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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해일의 급발진에 가장 당황한 건 재하였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해일까지 왜 이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동생에게 사주라도 받은 건가 싶어 해일의 뒤로 보이는 재윤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눈도 안 마주치던 동생이 이쪽을 보며 얼이 나가 있었다.
‘합의된 상황도 아니었어?!’
뭔가 이유가 있어 돌발 발언을 한 게 아니었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해일의 식겁할 선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진행될 게이트 진압 시 이 사람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둘 겁니다.”
해일은 재하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 방법으로 재하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했으나 그간 에스퍼와 협회를 홍보할 때와 달리 논리가 없었다.
재하는 해일에게 있어 항상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게임상에서는 힐러였고, 현실에선 에스퍼의 힘을 무한하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인 가이드였다. 해일이 재하를 지키는 건 너무도 당연한 기본 전제였기에 설명이 빠진 탓이었다.
“악의적인 질문은 삼가 주십시오.”
이건 옳은 말이었다.
“이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뒤에 붙은 말은 과했다.
짧은 침묵이 기자들의 고민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가끔 어린아이 같은 면이 드러나는 재윤과 달리 해일은 항상 진중하고 근면 성실의 표본처럼 보였다. 거기에 신뢰감 넘치는 마스크를 가졌고, 울림을 담은 목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런 해일이 편애하는 티를 팍팍 내며 한 사람을 지키겠다고 하니 기자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질문받겠습니다.”
이 타이밍에 질문을 받겠다니, 재하는 불안해졌다.
“……두 분이 어떤 관계인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교의 나라에서 나오기 힘든 질문이었다. 말을 꺼낸 기자조차 답을 재촉하지 못할 만큼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거 연예인 열애설 인터뷰 아니라고 누가 말 좀 해 줬으면 좋겠다.
다행히 대성과 친분 있는 기자들도 섞여 있었는지 정석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해일 역시 과한 보호자처럼 굴던 모습 대신 평소의 신사 권해일로 돌아왔다.
재하는 그저 방긋방긋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고등학생일 때 매점 빵이 떨어져 담을 넘다 걸렸을 때도 빙구미 가득한 웃음으로 위기를 모면하지 않았던가.
재하는 자신의 웃음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볼 때는 사기 치기 미안할 정도로 순수하면서도 어리숙한 웃음이었다. 주머니에 사탕이라도 있으면 주고 싶어지는 천진함이 밴 선함은 순백의 제복 효과까지 더해져 자칫 질문하는 사람이 나쁜 놈 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재하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사람들이 가이드에게 가진 관심은 예상외로 폭발적이었다. 영상을 통해 몽환적이기까지 한 빛 무리와 함께 보인 가이딩은 보는 사람마다 감상이 다 달랐다. 신비로웠다, 경이로웠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부러웠다, 부끄러웠다 등등 가벼운 반응도 상당했다.
이후 협회의 발표로 인해 에스퍼와 달리 위험하지 않으면서 각성자처럼 대우받을 수 있는 가이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호기심과 호의가 뒤섞여 이목이 쏠리면서 한편으론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가이드를 지켜야 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에스퍼와 국민의 미움을 받느니 지금은 몸을 사리는 게 나았다.
결국, 모든 질문은 해일과 재윤에게로 집중됐고, 재하는 병풍이 되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후 추가 질문은 서면을 통해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권해일 에스퍼!”
“서재하 가이드,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세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재하가 돌아볼 뻔했지만, 해일이 자연스럽게 등을 감싸며 단상 뒤쪽으로 이끌었다.
빠르게 문을 통과하자 등 뒤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한바탕 기자들에게 시달렸더니 한 것도 없는데 진이 다 빠졌다.
“와, 이거, 엄청 정신없네요. 저 되게 멍청하게 굴었죠?”
“귀여웠습니다. 아주 잘했습니다, 재하.”
“잘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된 표현은 슬쩍 흘리고 잘했다는 말만 주운 재하는 재윤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재윤이는 왜 안 와요?”
“다음 일정에 합류할 겁니다.”
“다음 일정이 뭔데요?”
“일단은 휴식입니다. 오후 일정은 센터 안에서 진행되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얼마 걸리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해일은 자신이 지치진 않았는지 걱정하며 휴식을 언급했다. 멈춰 있던 자신의 등을 가볍게 밀어 주는 해일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고 보니 단상 아래에서 기자들을 막던 이천오도 아직 오지 않았다.
“이천오 씨가 아직 안 왔어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일행의 부재를 언급한 것이었지만, 해일은 다른 대답을 들려주었다. 오늘따라 해일이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통에 민망해진 재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으아, 해일 형이 말하면 되게 의미심장하게 들려서 민망해요.”
