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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90화 (9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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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에서 재하가 부스럭거리며 나타나자마자 모든 걸 삭제시켜 버릴 것 같던 에스퍼들의 험악한 기세가 싹 사라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워 보이던 재윤은 순한 양이 되어 재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살폈다.

“형, 괜찮아?”

“어, 괜찮아.”

일단 대답은 했지만, 수풀 밖으로 나가면 너덜너덜한 발목을 보일 수밖에 없어 망설여졌다. 재하의 망설임을 알아챈 재윤이 먼저 손을 뻗으려는데 의식 없는 도준을 바닥에 대충 던져둔 지호가 끼어들었다.

“선배, 저 놀라게 하려고 숨어 계셨던 거죠?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장난꾸러기…….”

“거기까지만 해라.”

마치 아이돌 포즈 같은 한 손 내밀기를 하며 윙크까지 하는 지호의 뻔뻔함 덕에 재하의 걱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니들, 내가 대가리 따 버린 사마귀 봤냐?”

“일반인 힘으로는 버거웠을 텐데 진짜 대단해, 형.”

“그치? 나름 혈투였다고. 그런 의미에서 피를 좀 봤으니까 놀라지 마라.”

손을 흔들어 보이는 재하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빠르게 그를 살폈다. 혈투라고 했지만, 풀덤불 밖으로 보이는 재하의 머리부터 상체까지는 깨끗했다. 손바닥이 좀 쓸렸을 뿐,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

재하가 조심스럽게 수풀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상처를 발견한 재윤이 달려들어 안아 든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견지호, 게이트 입구로 이동해.”

“오케이~”

“자, 잠깐. 나 보낼 거면 너희들 가이딩 하고 갈게. 특히 해일 형!”

지호나 재윤에 비해 조금 떨어져 있는 해일은 한껏 타올랐던 불길을 잠재우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나 재하가 자신을 언급하자 차분하던 표정에 금이 가며 빠르게 다가왔다.

해일은 어둠 속에 갇혔을 때도 재하 생각뿐이었다. 미궁이 속삭이는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장 그곳에서 나가야 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고, 그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실을 보여 주겠다는 속삭임에 재하를 보여 달라고 답했다. 미궁은 계속해서 물어 왔다. 진실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라며 해일을 유혹했다.

그때부터 해일은 미궁을 설득했다. 재하를 봐야 하는 이유를. 그 사람은 약하다고 말하자 약하지 않으면 지키지 않을 건지 물어 왔다. 그래도 지킬 거라고 답하니 쓸모가 있어서냐고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해일은 재하를 곁에서 보면서 느꼈다. 가장 약하면서도 불평 없이 제 할 일을 해 왔다.

해일은 많은 이들을 보았다. 저를 원망하거나 무작정 의지하는 이들을. 그러나 재하는 달랐다. 제 동생을 위해 거침없이 다가왔고,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가진 것 이상을 나누고 행하는 재하는 숭고하면서도 불안했다. 재윤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결국, 미궁은 재하가 새끼 블랙 피그와 간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해일은 안심했었다. 지호가 깨어난 후에야 찾아온 재하가 이렇게 다친 상황인 줄 알았다면 결코 여유롭게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발목이 피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가이딩을 먼저 하겠다는 겁니까?”

“저야 치료만 받고 다시 들어오고 싶은데, 재윤이 얘 반응 봐요. 지금 나가면 못 들어올걸요.”

“당연하지.”

재윤은 앞뒤 따질 것 없이 재하를 밖으로 내보낼 생각뿐이었다.

게이트 안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면 형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미궁 같은 던전이 연달아 나올 리 없지만, 지금처럼 형과 헤어질 확률이 있는 장소에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형을 혼자 내보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형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게이트 공략을 포기하는 게 나아.”

단호한 재윤의 말에 재하가 손날을 세워 이마를 세게 쳤다. 상당히 힘을 주어 쳤음에도 재윤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눈만은 놀란 것처럼 커져 있었다.

“어디서 어리광이야.”

“형이 다쳤잖아.”

“어, 다쳤다. 그러니 치료는 받아야지. 파상풍은 무섭다고.”

재하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면서 지호를 피해 해일에게로 손을 뻗었다.

“해일 형, 지금 힘들죠? 가이딩 하고 나갈게요.”

“아닙니다. 공략은 나중에 다시 해도 됩니다.”

“해일 형도 농땡이 피우려고요?”

재윤에게 안긴 재하는 발목이 피투성이인데도 농땡이라는 말로 상황을 가볍게 만들려 했다.

“아이템 필요하잖아요. 저번 게이트 사태로 죄다 끌어 썼다고 하는 거 들었어요. 창고를 가득 채우진 못해도 한두 번 공략 나갈 건 있어야잖아요.”

게임에서도 공략 전 아이템 파밍은 기본이었다. 웬만하면 상점을 이용했지만, 현실에서는 아이템 상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준이, 방금 지호가 거의 던졌는데도 눈을 안 떠요. 뭐, 상태 이상 같은 거 아니에요? 얘도 해결해야 하지 않냐고요.”

