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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동생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88화 (88/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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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주는 편안함에 낯선 목소리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평온한 도준의 반응 탓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침묵이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잠들 것 같아 도준이 감았던 눈을 다시 뜨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붉게 물들었다.

“뭐…… 윽!”

시야가 어지럽게 일그러지며 온갖 색채가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귀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소리가, 머릿속으론 뒤섞인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게, 무슨…… 허억!”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밀려드는 정보를 막아 낼 수 없었다.

― 안 돼, 도림아! 악!

― 어떡해, 도림이. 도림이가.

도림이 보이지 않는데도 목이 쉬도록 부르며 울부짖는 재하의 얼굴이 낯설었다.

― 도, 도준아, 왜……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마.

― 아니야, 피하려는 게 아니고. 으응, 미안해. 미안…….

흩어진 옷가지를 손에 쥔 채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숙이는 재하의 불안은 자신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 S급 에스퍼가 끼고 다니는 가이드는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는 거지. ……뭐? 진짜 빌려주려고?

― 시…… 싫어. 도준아, 다른 사람은 싫어. 제발, 내가 잘못했어.

― 수호자는 역시 배포가 다르네. 자기 가이드도 막 나눠 주고 말이지.

처음 보는 에스퍼들이 재하를 끌고 가는데도 자신은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이 이능을 쓰면 누구도 재하를 건드리게 할 수 없을 텐데도 지키기는커녕 남의 손에 넘겨 절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 대체…… 왜? 왜…… 내가 그렇게 미우면 차라리…….

― 미워할 리 없잖아. 이 세상에서 지켜 내야 할 유일한 사람인데.

도림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건 재하뿐이었다.

― 으흑, 흑. 미안해. 미안…….

―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네게 최선이야. 나만 봐, 재하야.

불쾌감. 안도. 죄책감. 만족. 상실감. 충족.

도준이 살아오면서 겪어 본 적 없는 기억과 감정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폭력과도 같은 기억이 도준을 옭아맸다. 믿을 수 없는 기억은 지나치게 생생해 직접 겪은 것처럼 느껴졌다.

온건한 삶을 살아가던 도준에게 이제는 사라졌어야 할 미래의 기억이 뒤집어씌워졌다.

“재……하.”

머릿속에 들어찬 이름은 오로지 하나. 서재하였다.

어둠 속 홀로 선 재윤은 마나를 펼치려 했으나 아무 힘도 사용할 수 없었다.

― 기특한 아이구나.

― 시험에 빠지기엔 가혹한 삶이지만.

― 진실하라.

자신의 비밀을 아는 듯한 말들. 진실을 추궁하는 목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윤은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문서로만 봤었는데.’

게이트 안에서 만나는 던전은 열이면 열 보물 창고였지만, 간혹 다른 형태로 구현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던전형 미궁이 생성되는 경우였다.

‘호기심 많은 무형의 존재가 사는 던전.’

운명의 장난, 혹은 시험의 미궁이란 이름의 던전이었다. 또는 수다쟁이 던전이라고도 했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통과할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과 시험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 과정이 길어져 탈진한 후 풀려난 에스퍼가 등급을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사실상 급을 매길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시험 결과에 따라 적절한 아이템이 떨어지니 이 역시 보물 창고가 맞았다. 만나기 힘든 던전이니 어찌 보면 행운으로 볼 수도 있었다.

― 진실을 말하라, 서재윤.

‘말하기에 걸렸군. 나쁘지 않아.’

보거나 듣는 건 정신적으로 지칠 수 있었다. 차라리 말을 하는 편이 나았다. 이들은 던전 방문자의 기억을 읽기에 거짓말만 조심하면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어떤 진실을 말하면 될까요?”

다른 사람들도 쉬운 질문을 받기를 바라며 들려올 목소리를 기다렸다.

― 진실을 말하라.

― 진실을 말하라.

― 진실을 말하라.

뭐든 삼세번이라고 했다. 세 번이나 반복된 같은 말에 재윤은 자기소개부터 시작했다.

“이름은 이미 아시듯 서재윤이고, 스무 살입니다. 가족은 아버지가 있지만, 형과 함께 살고 있고요.”

친형이 아니니 진실이 아니라고 할 만도 한데 목소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길어지겠다 싶어 재윤은 바닥에 편히 앉았다.

“다시 돌아오기 전에는 스물다섯…… 아니, 일곱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언제부턴가 나이는 세지 않았으니까. 등급이 더 중요했거든요. A급이 되면 형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진실을 말하라.

“형을 만나고 싶었다는 게 진실이 아니라면…… 진실 맞는데요. 형을 만나고 싶었어요. 보고 싶어서.”

― 진실을.

“……원망이었을지도 모르죠. 아니, 원망했어요. 이건 딱히 감추려던 건 아닌데. 그 뒤로 일이 너무 많아서 기억이 좀 엉켜 있는 거예요.”

재윤은 두서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중간중간 진실을 말하라며 정정을 요구할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 보며 몇 번이고 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 가던 고백은 갑자기 난관에 부딪쳤다.

“형을 지키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누구라도 이용할 겁니다.”

― 진실을 말하라.