“진심입니다, 재하.”
“아휴, 알죠. 해일 형은 항상 진지하시죠. 게임에서도 늘 지켜 주셨는데 현실에서도 역시 듬직한 우리 길마 형이세요.”
재하가 다 안다는 듯 엄지까지 치켜들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한결 편안해진 재하에게 굳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해일은 자신조차도 오늘에서야 깨달은 감정을 재하가 알 리 없다고 여겼다.
해일은 자신의 위치를 항상 인지하며 살아왔다.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숨죽여 사는 게 우선이었다.
서재윤과 만나고 인정받을 때마다 고양감을 느끼는 한편, 아직 이룬 게 없음에도 전해지는 믿음에 부담 역시 있었다. 하지만 부담은 별것 아니었다. 숨죽여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당연히 자신이 해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재윤의 요구나 거침없는 행보를 따르는 게 즐거웠다.
미래를 알고 있는 재윤의 정보는 구체적이었고, 큰 도움이 되었다. 재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자신을 본 척도 않던 권해성이 먼저 나서서 연락을 취할 만큼.
최상위 등급이 아닌데도 재윤은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진 정보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재윤은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서재하의 안전.
그 탓에 재윤은 비효율적인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림자를 자처하면서도 필요하면 얼굴을 파는 일도 과감하게 행했다.
재윤이 재하를 걱정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는 형제였고, 지금도 함께 사는, 유일한 가족과도 같은 존재는 미래에 험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재윤이 때때로 드러내는 에스퍼 혐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담고 있었다.
재하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 싫어하는 이를 곁에 두면서도 항시 그와 함께할 에스퍼를 살폈다. 그중 유력한 이가 자신과 견지호였다.
아직은 다 함께 재하를 지키는 식이었지만, 협회에서 가이드에 대한 지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페어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컸다. 가장 우선시되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정해진다는 건 재윤이 이미 알려 준 사실이었다.
해일은 자신의 자리를 잘 알았다. 재윤이 생각한 페어 후보인 견지호와 해일은 성향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해일은 재윤이 생각하는 자신답게 있으려 했다.
정직하고 건실하며 신사적인 진중한 남자. 함께하면 믿음직스럽고, 말 한마디로 신뢰를 줄 수 있는 존재. 함께 있으면 불안하기보다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했다.
방어에 특화된 주도준이나 살갑게 굴며 달라붙는 견지호, 형제이자 미래를 아는 서재윤과 달리 권해일이 취해야 하는 태도는 명확했다.
그러나 그런 해일의 생각은 일반인 가드 이천오의 각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가드 적성 검사가 재윤의 제안으로 시행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해일은 당황했다. 그간 재윤은 협회에서 진행될 일에 대해선 해일과 공유해 왔다. 한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적성 검사에 이어 가드 이천오의 각성 테스트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정신없이 바쁜 재윤이 직접 나서 모든 걸 통제한 끝에 일반인 가드가 E급으로 각성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D급으로 올라섰다.
다른 때라면 인재 발굴 정도로 여겼을지 모르나 재하의 가드였다. 게다가 가드 적성 검사지의 답변은 해일이 보기에 부적절했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을 재하의 곁에 두어도 되는지 우려를 표하자 재윤은 처음으로 해일을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형을 지키는 데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를 선택한 이유는 대체…….’
해일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가진 장점이 재하의 페어로 내정된 이유라 여겼다.
가이드로 소개되는 자리에 재하를 데려가고자 찾아갔을 때도 해일은 혼란스러웠다. 그의 혼란은 이천오를 대하는 재하의 모습에 더욱 커져만 갔다.
가드에게 등을 맡기는 게 당연해진 재하는 이천오를 향해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지켜 준다는 말에 웃으며 잘 부탁한다던 재하의 해맑음이 놀라웠다.
상대의 호의에 불편한 기색을 은연중에 드러내던 재하였다. 배려해야 한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재하는 어느새 상대의 솔직한 호의를 받아들일 만큼 에스퍼들의 접근에 익숙해져 버렸다.
재윤이 직접 선별하고 각성까지 주도한 이천오가 재하와 가까워진 걸 봐 버린 해일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예의와 신뢰만으로 재하에게 이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재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넵, 말씀하세요.”
밝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드는 재하와 마주한 해일은 평소 필터를 거쳤던 말들을 그대로 전했다.
“원래 가이드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겁니까?”
“……제발 지호랑 어울리지 마세요, 길마 형.”
급격히 벌어진 마음의 거리는 호칭 변화로 드러났다.