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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이천오가 다시금 경고했다.
“이 자리에 서재윤 에스퍼가 있었다 해도 같은 행동을 하셨을 겁니까?”
미사일도 통하지 않는 초대형 마수의 등껍질을 파괴하고 무너트린 에스퍼의 이름에 차관의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제대로 된 가이드를 처음 만나서 반가워서 그랬지. 오해하지 말아요, 가이드 군?”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뗀 차관에게 재하는 대답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났다. 이천오가 그런 재하를 챙겨 더욱 뒤로 물러나자 차관의 경호원 역시 물러났다.
차관을 안내해야 할 가이드가 움직이지 않는데도 먼저 옥상을 나가 버리는 모습에 가드와 직원이 뒤를 따랐다. 이천오는 협회 소속이면서도 가이드인 재하가 위협당하는 상황에 움직이지 않는 다른 가드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재하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느릿하게 움직이다 멈춰 섰다.
“아오, 저 사람 안내하기 싫은데요. 사람을 막 이상하게 보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대접받는 거 좋아하는 사람 같은데 이대로 보내면 또 무슨 헛소릴 할지 걱정도 되고.”
생각과 달리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을 문지르던 끈적한 손길이나 귓가에 불어 넣던 숨이 소름 끼쳐 주먹마저 쥐어졌다.
재하의 몸이 굳어 있는 것을 알아챈 이천오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 일은 정식으로 항의해 두겠습니다.”
“하하, 괜찮아요. 손 좀 세게 잡힌 건데요, 뭐.”
괜히 이천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싶어 재하는 적당히 넘기려 했다. 그러나 이천오는 단호했다.
“괜찮은 게 아닙니다. 상대는 동의도 없이 가이딩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긴 한데, 다친 것도 아니고요. 별거 아니에요.”
“강제로 가이딩 하려는 게 어떻게 별것 아닙니까.”
강제라는 말에 적당히 넘어가려던 재하의 표정이 굳었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타인과의 가이딩은 항상 안전한 상황에서 이루어졌기에 자각이 늦었다.
동의 없는 가이딩에 위협까지 해 온 상황은 자신만 참으면 원만하게 지나간다며 넘길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하는 사람을 걱정시켜 가면서까지 참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그러네요. 고작 악수 한 번이라고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어요.”
행위는 손을 잡는 가벼운 것뿐일지라도 상대의 반응과 의도가 다르다면 이쪽 역시 확실하게 대응해야 했다.
진심으로 화를 내던 이천오가 안타까움 가득한 얼굴로 재하의 곁에서 한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소중히 해 주십시오. 다들 서재하 가이드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오의 진지함에 재하는 달라진 세상에 맞춰 생각도 변화해야 함을 깨달았다.
“네, 앞으론 확실히 대응할게요.”
주먹까지 불끈 쥐며 다짐하는 재하의 모습에 이천오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후 협회에서 준비한 오찬에 차관은 물론 협회장도 참석했다. 안내조차 하지 않고 차관을 피하려 했던 재하는 협회장이 직접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자리했다.
다행히 대화의 주제는 협회의 권한과 위기 시 대응에 대한 협회장과 차관의 견해였다. 두 사람만 주거니 받거니 칭찬과 칼날을 섞어 가며 대화를 이어 가는 내내 재하만 밥이 코로 넘어가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오늘 유익한 대화, 즐거웠습니다. 다음엔 저희 관으로 방문해 주시죠. 귀한 분이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나랏돈을 함부로 쓰면 되겠습니까. 언제든 방문해 주시면 저희 쪽에서 거하게 대접하겠습니다.”
꽉 채운 한 시간의 식사를 끝내고 차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회장이 일어서서 인사를 주고받고는 뒤돌아 다른 문으로 나가 버렸다.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반대쪽 문으로 향하던 차관이 사람들 뒤쪽으로 숨듯이 서 있는 재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늘 반가웠어요.”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차관의 행동에도 재하는 이런 순간이 오면 하려고 했던 말을 흔들림 없이 내뱉었다.
“가이드는 신체 접촉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에스퍼 취급 해 주니 신이 나는군요. 아직 검사 전이라 일반인인데도 까탈스럽게 굴 건가요?”
이에 재하가 주먹 쥔 손을 들어 차관의 손등을 스치지도 않고 지나쳤다.
“주먹 인사로 대신하죠. 안녕히 가세요, 차관님.”
“이거 참…… 귀엽군요.”
차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재하는 빠르게 뒤돌아섰다.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지금 국방부 차관보다 더 바쁘다고 말하는 건가요?”
“넵, 오늘은 그러네요. 안녕히 가세요.”
말꼬리 잡히느니 냅다 도망치자 싶어 재하는 빠르게 문밖으로 향했다. 다행히 뒤에서 붙잡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던 재하는 바싹 따라붙는 이천오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잘했죠?”
“네, 잘하셨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제가 에스퍼보다 체력이 약하지 멘탈이 약한 건 아니거든요.”
지켜야 할 대상이 하는 말이라 와닿지는 않았지만, 쾌활하기까지 한 재하의 모습에 이천오는 그의 밝은 모습이 이대로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를 위협하는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다.
가드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직접적인 외부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실습실로 향하는 내내 그는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했지만, 실습실에서는 아직 이론 수업이 한창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사람이 서투른 건지, 가이드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의 의욕이 앞선 건지 시끌시끌하기까지 했다.
안을 살펴보니 어제 연설할 때와 달리 전부 성인으로 보였다.
“학생들은 전부 떨어졌나 봐요?”