“주도준은 치워 버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두는 거예요. 견지호나 권해일이 형을 위해서 나아요.”

― 진실.

― 진실을.

재윤은 몇 번이고 자신이 겪은 일과 형의 희생을 언급하며 어째서 형을 지켜야 하는지 설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해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진실을 요구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상황에 재윤은 지치기보다 화가 났다. 형을 지키고 싶은 진심을 의심받자 참다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형을 지킬 수 있다면 난 무슨 짓이든 해!”

결국, 예의도 날려 버리고 짜증을 담아 외치자 침묵이 이어졌다.

이 말은 정답이었다. 추궁하듯 되돌아오는 진실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계속 의심받고 있다는 건가. 자신이 한 답을 곱씹어 보던 재윤은 아직 드러내지 않은 본심이 밑에 깔려 있음을 인정했다.

머뭇거리던 재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형을 지키고 싶었어.”

어쩌면 자각하지 못했던 진심이 재윤의 목 안을 꽉 막히게 했다.

“아무도 형을 보지 못하게. 나만 볼 수 있도록…… 가둬 버리고 싶어.”

어둠 속인데도 목까지 뜨끈하게 열이 올라 손으로 감춰야 했다.

“형이 나만 생각해 줬으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진심을 토해 낸 재윤이 고개를 들자 주변이 밝아져 있었다.

보석으로 가득한 빛나는 천장과 조금은 시끄러운 작은 폭포가 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저 눈이 가려져 어둠 속에 있었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하…… 정신만 건드리는 거였나.”

긴 고백 끝에 밑바닥까지 파헤쳐 끄집어내진 진심에 비로소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너무도 쉽게 빠져나와 버려 얼떨떨할 정도였다.

주변을 돌아보자 벽에 기대앉은 지호와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해일, 바닥에 드러누운 도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하는 곧장 벽에 기대앉은 지호에게 다가갔다.

“형은?”

다급한 재윤의 질문에도 지호는 반응이 없었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지호는 의식이 없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구나 싶어 주변을 살폈다. 자신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에 먼저 깨어난 형이 이동했을 경우를 떠올렸다. 마나를 퍼트려 가이딩 파동을 쫓으려 했으나 가까운 곳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형.”

가까운 길로 뛰어들려던 재윤은 형이라면 이들을 두고 굳이 자리를 떠났을 리 없음을 깨달았다. 깨어났다면 이곳에 있어야 했다.

“진정하자. 미궁은 사람을 해치지 않으니까.”

던전이 아닌 미궁이라 부르며 재윤은 불안을 가라앉혔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재윤이 돌아오자 해일이 눈을 뜨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서재윤 씨.”

“아, 돌아오셨네요. 전 주변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형이 보이질 않아서요.”

“재하는 괜찮을 겁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지만, 해일이 깨어나니 한 사람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아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런 재윤에게 해일은 안심하라며 자신이 겪은 일을 알려 주었다.

“진실을 보겠느냐고 하기에 재하가 안전한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걸 순순히 보여 주던가요?”

“아뇨,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해일의 잔잔한 미소에서 은은하게 돌아 버린 자의 고집이 느껴졌다. 자신이 알던 해일에게서 보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급한 건 형의 위치였다.

“형도 미궁 시험 중인가요?”

“아닙니다. 재하는 지금…….”

꾸. 꾸.

“너, 진짜 이거 먹어야겠냐?”

꾸―. 꾸―.

“와, 고집 봐. 알았다, 알았어.”

재하는 물을 찾아가길 바라며 쫓던 새끼 블랙 피그가 과일나무 아래에서 빙빙 도는 걸 보고 팔을 걷어붙였다. 아래쪽에 달린 덜 익은 과일은 주자마자 뱉고는 계속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코를 씰룩였다.

명확한 의사 표현에 재하가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며 나무를 타고 올랐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가벼운 몸으로 나무에 오르던 초딩 때와는 아무래도 차원이 달랐다.

“이거?”

꾸―.

재하가 든 붉은 과일을 보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콧소리도 커졌다. 툭 하나를 떨어트리자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꾸―. 꾸―.

“먹성 진짜 좋네. 좀만 기다려 봐.”

대여섯 개를 더 떨어트려 주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던 블랙 피그가 배가 불렀는지 마지막 한 개를 입에 물고 고민했다. 과일을 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재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는 할 수 없어도 사진은 찍을 수 있으니 열심히 연사하며 귀여운 모습을 한껏 담는데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한 시간이나 이러고 있었네. 숲은 빠져나가야겠지?”

지호가 찾으러 오지 못할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혹시 몰라 과일 몇 개를 배낭에 넣고 나뭇가지를 꺾어 위치를 표시했다. 새끼 블랙 피그가 재하의 뒤를 졸졸 쫓는 모습이 영락없이 반려동물과 소풍 나온 분위기였다.

“가자, 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자꾸 나아가면 다 만난다고.”

농담처럼 혼잣말하는 재하는 사실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귀여운 새끼 블랙 피그에게 집중하며 애써 긴장을 털어 냈지만, 난생처음 들어온 게이트였다. 지인들과 동떨어진 장소에 홀로 있는 상황이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써 분위기를 끌어 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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