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가이드를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살피고 챙기는 세 에스퍼의 모습이 낯설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쏟아 내는 애정과 관심을 쑥스러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재하가 신기했다.
재윤이 재하를 안아 들자 그가 질색하며 밀어냈다. 꿈쩍도 하지 않는 재윤은 태연하게 설득했다.
“밖에 나가면 기자들이 깔려 있을 거야. 빠르게 이동해야지.”
“그럼 업고 가든가.”
“배낭 메야 하잖아.”
재윤의 답에 재하는 배낭을 앞으로 메면 된다고 말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게이트 밖으로 옮겨졌다. 지호와 해일 역시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재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에스퍼들의 행동이 도준은 낯설게 느껴졌다. 덧씌워진 기억 밑에 가려진 원래의 기억이 흐릿하기만 했다. 일단 그들의 행동 양식에 맞춰 움직이자 싶어 밖으로 나가자 사방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권해일 에스퍼, 일정보다 빠르게 나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공략 실패인가요?”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눈이 찡그러질 만큼 강한 조명이 비쳤다. 거기에 카메라 플래시 세례까지 이어지며 앞서 나온 에스퍼들을 향해 여기저기서 질문을 해 왔다.
“아이템은 구하셨나요?”
“서재하 가이드가 안겨 나온 이유가 있습니까?”
“발목 부상이 염려되는데, 크게 다친 겁니까?”
재윤이 재하를 안고 있었기에 너덜너덜한 발목이 드러났다. 해일이 의도적으로 그 앞을 가리며 짧게 답했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견지호가 세 사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도준이 뒤늦게 나오기도 했지만, 지호 쪽에서 어서 오라고 눈짓해도 빤히 쳐다보기만 했기에 홀로 남아 버렸다.
그러자 모두의 이목이 도준에게 모였다.
사람 좋은 수호자가 홀로 남자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가드들의 저지를 뚫을 기세로 몰려들었다.
“수호자께서 보시기엔 게이트 상황이 어떤가요?”
“게이트 규모에 비해 너무 적은 인원이 들어간 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데요, 협회 독식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공략 실패입니까, 아니면 이른 공략 성공입니까?”
도준은 저를 향해 달려들 듯 구는 기자들의 용기가 가상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한 줌의 이능 사용만으로도 저들은 보이지 않는 방패에 의해 도로까지 밀려갈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몇 명 정도 다치게 한다면, 앞으로 이런 무례한 일은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초창기 게이트 공략 때 대기시켜 두었던 재하가 공격 대상이 된 일로 도준이 행했던 일이었다.
그때도 도준은 잊지 않고 재하에게 너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며 죄책감을 심어 줬었다. 그렇게 틈날 때마다 세뇌하듯 재하에게 죄책감을 덧씌운 끝에 그는 더는 밀어내거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됐다.
애초에 도망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가정하기보다 확실하게 퇴로를 막는 편이 안심이었다. 세상에서 지켜야 할 유일한 단 하나. 손에서 절대 놓지 않아야 할 존재였기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억압해서 붙잡아 두었다.
“주도준 에스퍼, 계속 침묵하실 겁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국민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자신이 알던 세계와 달랐다.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보이는 활기찬 분위기도 생소했다. 아직 멀쩡한 도심도 그러했고, 에스퍼에게 겁 없이 인터뷰하자며 달려드는 기자들의 간절함도 몇 년간 보지 못했던 기세였다.
다시 자신이 알던 곳으로 만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에 손끝이 간지럽다고 느끼는 순간, 등 뒤에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미 겪었기에 견지호가 만들어 낸 순간 이동의 마나 파동임을 알고 경계하지 않았다.
“선배 먼저 옮기느라 혼자 두고 가서 미안요.”
가볍기만 한 태도로 자신을 붙잡은 지호가 친밀감 있게 구는 게 의아했다. 지호는 딱히 자신에게 불쾌한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고등급 에스퍼라서 익숙한 얼굴이라 게이트에서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 지호가 기자들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모습은 익숙했다.
“기자님들, 내일 제대로 인터뷰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언제나 사람들을 대할 때 여유로운 견지호였기에 기자들 앞이라 친하게 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동할게요.”
지호의 손이 손목을 붙잡아 오는 것도 의아했다. 그의 접촉은 일반적으로 어깨였다. 팔꿈치 이하로는 친밀도가 있어야 접촉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었던가.
도준의 의문은 협회에 와서도 이어졌다. 협회 건물은 에스퍼 간의 알력 싸움으로 반파된 후 마수의 뼈를 이용해 보강했던 단단한 외형이 아닌, 평범한 리조트처럼 보이는 초창기 모습 그대로였다. 거기에 마나 제어기를 얼마나 써 대는지 마석이 남아도나 싶어질 정도였다.
“서두르죠. 그쪽 상태 안 좋은 거 같다고 선배가 병원 가는 것까지 지켜봐 달랬거든요.”
당당하게 앞서 걷는 지호를 따라 움직였다. 병원에 간다더니 협회 건물에 들어서는 것에 의아해하는데 다른 때라면 핸드폰 두세 개를 번갈아 확인하느라 정신없을 지호가 말을 걸어왔다.
