 했기에 지키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걸까.
궁금했지만,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재하가 묻지 못하고 망설이자 해일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가는 곳은 일반 백화점이 아닌, 아직 가오픈 상태인 아이템 백화점입니다.”
“아이템 백화점이요? 던전 템 같은 거요?”
재하는 해일이 백화점 VIP라 방해 없이 볼 수 있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가 아이템 백화점이라는 말에 더욱 흥미를 보였다.
“네, 실물 아이템을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겁니다. 공부는 실물을 보면서 하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필요한 아이템이 있다면 사 드리겠습니다.”
“에이, 그런 약속은 위험해요. 제가 두 개 고르면 어쩌려고요.”
“재하가 가지고 싶은 건 전부 고르세요. 첫 데이트 기념으로 선물하겠습니다.”
“와…… 방금 넘어갈 뻔했어요, 형.”
첫 데이트라는 말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전에 듣게 된,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파격적인 해일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정작 무시무시한 말을 했던 해일은 의도했던 게 아니었는지, 어느 부분에서 재하가 감동한 건지 고민하면서도 운전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