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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미궁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한 건 지호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재하는 낙하 시 버티기 힘들 거라는 걸 알았다. 재하만이라도 확실하게 보호하고자 곧바로 이능을 사용한 지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이게 뭐…….”
던전 입구가 이렇게 어두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 이능을 쓰는 순간에도 힘껏 붙잡고 있던 손이 비어 있었다. 재하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알아챈 지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선배!”
목소리가 어둠에 삼켜졌다. 울림도 없이 먹혀 버리니 공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재하 선배!”
하지만 재하를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를 부르며 필사적으로 이능을 사용했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대체 이 어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꿈쩍도 하지 않는 이능을 사용하려 집중하는데 사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 미궁의 시험을 시작한다.
― 진실.
― 진실을 말하라.
“이게 무슨 소리야?”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견지호.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지호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최소한 무작위 질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자신에게 특정된 질문이라면, 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 진실은 무엇이냐.
― 말하라, 견지호.
“정확하게 질문해 주시겠어요? 무엇에 대한 진실을 말하면 되는지.”
침착하다 못해 여유로운 웃음까지 짓기 시작한 지호의 태도에 목소리의 울림이 잦아들었다.
― 가벼운 사내의 진심. 진실.
이번에는 여성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질문에 지호는 보이지 않음에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언제나 진심인데요. 설마 던전에서까지 추궁당할 줄은 몰랐지만, 의심받으면 좀 아프거든요.”
― 거짓을 고하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호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감정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지호였다. 차라리 감정이라는 게 눈에 보이면 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언제나 진심이었던 지호는 낯선 목소리가 구하는 진실에 진심으로 답할 준비가 돼 있었다.
“어디 한번 해 보죠, 대화.”
어둠 속에 갇힌 건 권해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능을…… 쓸 수가 없군.”
낙하의 순간, 바닥을 가늠하기 위해 불을 만들어 내던지려던 해일은 이능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마나 제어기가 상시 작동하는 센터에서 이능을 사용하지 못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이능의 소멸. 제어가 아닌 소멸 상태에 해일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재하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찾으려 했다.
쿵 소리가 날 만큼 바닥에 세게 부딪친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바로 몸을 일으켰다. 혹여나 나중에 떨어질지 모를 이들을 받아 내고자 허공을 바라봤으나 어둠뿐이었다. 떨어진 시간을 생각해 보면 천장의 보석이 내는 빛이 보일 만도 했는데, 아니라서 의아했다.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홀로 서 있는 어둠 속에서 해일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그간 수없이 던전을 드나들고 재윤을 만난 후 다양한 정보를 접했음에도 이런 경우는 듣지 못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쥐어짜는 동안에도 어둠은 그대로였고, 다른 이의 인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우.”
해일은 침착해야 함을 알았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자 떠오른 건 추락하던 재하의 놀란 얼굴이었다.
“재하…….”
게이트에 들어온 직후, 심심해하는 재하를 홀로 둔 채 재윤은 자신에게 물어 왔었다.
형의 가이딩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냐고. 안전을 위해, 혹은 소유를 위해 가두고 싶지 않냐는 뻔한 질문에 자신 역시 뻔한 답을 했다.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자신에게 재윤은 딱히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나름의 각오를 입에 담았었다.
재하를 지키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며 평소 자신이 가진 가치관에서 벗어난 대답을 했다. 이에 재윤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원하는 답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각오 따위, 지키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고민은 길었어도 입에 담기는 쉬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던 해일의 현실은 재하를 지키기는커녕 그의 곁에 있지도 못했다. 답답함이 해일의 숨통을 조여 왔다.
각오가 부족했던 걸까.
항상 웃는 얼굴에 가벼운 태도였던 견지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재하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지호 쪽이 훨씬 더 재하를 위해 움직였다.
― 진실을 보겠느냐.
갑자기 들려온 여러 목소리에 해일의 잡념이 사라졌다.
― 진실을 보겠느냐, 권해일.
사방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해일은 마나를 움직여 방향을 특정하려 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니 오히려 침착해졌다. 이능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마나 역시 흩어져 내리는 감각에도 애를 썼다.
― 대답하라.
― 미궁의 시험을 받아들여라.
미궁의 시험. 낯선 단어였으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는 명확했다.
‘시험을 치러야 나갈 수 있는 미궁에 갇혔구나.’
깨닫는 순간 해일은 계속 걱정했던 이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재하도 같은 시험을 받고 있습니까?”
― 대답하라. 진실을 보겠느냐.
해일의 질문에 답은 없었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목소리에 해일은 판단해야 했다. 이대로라면 어둠이 걷히지 않을 터.
― 권해일, 진실을 보겠느냐.
어딘지 모를 어둠 속 목소리를 향해 해일은 고개를 들었다.
“으아아악!”
