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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우당탕 데이트
아니, 아이템 구해야 하는 거 아니었냐고. 이렇게 다 놀면 아이템은 누가 벌어 와?
‘그것도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완벽 그 이상으로 꾸미고 나타난 데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해일의 모습은 단 한 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완벽한 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꾸러미에 재하의 시선이 머물자 해일이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그걸 앞으로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재하.”
“아, 넵. 감사해요.”
이게 뭔가 싶어 열어 보자 과자가 한가득 들어 있어 절로 웃음이 났다.
“우와, 구하기 힘든 과자들이 잔뜩 있네요?”
“어렵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얼마든지 구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역시 해일 형. 잘 먹을게요.”
“좋아해 주셔서 기쁩니다. 재하라면 꽃다발보다는 과자를 더 좋아할 것 같아 준비해 봤습니다.”
꽃은 왜 준비하려고 했는지 묻고 싶지 않아 다시 동생을 돌아보았다. 이미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재윤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까지 슬쩍 들어 보이고 있었다.
가족 공인 데이트란 거지, 지금.
다시 해일을 돌아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장 어디 내놔도 화보 촬영 각이었다. 그러면서도 긴장을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해 웃는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저랑 어디 가시려고 온 건가요?”
“네, 재하만 괜찮다면 영화 관람 후 게임 센터 방문, 후에 야경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정석적인 데이트 코스에 재하는 돌려 물을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헛소리냐고 장난으로 넘기기에는 해일의 준비 상태가 너무도 완벽해 밀어낼 수도 없었다.
재하는 슬쩍 한 발 물러나 자신의 추리닝 차림을 내보였다.
“그런데 제가 아무 준비도 안 돼서…….”
“재하는 재하 그대로로 충분합니다.”
“아뇨, 레스토랑을 이 꼴로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룸이 준비된 곳으로 예약을 바꾸겠습니다.”
“윽, 아뇨. 그냥 제가 후딱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거니 천천히 준비하셔도 됩니다.”
“그럼…… 30분 후에 주차장에서 볼래요?”
지금의 어색함에 해일을 내보내고자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해일은 잠시 생각하더니 귀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네?”
“재하가 진지하게 생각해 줄 거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미리 약속을 못 잡은 저를 탓하지 않고 30분 뒤에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고 말해 주시다니……. 정식으로 데이트 약속을 잡아 주는 재하의 배려심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요.”
“……네에?”
지나친 확대 해석이었다. 재하가 바보처럼 뻐끔거리는 사이, 해일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30분 아니, 한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 천천히 준비하고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기쁜 얼굴로 돌아서는 해일이 문을 닫기 전, 재하를 보며 공익 광고와 닮은 건실한 웃음과 진실한 목소리로 닭살 돋는 멘트를 쳤다.
“기다림 역시 즐거움일 테니까요.”
해일이 나가고 몇 초 후. 여전히 흐뭇하게 바라보는 재윤을 향해 재하가 날아 차기를 하며 뛰어들었다. 가볍게 피한 재윤으로 인해 소파에 발을 푹 찍은 재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삿대질까지 하며 목에 핏대를 올렸다.
“너, 너! 해일 형이 나한테 데, 데, 데……이트 신청하러 올 거란 거 알고 있었지? 그런데도 말을 안 해?!”
“말했잖아. 휴가 냈다고.”
“아니, 무슨 데이트를 하는 데 휴가까지 내?”
“데이트니까 휴가를 내지.”
“왜?”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재하의 순진한 표정에 재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데이트는 하루 만에 끝나기도 하지만, 그간 나름 마음의 교류와 더불어 가이딩을 통해 스킨십도 상당히 진행된 관계였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한 데이트는 관계 진전으로 인해 하루 이상 진행될 수도 있었다.
외박이란 개념이 머리에 없어 보이는 재하를 위해 재윤은 굳이 다른 경우까지 언급하진 않았다.
“형도 슬슬 메인 에스퍼를 정해야지. 그런 점에서 권해일 에스퍼, 난 좋게 봐.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간신히 휴가를 뺄 수 있게 되자마자 형과의 데이트부터 챙기잖아.”
“아니, 그러니까 왜 내가 남자랑 데이트하냐고.”
기본 전제가 다른 형제의 대화에 재하는 소파를 팡팡 치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와 반대로 재윤은 여전히 가이드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형을 위해 좀 더 독하게 말을 이었다.
“형도 이제 달라진 세상에 적응해야지.”
“네놈은 왜 이렇게 적응이 빠른데?”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듯 재윤은 또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야 회귀했잖아.”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윤의 답에 재하는 답답하다는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열심히 생각하던 그는 과부하라도 온 것처럼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오, 미래에는 막 남자들끼리 사귀고 그러는 게 당연시되는 거냐고.”
“음, 정확하게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귀는 경우가 많아지지.”
사귀는 것보다 일방적인 착취가 만연했지만, 급이 맞아 페어를 이루는 경우에는 종종 소중하게 대해지고는 했다.
여전히 피부에 와닿지 않다 보니 재하는 자꾸만 묻게 되었다.
