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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의 품에서 슬쩍 벗어나며 재하는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해일 형 진짜 몸 단단하시네요. 재윤이도 엄청 단단하던데, 에스퍼는 다들 강철 근육으로 변하나 봐요.”
“마음에 드십니까?”
분위기를 띄우려 필사적으로 칭찬하던 재하는 해일의 질문에 눈을 데굴 굴린 후 눈에 들어온 스포츠카를 가리키며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우와, 저 스포츠카 엄청 비싸지 않아요? 해일 형 거예요?”
“그렇기는 한데, 평소에 잘 타지는 않습니다.”
친구였다면 데이트라고 폼 좀 잡았냐며 장난을 쳤겠지만, 그 당사자가 자신이 돼 버린 상황에 놀릴 수는 없었다.
“아, 저희, 영화 보러 가나요? 제가 늦었는데 시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예매는 미리 해 두지 않았으니 가서 천천히 고르면 됩니다.”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했을 것 같은 해일의 허술함에 재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 두신 거 있죠, 예매?”
“……네.”
“뭐 해 두셨어요? 취소는 하셨어요?”
“……전부 다 해 두었습니다.”
“네? 아니, 무슨 그런 돈 낭비를!”
요즘 영화표 값이 얼마인데 상영 중인 영화를 죄다 예매해 뒀다는 건지. 아까웠다. 해일의 헤픈 씀씀이를 지적하려던 재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미남의 얼굴에 두 손을 들었다.
“다음에는 딱 정한 것만 예매해요.”
“다음을 약속해 주는 거군요.”
그렇게 되는 건가? 재하는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에 해일이 밝아지는 걸 보고 이번 외출에 대한 감정의 온도가 다름을 새삼 깨달았다.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던 것도 무색하게 차에 올라타자마자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보기에는 멋졌으나 낮은 차체가 생각보다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어색한 분위기 탓에 더 그렇게 느껴진 걸 수도 있기에 재하는 최대한 대화 거리를 찾아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렇게 막 휴가 써도 되는 거예요? 아이템 많이 얻어야 한다면서요.”
“정확하게는 재하를 위한 아이템 획득이 우선이었습니다. 서재윤 씨 말에 따르면 충분히 얻었다고 하더군요.”
“아, 이거요?”
재하가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두 개가 반짝였다. 각각 자기주장을 펼치듯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여 재하는 좀 불만이었다.
“설마 지금도 듣고 있는 거 아니겠죠?”
“서재윤 씨가 약속했으니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답한 해일은 재하가 뻗고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마치 깍지 끼듯 잡혀 버린 손에 재하가 당황하는데 해일의 깊은 울림을 가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마나 반응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이템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제가 알아챘을 겁니다.”
“아, 확인하려고 잡은 거구나…….”
하마터면 해일을 오해할 뻔했다. 이게 다 견지호 때문에 생긴 경계심이라 여기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재하는 이어지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흑심도 있습니다.”
“……보통은 흑심을 직접 말하진 않지 않나요?”
“재하는 말해야 알아줄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러니까 흑심을 상대가 알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요.
신사는 흑심을 보일 때조차 정중하다는 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손을 뺄 타이밍을 놓쳤다. 의식적으로 가이딩을 닫아 놓지 않아 맞닿은 손으로 은은하게 파동이 밀려왔다 빨려 나갔다. 덤덤히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해일의 그림 같은 옆모습을 바라보던 재하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편히 물어보세요.”
단둘뿐인 공간이라 그런지 처음의 극존칭 같던 해일의 말투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해일 형도 후유증 있어요?”
지금까지 부드럽게 움직이던 차체가 덜컹거렸다. 해일에게 잡힌 재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바로 사과가 이어졌다.
“미안합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해일의 말투가 다시 지나치게 정중해졌다.
질문은 너무도 단순한, 후유증이 있냐는 거였는데 회피하는 듯한 해일의 모습이 의아했다. 재하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것처럼 굳어 버린 해일을 보며 자신이 한 질문이 자칫 성희롱처럼 들릴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으악, 죄송해요! 전 그냥 대화나 할까 해서, 아오. 가이딩 후유증이란 게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돼서…… 진짜 죄송해요.”
“아닙니다. 가이드라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고,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손을 붙잡고 가이딩을 하면서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한 질문이라 당황한 것뿐입니다.”
“악! 진짜 죄송요!”
다급히 해일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던 재하는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적절한 힘으로 붙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어라…… 해일 형?”
“질문에 대한 답은 저녁에 해도 될까요?”
“아, 아뇨. 안 하셔도 되는데…….”
게다가 왜 하필 저녁에 한다는 건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신사였지만, 계략남으로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신경 쓰여 다시 답답해진 재하는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영화 보러 가는 건데 괜히 긴장돼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불편하십니까?”
“불편하다기보다는, 어색해서 미치겠어요.”
다른 때라면 사과하거나 사과할 방법을 모색하려 했을 해일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형, 지금 웃는 거예요?”