추락하는 기분은 끔찍했다. 처음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어둠 속으로 떨어지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자 놀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등에 멘 배낭이 무언가에 부딪쳤는지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와 둔한 감각이 이어졌다. 그래도 하늘에서 떨어질 때에 비하면 미끄러지는 수준으로 속도가 느려져 필사적으로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나무, 이파리, 나무, 파란 하늘. 게이트에 들어왔을 땐 보지 못했던 파란 하늘에 놀랄 틈도 없이 수풀 속으로 추락했다.
“흐억! 헉!”
추락이 멈추자마자 허겁지겁 일어난 재하는 자신의 모양대로 푹 파인 수풀을 보고 안도했다. 저 풀덤불 덕에 뒤통수가 깨지는 건 면했구나 싶어 후드가 씌워진 머리를 쓸어 만졌다. 겉으로 만져지는 천은 단단했지만, 안쪽으로 눌리는 부분은 도톰하고 부드러웠다.
“후, 다들 무사해?”
최약체인 자신이 멀쩡하니 당연히 일행들도 괜찮으리라 여기며 일어선 재하는 풀과 나무뿐인 주변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귀를 기울여 봤지만, 부스럭거린다거나 비명이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 그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난. 낙오. 잠시 아찔한 단어가 스쳐 갔지만, 재하는 속전속결로 배웠던 게이트 지식을 떠올렸다.
“일단, 혼자가 됐을 때 장소부터 확인하라고 했지?”
갇혔는가? 아니요.
주변에 마수가 있는가? 없을 것 같음.
마시는 물을 구할 수 있는가? 가능할 것 같음.
낙오 전 마지막 상황을 떠올리자.
“구덩이가 생기고 떨어졌는데, 지금 여긴 밖이잖아. 그럼 구덩이로 떨어진 게 아닐 거고. 지호가 공간 이동 시켜 준 거면 지호도 있어야 하는데?”
입구로 공간 이동 후 추가 이동이 있었다면 말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호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일단 기다리면서 통신기를 이리저리 만져 봤으나 먹통이었다.
“일단 쓸 만한 게 있나 배낭을 확인해 볼까.”
당연한 결과였지만, 배낭 속은 터진 과자 봉투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과자 몇 조각을 집어 먹다가 남은 생수 양을 보고 배낭을 닫았다.
하늘은 파랗지만,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풀과 나무도 자세히 보면 방향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데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이파리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와 불안해졌다.
언제까지 지호를 기다릴 수 없어 움직여야 할지 고민했다.
교육받은 대로라면, 안전한 장소로 판단되면 기다리는 쪽을 권했으나 이곳이 안전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역시나 뭔가 있었구나 싶어 재하는 서둘러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작은 걸 보아 어쩌면 작은 마수일지도 모르지만, 공격 능력이 없는 자신에겐 아무리 작아도 위험했다.
무기가 될 만한 나뭇가지를 하나 손에 들고 부스럭거리는 풀숲을 노려보는데 익숙한 꽃 한 송이가 툭 튀어나왔다.
“어?”
꾸―.
아니나 다를까, 흔들리는 풀숲에서 튀어나온 건 새끼 블랙 피그였다.
“뭐야, 왜 니가 여기서 나와?”
연구소에서 몇 번 접했던 새끼 블랙 피그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귀여운 코를 씰룩이며 자신이 흘린 과자를 와작와작 먹는 모습에 재하는 안도했다.
“네가 있는 걸 보니까 이 숲은 F급 수준인가 보네.”
새끼 블랙 피그 서식지라면 사람이 머물기에도 적합한 수준이었다. 물론 영역 보스로 레드 맨티스가 나올 수도 있지만,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한 새끼 블랙 피그를 보니 안심이 됐다.
꾸. 꾸.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다 먹은 새끼 블랙 피그는 재하를 보고 짧게 울었다. 그러곤 풀숲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다시 울었다.
“따라오라고?”
꾸. 꾸.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며 뛰어가는 블랙 피그의 까만 궁둥이가 씰룩씰룩해 재하는 불안함도 잊고 웃음이 터졌다.
“같이 가, 흑돼지야.”
새끼 블랙 피그는 독초 외에는 정상적인 먹이를 섭취했다. 쫓아다니다 보면 마실 물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부지런히 뒤를 쫓았다.
도준은 다른 에스퍼들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다만, 완전한 어둠은 도준에게 불안이 아닌 안정감을 주었다. 지킬 무언가나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자 도준은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네놈, 참으로 지독하구나.
― 신의를 저버린 자.
― 기회를 주어야 할까.
다른 이에게는 여러 목소리가 시험하려 들었다면, 도준에게는 여러 목소리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마치 도준을 죄인 취급하며 목소리끼리 의견을 나누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 그렇다고 해도 미궁에 떨어진 자.
― 기회는 공평하게.
― 미궁의 시험을 시작하겠다.
도준은 이상하리만치 어둠이 편안했기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 도준을 어둠이 지켜보는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의아함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도준이 눈을 뜨자 그제야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진실을 원하는가, 주도준.
이번에는 여러 목소리가 한 소리를 냈다.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도준은 덤덤하게 답했다.
“네,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