“넌? 너도 설마 남자 애인이 있었냐?”
“나?”
“어. 너도 에스퍼였을 테니까 가이딩 받았을 거고.”
재하의 질문에 재윤은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 가이드가 있었느냐 하면, A급이 되자마자 조금 급은 낮지만, 적당히 매칭률이 나오는 가이드가 붙었다.
애인이냐고 하면 아니었지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상대 가이드 역시 배려해 주는 에스퍼가 처음이었는지 금세 경계심이 사라지고 마음을 열었다. 자신에게 호의가 생겼기에 형과 이영우의 실험 영상을 가져다주었을 터였다.
재윤의 답이 늦어지자 재하가 깨달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하긴, 넌 이 형님이 있으니 다른 가이드가 필요 없었겠네.”
자연스러운 재하의 반응에 재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뻔뻔할 정도로 의기양양한 형의 모습은 자신과 함께하는 미래가 그에겐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연함이 새삼 고마웠다. 자신만 믿지 못했던 진심이 감사하고 기뻤다.
“그리고 페어인지 뭔지 너랑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럼 굳이 남자랑 사귈 일도 없고.”
“음, 그건 아니야. 그런 거라면 더 다른 페어를 찾는 게 나아.”
“아니, 왜. 이렇게 매일매일 가이딩 하면 2차 가이딩도 안 해도 되고, 얼마나 효율적이냐?”
재하가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들자 재윤은 마지못해 넘어가 주고 싶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내 말 좀 들어 봐라, 동생아’를 시전 중인 형이 못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이 분위기가 진지해지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면 진실을 알려 주어야 했다.
“형.”
“그래, 내 말이 맞지?”
“언젠가는 2차 가이딩보다 더한 것도 하게 돼.”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재하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재윤을 보았다. 재윤은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형, 지금은 1차 가이딩만 해도 유지할 수 있어.”
“어. 내가 그러려고 매일 너랑 다른 사람들 손 잡는 거잖아.”
“앞으로 게이트는 더 강한 마수를 뱉어 낼 거야. 대항할 에스퍼도 가이드도 늘어나겠지만, 고등급 에스퍼를 가이딩 한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쉽……던데?”
“응, 형은 쉬운 게 맞아. 다른 가이드와 달리 부작용도 없고.”
가이딩은 에스퍼 힘의 근원인 마나와 가이드 에너지가 뒤섞이는 원초적인 행위였다. 그렇다 보니 가이딩 시 쌍방이 묘한 감각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급 에스퍼와의 가이딩 시 아무 자극도 없는 경우는 재하뿐이었고, 그가 특별했던 거였다. 그러나 재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윤은 후유증이란 말로 대신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하지만 1차 가이딩은 2차에 비해 얕을 수밖에 없어. 1차만 계속하면 마나가 완전히 정화되는 게 아니야.”
“그럼 2차 가이딩 하면 좀 나아져?”
“2차만 해도 꽤 많이 깨끗해져. 형도 2차 때 파동 가라앉는 거 느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남아. 마치 찌꺼기가 남아 버리듯 계속 쌓이고 쌓여.”
“쌓이면 어떻게 되는데?”
“아파.”
“얼……마나?”
“권해일이 못 참고 쓰러질 만큼.”
어른스러운 해일은 힘들거나 다치더라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마나 파동이 날뛰는데도 재하의 앞에서 평소처럼 웃을 수 있는 해일이었다. 그런 해일이 참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온다. 무거운 말에 재하의 고민이 깊어졌다.
“2차로도 결국엔 안 된다면…… 에스퍼는 다 그런 거야?”
“다는 아니고, 이능 사용이 잦으면 아무래도 더 빨리 안 좋아지긴 하지.”
재윤은 회귀 전, 1차 가이딩만 고수했던 해일이 겪은 고통을 떠올렸다. 가이딩을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이를 악물고 게이트 토벌에 나섰던 해일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가이딩 부족 현상임에도 아무리 가이드를 데려다 붙여도 낫지 않았다. 원인을 찾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달라붙어 다양한 가설을 내세웠다. 여러 가설 중 대부분은 틀렸지만, 하나는 맞았다. 해일이 불필요하다고 여겨서 하지 않았던 가이드와의 깊은 접촉. 다행히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관계 시에도 여전히 가이딩 효과는 미미했으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가이드와 에스퍼의 가이딩이라는 건 언젠가는 반드시 마지막 단계까지 가야만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는 개인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자신 역시 회귀 전, A급이 되고 난 후 기본 가이딩만 한 탓에 어느 순간부턴가 두통이 심해졌던 걸 떠올리면 다들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나, 가이드 때려치우면 안 되겠지?”
“조금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 형을 도망가게 할 수는 있어.”
재하의 푸념에 재윤이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더 진심처럼 느껴져 재하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오, 이미 다 알아 버렸는데 어떻게 나만 좋자고 튀냐?”
형이라면 이럴 줄 알았기에 재윤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럼 페어를 꼭 만들어. 형이 지켜 주고 싶은 단 한 명의 에스퍼를.”
지켜 주고 싶은 단 한 명의 에스퍼.
그 말에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재윤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