“네.”
당당한 해일의 반응에 더 어이없어진 재하가 빤히 보자 붙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재하가 의식해 줘서 기쁜 것 같습니다.”
“의식이라뇨. 그냥 이 분위기가 불편 아니, 어색하다는 것뿐이거든요.”
재하는 변명이 아닌 진실을 말했으나 해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 그냥 친구랑 놀러 나가는 기분으로 나온 거거든요. 그런데 해일 형은 너무 완벽하게 데이트하려고 나온 게 느껴지니까 좀 긴장되고, 부담도 되고, 기분도 이상하고…….”
“부담되십니까?”
해일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며 풀 죽은 것 같아 보이자 재하는 다급해졌다.
“해일 형, 데이트 많이 해 보셨을 텐데 다른 때는 분위기가 좀 다르지 않았나요? 전 데이트가 처음이긴 한데,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닐 거잖아요.”
“……저도 처음입니다, 재하.”
이게 무슨 망언이냐 싶을 만큼 믿기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정면만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한 해일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배우 뺨치게 잘생긴 남자가 모솔이라고?’
하지만 운전이며 데이트가 굉장히 능숙해 보이는 해일의 의연한 옆모습에서 유독 붉은 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동생 역시 민망하거나 부끄러울 때 귀만 빨갛게 달아올랐기에 닮은 모습에 조금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재하는 데이트니까 불편하다거나, 해일에겐 익숙한 만남일 거라는 가정을 버렸다. 이건 쌍방 첫 데이트, 미션이었다.
“데이트니까 손잡는 거, 오케이요.”
재하는 해일에게 잡힌 손에서 편안하게 힘을 뺐다. 데이트라면서 긴장을 풀어 버리는 모습에 해일은 기뻐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영화관에 도착해서도 재하는 친구랑 놀러 온 것처럼 가볍게 상영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나 먼저 뛰어 들어온 재하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눈에 띄지 않은 것과 달리, 풀 정장에 헤어 세팅까지 제대로 하고 나타난 해일은 누가 봐도 시사회에 참석하러 온 배우의 모습이었다.
“오늘 시사회 있었나?”
“권해일 아냐? 화염계 에스퍼.”
“미친, 에스퍼가 왜 극장에 와?”
에스퍼가 극장에 오면 안 될 건 없었다. 전조도 없이 나타나 자연스럽게 키오스크 앞에 서서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해일의 모습에 다른 때라면 마구 달려들었을 사람들이 눈치를 봤다.
재하는 영화 목록을 보며 해일에게 의견을 구했다.
“마블 신작 나왔나 봐요. 해일 형은 히어로물 봐요?”
“봅니다.”
해일의 대답에 근처에서 귀 기울이던 사람들 사이에서 ‘오오, 역시.’라는 반응이 나왔다.
“시간이 애매하네요. 공포 영화 볼 수 있어요?”
“네, 안 가리고 봅니다.”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역시 겁이 없다며 수군거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평소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재하에게만 집중했다. 사람들이 몰린 곳에 에스퍼가 나타난 이상, 관심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반응을 보이면 상영관에 들어가지도 못할 터였다.
“아, 자리가 다 별로네요. 그럼 남은 게…… 멜로 영화는 자다 졸릴 거 같고.”
영화를 고르기 힘들어하는 재하를 보며 해일은 초조해하기보다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고작 영화 한 편에 신중하게 고민하는 재하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이후 재하가 하는 행동 전부가 귀여워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귀여운 생물에게 약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가이드라서 그런 거였다면, 이번에 새로 온 가이드 중 객관적으로 봐도 귀엽게 생긴 이도 있었다. 상대가 보이는 호의는 가이딩 중에도 전해졌지만, 자신의 머릿속엔 온통 재하뿐이었다.
“으으, 못 고르겠어요.”
“시간은 생각하지 말고 보고 싶은 걸 골라도 됩니다.”
“그럼 마블 거 예매하고 게임하러 가도 돼요?”
“물론입니다.”
재하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재하가 표를 선택하자 주변에서 맴돌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몇몇은 같은 시간대의 같은 영화를 예약하러 달렸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해일에게 몰려들었다.
“권해일 에스퍼 맞죠?”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오빠, 팬이에요. 저랑 악수 한 번만 해 주세요!”
다들 눈치만 보기에 예매만 하고 빠져나가려던 해일은 차에서 핸드폰으로 예매할걸 하고 후회했다. 재하와 잡은 손을 놓기 싫어 버티다 직접 보고 고르겠다는 말에 위로 올라온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후드를 쓴 재하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였다. 해일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재하를 안아 들었다.
훅.
사람들의 눈이 한 번 깜박일 사이에 해일은 가뿐히 바닥을 박차고 벽을 내달려 입구 쪽에 도착해 있었다. 처음엔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달려오기 시작했다.
“영화는 다음에 봐도 되겠습니까?”
“네, 넵. 튀어요,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