“아닙니다. 미성년은 실습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네? 실습도 안 하고 바로 현장 투입인 건가요? 애들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그보다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론 수업과 등급 체크 정도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이딩 데이터가 쌓이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이번 가이드에 한해서는 그렇게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이천오가 알려 주는 정보는 어딘지 모르게 포인트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이천오는 제대로 전하고 있었으나 재하가 알고 있는 가이딩에 대한 상식이 그들과 달라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더니 수업 중이던 임시 교사가 재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서재하 가이드, 오셨군요. 어서 올라오세요.”
교사의 안도하는 얼굴에 재하는 어차피 가야 하는 거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학생이라고 볼 수 있는 예비 가이드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다양한 연령대에 여성 비율도 제법 돼서 재하의 심장이 뛰었다.
지금까지 가이딩은 남자 에스퍼와만 해 왔지만, 떠올려 보면 2세대 에스퍼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른 성별의 에스퍼를 가이딩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머쓱하기보다는 좀 설렐 것 같았다.
행복 회로를 돌리며 단상에 올라간 재하는 가운데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의자와 테이블, 모니터를 보고 여기서 가이딩을 하는구나 짐작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수업이 길어져서 죄송해요, 서재하 가이드.”
“아니에요. 다들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에 감동했는걸요.”
웃으며 예비 가이드를 칭찬하자 다들 작게 재하를 부르며 박수까지 쳤다. 호의적인 반응에 재하가 누구와 가이딩을 하게 되나 두리번거리는데 교사가 조명을 껐다. 단상의 조명만 남긴 탓인지 학생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노래라도 불러야 하나 싶을 만큼 어색한 기분이 들려는데 교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변해 버린 미래를 지켜 내기 위해 한 손 보태고자 모인 우리 가이드 여러분, 가이드 실습 전 현장에서 뛰고 있는 최초의 가이드, 서재하 가이드가 시현을 위해 이 자리에 나와 주셨습니다. 모두 박수~”
나긋나긋한 교사의 말에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박수를 치는 것 같은데도 미묘하게 소리가 작았다. 마치 손을 아끼는 것 같은 느낌에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교사를 보자 그 역시 손목에 가까운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잘했어요. 우리 모두 손이 재산임을 잊지 말고 조심조심~”
오늘 만난 예비 가이드를 대하는 교사의 모습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굳이 손을 아껴야 하나 싶으면서도 어찌 보면 가장 편한 수단이기도 했다.
“오늘 가이딩 시현에 참여해 주시는 에스퍼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해요!”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그들의 기대가 느껴졌다.
“원래는 주도준 에스퍼만 나와 주기로 했었는데…….”
“주도준! 주도준!”
“수호자가 나온다고요?”
“다, 다들 진정~ 그래요, 수호자로 불리는 주도준 에스퍼가 오고 싶어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서 조금 늦거나 오지 못할 수 있다고 했어요.”
실망하는 예비 가이드들의 한숨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어쩌려고 저리 큰 실망을 주나 불안해하며 지켜보는데 교사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 재검사 때문에 협회에 들렀던~”
‘시바, 설마 차관은 아니지?’
당황해서 속으로 욕부터 해 버린 재하의 귀에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서재윤 에스퍼가 나와 주셨답니다.”
“꺄악!”
“서재윤! 서재윤!”
“오빠, 저랑 가이딩 해요!”
아직 재윤은 보이지도 않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정작 재하는 똥 씹은 얼굴로 보이지 않는 단상 아래 어둠을 바라봤다.
남들 앞에서 형제랑 손을 잡아야 하나 불만스러우면서도 어제 강당에서 인터뷰 중 잠깐 눈이 마주친 이후 영 만나질 못하던 차였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또렷하게 단상으로 가까워졌다. 부러 소리를 내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선명한 소리에 재윤을 부르짖던 가이드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둠을 지나 단상에 오른 재윤은 새까만 제복 차림이었다. 머리도 세팅했는지 이마의 상처가 드러났지만, 그래서 더 에스퍼의 비장함과 어울렸다. 손에는 또다시 검은 장갑이 보였지만, 가이드를 향해 손을 흔들 때 보인 손목에는 붕대가 없었다.
‘아이템이 맞긴 한가 보네.’
안도한 재하가 가자미눈으로 바라보자 어둠을 향해 인사하던 재윤이 돌아봤다. 대놓고 단상에서 마주 볼 줄 몰랐던 재하는 당황했지만, 이내 뭘 당황했냐 싶어 허리에 힘을 주고 어깨를 폈다.
“그럼 가이딩 시현을 위해 순서를 알려 드릴게요. 먼저 에스퍼와 가이드가 만나면 서로의 등급과 이름을 알려 주어야 한답니다. 사전에 협의된 상대가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랍니다.”
통성명이 필요 없는 형제였지만, 재하는 교사의 말에 따랐다.
“어, 당연히 알겠지만 니 형이다.”
불퉁한 재하의 말투에 가이드들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재윤도 슬쩍 입가에 웃음기가 걸리더니 재하가 아닌 어둠 속 가이드를 향해 자기소개를 했다.
“A급 에스퍼 서재윤입니다.”
“A급?”
“서재윤 에스퍼 B급 아니었어?”
이에 재윤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에스퍼는 마나를 남용하면 폭주 상태에 돌입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한계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제 경우 상당히 긴 시간 한계치에 달한 상태로 노력해 왔고…… 그 결과 오늘 재검을 통해 등급 상승을 확인받았습니다.”
조곤조곤하기까지 한 재윤의 설명에도 재하의 귀에는 한계라든가 폭주라는 단어만이 쏙쏙 들어왔다.
“가이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 A급이 되기는커녕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가이드 여러분의 도움이 에스퍼에게는 절실합니다.”
조금은 가벼웠을지 모를 가이드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이번에는 재하와 눈을 마주한 재윤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고마워,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