재하의 짐작은 맞았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도준은 미궁의 시험 중일 터. 이 상태로 게이트에서 나갈 수 없었다. 방어 능력자인 도준의 부재 상황에 재하의 안전을 위해 에스퍼 하나를 더 내보낸다면 효율이 좋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공략 포기 후 다음을 노린다면, 게이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기자들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는 셈이었다. 아직은 협회와 고등급 에스퍼에 대한 호의로 많은 각성자가 방문하고 있지만, 협회와 무관한 에스퍼 길드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괜한 빌미를 주는 건 피해야 했다.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 재윤을 알아챈 재하가 다친 발을 앞으로 쭉 뻗어 보였다. 이 정도 움직임에는 재하를 안아 든 재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혈도 된 상태고, 도준이 깨어날 때까지만 가이딩 하고 치료받으러 갔다 올게. 그럼 되지?”

“가이딩 안 해도 돼. 바로 치료하고 숙소로 데려다줄게.”

“그럴 거면 뭐 하러 데려왔냐?”

“형을 다치게 할 줄 몰랐으니까. 위험한 곳에 형을 둘 수 없어.”

“네가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어.”

재하의 덤덤한 말에 재윤의 눈이 흔들렸다. 형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재윤이었기에 당사자에게서 듣게 된 ‘통제’라는 말은 뼈아팠다.

재하가 빤히 쳐다보고 재윤이 눈을 피하는 상황에 지호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재하의 너덜너덜한 바짓단을 걷어 발목의 상처를 확인했다.

“정말 피는 멈춘 거 같네요. 어지럽거나 하진 않나요?”

“조금 전엔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괜찮아. 다리를 심장 높이만큼 올려서 그런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일지도 모른다. 해일도 다가와 상처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재하의 안색도 나쁘지 않고.”

“게이트 입구는 안전해 보이던데. 나랑 도준이 거기에 놓고 통신기로 대화해. 걱정되면 지호가 한 번씩 와도 되고.”

“하지만 이번 던전처럼 통신기조차 통하지 않게 되면…….”

“위험하면 너희도 가지 마.”

재하의 목소리가 단호해지자 재윤은 또다시 당황했다. 재하는 재윤의 팔을 툭툭 쳐 품에서 내려와 절뚝이며 일어섰다.

“해일 형까지 너희라고 해서 미안해요. 그런데요, 너희에게 문제가 생길 정도의 상황이라면 나야말로 반대야.”

“형, 우린 에스퍼잖아.”

“그래서?”

단호한 재하의 반응에 재윤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더욱 강경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날 두고 가는 게 그렇게 걱정된다면서, 마수가 튀어나오는 장소에 너희를 보내는 나는 걱정도 안 하는 줄 아냐? 저번에 도심에서는 얼결에 나도 현장에 있었지만, 원래라면 너희만 갔을 거잖아.”

처음에는 지호의 능력으로 커피나 디저트를 날라 오며 한가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해 지호와 함께 보게 된 실제 현장은 처참했다. 곳곳에 남아 있는 핏자국,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파괴된 건물과 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보다 큰 늑대 사체에 도심인데도 비릿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오감이 자신이 알던 현실이 이렇게나 달라졌음을 일깨웠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어도 동생이 그곳에 있었다. 친구와 친한 형도 위험 속 한가운데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들을 치켜세울 때 재하는 심장이 조일 듯이 두려웠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게임 속 세상인 양 태연하게 굴었지만 실제로 그리 태평할 수 없었다.

“내가 일반인같이 약해서 걱정된다지만, 나는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위험한 곳에 가는 게 걱정돼. 하지만, 그래도 난 너희를 말리지 않았어. 세상이 바뀌었으니 우리도 바뀌어야지. 인정해.”

재하는 가까이에 있는 지호와 해일의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이어지는 가이딩이 버거웠지만, 재하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멋지고 잘난 힘을 쓰려면 내가 도와줘야 하잖아. 그러니 난 비교적 안전한 장소에서 너희를 기다릴 거야.”

“형.”

“불만이면 더 안전해지게 아이템 구해 와. 원래 이런 건 아이템 빨로 하는 거야.”

애초에 재하를 위한 아이템을 구하러 온 게이트였다.

이에 퍼뜩 기억을 떠올린 재윤이 급히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형, 손 내밀어 봐.”

“왜?”

물으면서도 손은 이미 앞으로 뻗은 후였다. 재윤은 예전에 주었던, 이펙트가 발생하는 반지 아이템을 발견하고 웃었다. 아마도 이 아이템 탓에 2차 가이딩 때 빛 무리가 발생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가이딩은 스킬이 아니기에 좀 의아했지만, 아이템이란 건 가끔 엉뚱한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었다.

“팔찌 아이템도 가지고 있었으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아, 그거. 네가 고리 찌그러트려서 한번 빼니까 낄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미안.”

제 형은 언제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 형이 이렇게나 고집을 피우는 건 이길 수 없었다.

“이것도 껴. 미궁 던전을 클리어 하니 다들 아이템이 생겼거든.”

재윤이 재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자 뻣뻣하게 손가락을 뻗고 있던 재하가 인상을 썼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 손가락이 열 개라는 건 알고 있지?”

기존 반지 위에 또 반지가 올라간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손가락에 끼는 것도 애매할 것 같아 그러려니 했다.

“위치 추적 아이템이야.”

재하 손의 반지와 똑같은 걸 낀 손을 들어 보인 재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상호 작용이 되는 거라, 이게 있으면 형이 어디서 무얼 하든 내가 알 수 있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반지를 빼내 던져 버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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