“동생분이 오빠 없다고 엄청 울었대요. 하루 이상 자리를 뜰 거면 충분히 설명을 해 주셨어야죠.”
동생분이라면 게이트에서 지호가 재윤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러나 지금 하는 말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침묵을 택했다.
숙소로 이어지는 길을 얼마 걷지 않았는데 예민한 에스퍼의 귀에 아이들의 웃음과 즐거워 지르는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특징 없는 빈 공간에 알록달록한 놀이터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협회에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투명하지만 단단한 벽과 가드들이 지키고 있어 안전해 보였다.
“오늘 꿈나무 반은 누구누구일까~?”
“저요!”
“저도요!”
에스퍼 숙소에 마련된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보호자가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 밤늦게까지 머물거나 다음 날까지 지내기도 했다. 보호자의 부재에 슬퍼할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집 교사와 직원은 꿈나무 반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놀이를 준비해 두었다.
“보글보글 놀이 할 꿈나무는 누구~?”
“저요, 저요!”
이때를 위해 아껴 두었던 거품 장난감을 꺼내자 아이들 모두 손을 들고 기뻐했다.
그들 사이에 양 갈래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귀여운 뒤통수가 지나치게 익숙해 자신이야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도준 대신, 지호가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자 도준을 알아본 그가 양 갈래 머리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몇 초도 되지 않아 휙 돌아보는 얼굴은 꿈에서 수백 번은 보았던 동생, 도림이었다.
“오빠?”
오래전 영영 잃어버렸던 여동생이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도준은 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동생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도림아…….”
이름을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매일같이 기절하듯 잠든 재하를 두고 입 안으로 불렀던 이름이었으니.
“응, 오빠!”
몸을 내던지며 자신에게 안긴 도림은 환상처럼 흐릿하지도, 만지려는 순간 부서져 사라지지도 않았다.
“왜 도림이 데리러 늦게 왔어?”
“오빠가…… 늦어서 미안해.”
허벅지에 매달려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리던 도림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마치 재하처럼.
“왔으니까 용서해 줄게.”
“용서……해 준다고?”
“응! 오빠가 도림이 만나러 왔잖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작은 등이 따뜻했다. 도준이 허리를 숙이자 도림은 당연하게 양팔을 벌려 목을 안았다. 안아 든 도림의 몸이 너무 가벼워 역시 환상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코끝을 맴도는 달콤한 사탕 냄새에 현실임을 인지했다.
“우리 도림이…… 방에 가면 치카치카 해야지?”
“히잉…… 어떻게 알아써…….”
도림이 입을 가리며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이 귀여워 도준은 웃었다. 꿈이라면 깨지 않을 것이고, 환상이라면 그 속에서 매몰돼 버리고 싶었다.
“오빠, 왜 울어?”
“안 울어.”
작은 손이 얼굴에 닿자 이번에야말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울면 안 된댔어.”
“도림이도 울었다며.”
“아, 아냐. 안 울었어. 사탕도 받았는걸.”
꼬물거리며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사탕이 도준에게 내밀어졌다. 단걸 좋아하는 도림이 남겨 둘 리 없는 작고 귀여운 알사탕이었다.
“이거 오빠 줄게. 울지 마.”
가장 좋아하는 걸 양보하는 착한 아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동생. 도림이 살아 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도준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도림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았다. 몸을 떨며 울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진 도림이 함께 엉엉 울기 시작했으나 그마저도 감사했다.
주변에선 갑작스러운 도준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누구도 함부로 S급 에스퍼의 눈물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람…….”
도준이 도림을 챙기면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함께 왔던 지호는 갑작스러운 눈물의 상봉식에 어쩔 줄 모르고 지켜볼 뿐이었다.
* * *
E급 치유 능력자의 손길 한 번에 깔끔하게 나은 재하는 비상약을 충분히 챙긴 배낭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다음 날 돌아온 재윤의 말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휴가? 갑자기?”
“응, 한동안 쉬겠대.”
어제 게이트에서 돌아온 도준이 무기한 휴식을 언급했다. 당황한 협회장이 직접 달려와 도준을 설득하려 했으나 숙소 문조차 열어 주지 않았다.
계속되는 설득에 마나 제어기 따위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듯 방어 막을 펼쳐 문밖의 사람들을 전부 엘리베이터 앞까지 밀어내 버렸다. 그 과정에서 벽과 방어 막 사이에 낀 가드 두 명이 부상당한 건, 튼튼한 에스퍼의 몸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과격한 이능의 활용 방법이었다.
그 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무기한에서 일주일 휴가로 정정하는 연락이 왔지만, 어린이집 담당인 직원이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출근 안 하는 도준이 백수냐며 도림이 걱정했다고 한다. 아마도 도림의 말에 도준이 마음을 고쳐먹은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갑자기 하루 사이 바뀐 도준의 제멋대로인 행동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도준이 없어도 게이트 공략은 종종 가지 않았어?”
“그랬지만, 다른 에스퍼도 휴가를 원했거든.”
“누구?”
재하의 질문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으로 달려간 재하가 문을 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이 날 정도로 꾸민 권해일이 꾸러미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해일 형?”
“재하, 오늘 저에게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
불안해진 재하가 재윤을 돌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곤 조금 전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휴가를 냈거든, 권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